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가 폭등, 재앙은 시작됐다] 단번에 30% '뚝'..투기 수요 불러
5월 북반구 파종 시기 앞두고 가격 압력 상승…‘엘니뇨’ 최대 변수
한경비즈니스 | 입력 2014.05.13 09:41
세계 이상기후로 농산물의 가격 변동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하락세를 유지하던 국제 곡물 가격의 변동성은 올해 초 이상기후와 맥을 같이한다. 미국 중부지역에 20년 만에 한파가 몰아닥치면서 올해 1월과 2월에 걸쳐 미국 미네소타는 섭씨 영하 37도, 디트로이트와 시카고 등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졌으며 체감온도는 영하 40~50도에 이르렀다.
이어 일본 도쿄에서 폭설이, 영국에서는 248년 만의 겨울 폭우가 오는 등 동시다발적 이상기후가 나타났다. 당장 미국의 겨울 밀 생산의 차질 우려로 올해 1월 말 가격이 4년 만에 최저점에서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의 한파는 곧 남미의 가뭄을 뜻한다. 같은 기간 남미에서는 100년 만의 무더위가 찾아왔다. 아르헨티나는 영상 50도를 웃돌며 푹푹 찌는 날씨를 이어갔다. 대두와 커피의 최대 수출국인 브라질에서도 가뭄이 지속됐다. 마침 1월 남미는 파종한 씨앗들이 발아하는 시기였다. 폭염으로 옥수수 및 대두 작황에 대한 우려가 발생했고 이는 곧바로 곡물 가격 급등으로 이어졌다.
생산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면서 브라질 대두 생산 전망이 2월 9000만 톤에서 3월 8540만 톤으로 마이너스 5.1% 하향 조정됐고 옥수수 생산 전망도 7550만 톤에서 7520만 톤으로 축소됐다. 옥수수·대두·소맥 가격들은 2012년 여름부터 장기 하락세를 지속하다가 올 들어 15% 정도 올랐다.
기후는 농산물 생산량 측면에서 가장 큰 변수로 꼽힌다. 기후 이변이 오면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고 여기에 투기 수요가 몰리면 가격이 급등하는 사이클을 갖는다.
손동현 현대증권 애널리스트는 "곡물을 포함해 금·비철금속·원유 등 원자재 시장에서 여러 리스크 요인으로 공급이 줄어도 5% 안팎으로 큰 폭으로 줄지 않는 반면 이상기후는 2012년 라니냐가 왔을 때만 보더라도 단번에 30%까지 줄었다"며 공급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1988년 미국에서 5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 발생했고 7월에는 미국 영토의 40%가 가뭄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때 옥수수는 34%, 대두는 21%, 여름 밀은 50% 이상 생산이 감소했으며 투기 수요가 밀려들어 가격이 급등했다. 특히 옥수수·대두·소맥 등 세 메이저 작물은 미국·남미·호주·동남아 등 소수 국가들이 독점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이상기후 빈번…곡물 가격 주기 짧아져
최근 들어 이상기후는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 가뭄·홍수·폭염 등 세계적인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는 2007년 이후 매년 350건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잦은 이상기후와 함께 곡물 시장의 가격 변동성이 높아져 곡물 가격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 7~10년 주기로 급등과 하락을 보였다면 2004년 이후 서서히 짧아져 2008년 이후에는 2년에 한 번꼴로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과거에는 계절·온도·습도 변화 등이 오차 범위 안에서 예측이 가능했다면 최근에는 오차가 커지고 예측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손동현 애널리스트는 "2002년 미국·캐나다·호주 흉작, 2003년 미국 흉작, 2006년 호주·캐나다 가뭄, 2007년 유럽·호주 가뭄, 2010년 러시아 가뭄, 2012년 미국·러시아 가뭄 등 지속적인 가뭄이 곡물 시장의 가격 불안정성을 유발했고 투기적 세력이 가세하면서 변동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은 한파에 이어 최근에는 가뭄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 상무부(USCD) 기준 가뭄의 최고 단계인 D3~D4 단계가 올 들어 4.13%에서 7.37%로 확대되는 등 미국 전역으로 극도의 가뭄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미국 해양대기청 예상에 따르면 향후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작물의 생육 사이클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파종과 발아 기간으로 통한다. 현재 북반구는 본격적인 파종을 앞두고 있다. 미국 중서부 지역 옥수수와 대두를 기준으로 5월부터 파종이 시작돼 6월에 발아 시기를 앞두고 있다. 시기적으로 5~8월 사이 기후가 작황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 이에 따라 현재 5월 파종 시기를 앞두고 가뭄이 확대되고 있어 가격 변동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2012년 라니냐 이후 가격이 폭등하면서 생산 농가들이 씨앗을 대량으로 뿌려 아직 수급에 적색등이 켜진 상황은 아니지만 이상기후가 지속되면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건 분명하다.
