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마오쩌둥 시기에는 마오의 아집과 카리스마를 넘기 어려웠지만, 이후에는 적게는 상무위원 단위, 중앙위원 단위에서 자신의 정견과 비전을 제시하고 그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지도자로 부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 덩샤오핑이 노동을 했던 난창 트랙터 공장 덩샤오핑은 문혁 시기 고통을 겪었지만 이곳에서 단련되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 |
ⓒ 조창완 |
마오는 새로운 황제의 후임으로 화궈펑(華國鋒)을 낙점했다. 마오가 "당신에게 맡기면 안심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호박머리' 화궈펑은 마오가 부활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열어준 '오뚝이' 덩샤오핑(鄧小平)을 이겨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았다.
▲ 비극적인 톈안먼 사건의 현장 인민혁명 기념비가 있는 톈안먼 광장은 해방의 공간이자 절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 |
ⓒ 조창완 |
이런 모든 상황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자 5?4운동 70주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인 이 해는 그간의 개방의 속도와 갖가지 갈등이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대신에 상하이 당서기였지만 중앙 정치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장쩌민(江澤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장쩌민(江澤民)은 혼자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의 오른팔인 쩡칭홍(曾慶紅)을 비롯해 그와 함께 성장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동행했다. 중앙정치에는 곧바로 '상하이방'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 롄화산에 있는 덩샤오핑 동상 중국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덩샤오핑 동상이다 | |
ⓒ 조창완 |
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은 그 종교를 복잡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덩은 그런 중국인의 부자 본능을 다시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본능은 덩의 생사와 상관없이 대륙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연재기사
시진핑, 25년 권력 장쩌민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 (0) | 2014.04.05 |
---|---|
★★★<<< 中 위기, 포춘 500대 기업에 물어라 >>>★★★ (0) | 2014.04.02 |
[경영전략 트렌드] 급팽창하는 중국의 양자 암호 네트워크 (0) | 2014.03.28 |
신이 된 마오쩌둥, 중국을 알려면 그를 알아야 (0) | 2014.03.27 |
<<< 진짜 경제위기는 중국에서 시작된다. >>> (0) | 2014.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