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와 이른바 '최경환 노믹스'의 핵심인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 정책으로 서민 경제와 금융 시장 안전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가 한국은행을 상대로 벌인 국정감사에서, 야당 측 의원들은 "정부가 중산층과 서민 삶을 담보로 위험한 도박에 가까운 경기 부양책을 펼치고 있다"며 가계 부채 증가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제기했다.
아울러 때마다 기준금리 동결을 시사해 왔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최경환 경제부총리 취임 이후 '금리 인하'로 방향을 급 선회한 데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최 부총리와의 '와인 회동' 등 기획재정부의 압력이 8월 금리 인하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LTV·DTI 완화는 중산층·서민 부채 이용한 경기 부양책"
최재성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날 정부의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대출비율(LTV) 등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가 중·저소득층의 빚을 늘리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최 의원이 한국은행으로부터 받아 분석한 국내은행 9곳의 '차주특성별 은행 가계대출 잔액 현황' 자료를 보면, 정부가 LTV·DTI를 완화한 8월 1일 이후 가계 대출은 한 달 만에 4조 5000억 원(311조5000억 원→316조)이 늘었다.
이 가운데 연소득 6000만 원을 초과하는 고소득층의 증가분은 1조4000억 원이었으며, 중소득층(3000~6000만 원)과 저소득층(3000만 원 이하)의 대출 비중은 도합 68.8%(3조1000억 원)에 달했다.
최 의원은 한국은행이 정부의 "중·저소득층의 부채 증가를 통한 경기 부양" 정책에 편승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비은행 금융기관의 가계대출 잔액 현황을 분석한 결과 LTV·DTI 완화 후 저소득층의 비은행권 대출이 감소하지 않았음에도, 한국은행이 정 반대의 분석을 내놨던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9월 발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비은행 금융기관의 가계대출 확대로 가계 부채의 질적 수준 악화가 우려되나 고신용·고소득 차주를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어 단기간에 부실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최 의원은 8월 1일 완화 조치 이후 "한 달 동안 비은행 기관 가계대출 잔액이 76조6000억 원에서 76조2000억 원으로 4000억 원 감소했으나, 저소득층의 대출 잔액 감소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금융 안정의 책임이 있는 한국은행이 잘못된 통계 해석으로 정부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총부채상환비율(DTI) : 대출자의 소득에서 부동산 담보대출의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 DTI 규제가 지나치게 완화되면 소득 대부분을 부채 상환에 쓰게 돼 '하우스푸어'가 양산될 수 있다.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증가해 소비 여력 하락을 불러오기도 한다.
주택담보대출비율(LTV) : 주택담보대출 시 적용하는 대출 한도(주택 가격의 일정 비율로 정함). 지나친 규제 완화로 대출이 과도히 늘어나면 주택 가격 하락 시 금융권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 예다.
깡통 주택, 하우스푸어 위험 이미 높은데…"경제 위기 자초 망국 정책"
LTV·DTI 기준 초과로 '부실' 우려가 큰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이미 높은 만큼, 이번에 취해진 완화 조치는 서민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금융 위기로도 치달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종학 새정치연합 의원은 이날 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LTV·DTI 동시적용 주택담보대출 잔액현황' 분석 자료를 결과하며 이 같이 지적하고 나섰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2014년 상반기 기준 LTV와 DTI가 동시 적용되는 주택담보대출 82조 원의 37%(30조7000억 원)가 자칫하면 '깡통 주책'이 되거나 대출 가계를 '하우스푸어'로 전락시키는 LTV를 60% 초과 및 DTI 50% 초과 대출이었다. 이 가운데 LTV와 DTI 기준을 동시에 초과하는 '위험천만'한 대출도 4조9000억 원이나 된다.
홍 의원은 상황이 이런 만큼 "안전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강화해야 하나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필두로 한 대한민국 경제 수장들은 LTV·DTI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며 "이는 경제위기를 자초하는 망국적 정책이자 서민 삶을 담보로 하는 도박"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한국은행은 이 같은 지적들에 대해 "가계 부채 증가세가 크게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내놨다.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제출한 자료에서, 한국은행은 "인구구조 변화, 현재 경기 상황 등을 감안하면, 주택가격 상승 기대가 크게 확산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주택가격 상승 기대가 확산되지 않는다면 가계대출 수요 증가도 제한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와인 마시며 한은 독립성도 마셔버렸나"
이날 또 도마에 오른 정책은 '기준금리 인하'와 한국은행 독립성 문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장은 지난 4월 취임 후 줄곧 금리 인상 또는 동결 기조를 시사해왔다. 그러다 최 부총리가 취임한 이후인 지난 8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돌연 인하했다.
특히 이날 국감에선 이 총재와 최 부총리의 '와인 회동' 논란이 다시금 눈길을 끌었다. 최 부총리와 이 총재는 호주에서 열린 G20 회의 때 만나 경제 정책에 대한 대화를 나눴고 이후 최 부총리는 기자들을 만나 "금리의 금 자도 안 꺼냈지만 척 하면 척"이라고 뒷얘기를 전했다.
홍 의원은 "과거에는 와인을 '국민의 피눈물'이라고 했는데 와인을 마시면서 한국은행의 독립성도 마셔버린 것 아니냐"며 이 총재의 급격한 금리 인하 선회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최경환 부총리가 '척하면 척' 발언을 했다는 것을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는데 그 의미를 잘 모른다"며 "일반적인 얘기를 나눴지만 금융 정책은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인 전해방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이 총재를 지속적으로 겁박한 결과 기준 금리 인하로 정책이 급 선회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홍 의원은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정 금통위원에게 "5~7월 사이에 기재부 인사를 만난 일이 있느냐"고 집중 추궁했다. 정 위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고 홍 의원이 이에 "금통위원 기억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맞받아치는 일도 있었다.
정 위원은 지난 9월 기준금리 결정 때에도 금통위에서 '추가 인하' 소수 의견을 냈었던 인물이다.
한국은행 "기준금리 0.25%P 인하하면 가계 부채 0.24%P 증가"
한편, 한국은행은 이날 금리인하가 가계 부채 증가로 이어진다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금리 인하로 소비와 투자가 높아지더라도, 차입이 늘고 가계 부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한국은행은 새정치연합 오제세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거시계량모형을 추정한 결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하면 가계 부채는 앞으로 1년간 0.24%포인트가량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1040조 원인 가계 부채는 8월 기준금리 인하로 2조5000억 원가량 추가로 늘어난다.
한국은행의 이 같은 추정치 규모가 지나치게 작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6월 말까지 1년간 금리 인하를 한 적이 없는데도 가계 부채는 60조 원 가까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