당장 옥수수 파종을 시작한 북미 농부들이 가뭄 때문에 옥수수 대신 다른 작물로 바꿔 심은 일이 발생하며 옥수수 가격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다. 미국 농무부에서 발표한 파종 의향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옥수수 파종 진행률은 예전에 비해 느린 상황이며 파종 면적도 지난해보다 4% 감소한 9170만 에이커로 예상된다. 실제로 이와 비슷하다면 신곡 파종 면적인 2010년 이후 최저 수준이 된다.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이상기후로 가격이 급등한 상태에서 각국의 정책이 자국 내 소비를 위해 수출 제한을 확대하는 경우다.
올해 슈퍼 엘니뇨 공습하나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은 엘니뇨로 꼽힌다. 적도 태평양의 동쪽 해수면 온도가 평년 대비 0.5도 이상 높으면 엘니뇨, 마이너스 0.5도 이하면 라니냐로 구분하는데, 올해 엘니뇨 발생 가능성이 점차 올라가고 있다.
호주 기상청에 따르면 엘니뇨 발생 가능성은 5월 30%, 6월 40%, 8월 60%다. 엘니뇨가 발생하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지속되며 정상적인 대기 순환을 방해함으로써 지역에 따라 가뭄·홍수·이상기온 등 기상 이변을 일으킨다.
더욱이 올해는 '슈퍼 엘니뇨'가 몰려올 수도 있다. 1997~1998년 금세기 최악의 엘니뇨로 평가되는 슈퍼 엘니뇨 이후 17년 만에 강력한 한 방이 몰려올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관들이 적지 않다. 미국 국립해양대기국(NOAA)은 올여름이나 가을에 엘니뇨 발생 확률이 50%이며 만약 발생할 경우 1997년 슈퍼 엘니뇨에 버금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엘니뇨가 하반기에 발생할 가능성은 기정사실화된 정도이며 엘니뇨가 최소 6개월 이상 지속된 이후에 정의를 내리기 때문에 시기를 정확히 언급할 수 없지만 하반기에 발생하면 겨울철에는 확실히 엘니뇨에 들어가는 것이고 북동부 쪽에서는 고온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엘니뇨가 하반기 세계 농산물 시장에 최대 위협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엘니뇨 발생 시기에 따라 남미·아시아에서 생산되는 대두·커피·원당·원면 등의 공급이 감소할 것으로 보이며 글로벌 곡물 생산 및 재고 감소 우려가 커질수록 곡물 가격 강세는 커질 전망이다.
미국 농부무 자료에 따르면 엘니뇨 발생 시기 옥수수 생산량이 평균 수준보다 저조하고 옥수수·면화와 같은 여름 농산물의 수확철인 가을에 비가 자주 내려 수확이 지연됐으며 잦은 비로 인해 겨울 밀 생산율이 저하된 것으로 나타났다.
오정석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엘니뇨는 세계 곳곳에 기상이변을 유발해 곡물뿐만 아니라 원당·커피·코코아 등 농산물 전반의 작황 및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기상이변이 오는 추세 자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함께 가격 변동성에 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요 생산국들의 수출 제한 및 식량 위기 재연 등에 따른 대비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투자 관점에서도 이상기후나 공급 여건을 반영한 사이클이 현재 저점에 도달했고 올해 반등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가격 상승 잠재력이 높을 것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엘니뇨와 라니냐
미국 해양대기청은 적도 중앙 지역과 동태평양을 4구역으로 구분해 평년 해수면 온도를 기준으로 0.5도 이상 높으면 엘니뇨, 마이너스 0.5도 이하면 라니냐로 규정한다.
엘니뇨는 태평양 적도와 남미 서부 연안 해안에서 해수면이 따뜻해지면서 열대지방에 폭우가 발생하며 라니냐는 온도가 하락해 기압골의 변화를 만들어 내고 궁극적으로 미국 북부지역의 이상기후를 야기한다. 통상 엘니뇨와 라니냐는 2~5년 주기로 발생하며 지속 기간은 9개월에서 12개월 정도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