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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3. 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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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작가의 중국관, 한국을 덮다

[중국 속에서 15년-15] 2013년, 시진핑 시대의 등장과 보시라이의 몰락
오마이뉴스 2014.03.22 21:17 최종 업데이트 2014.03.22 21:17  조창완(choga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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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멍구 울란보통 초원 아름다운 울란보통 초원은 사막화 확대를 막는 마지막 위치에 있다. 주변은 계속해서 황막화되어 가고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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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 중국 중동부 지역에 대규모 미세먼지가 나타났다. 곳곳에서 미세먼지 경보가 발생했다. 이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미세먼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달 중순부터 한국에서 스모그 같은 현상이 발생하면서 호흡기 환자가 급증하자 미세먼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가기 시작했다.

 


매년 8%씩 성장하는 초성장 국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기회이면서 위기였다. 발전한 중국 동부지역에서 한국까지는 직선거리로 500~1000킬로미터다. 석탄, 철강이 많이 생산되는 산시성이나 네이멍구 석탄 및 화력발전 주력지역에서도 한국까지의 거리는 1200킬로미터 정도다. 바람에 따라 하루에서 이틀이면 도달하는 거리다.

 


황사가 그저 짙을 뿐 인체에 치명적이지 않은 백년 남짓된 기상현상이라면 미세먼지는 사람들에게 더 위험하고 통제가 쉽지 않은 오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특히 베이징, 톈진, 선양, 따리엔 등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의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발전 속도를 통제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 정부도 이런 심각성을 감안해 10㎛ 이하(PM-10)는 보통 미세먼지로, 지름 2.5㎛이하(PM-2.5)는 초미세먼지로 구분하고, 미세먼지 관측농도를 알리고 있다.

 


2월12일에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미 익숙해지면서 주변국들도 이제 크게 동요하지 않을 만큼 내성이 생긴 상황이었다. 인공지진 강도 4.9진도 전후로 측정되고, 위력도 높게는 10킬로톤 정도로 평가되었다. 김정은 체제의 안착 등 미묘한 문제가 있어서 동북아는 오히려 더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듯 했다.

 


3월14일 열린 전인대에서 시진핑을 신일기(新一屆) 중국국가주석으로 선출했다. 3월15일에는 리커창을 국무원 총리로 결정했다. 이로써 시진핑은 옥상옥이 없는 중국 정치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아버지가 고위 정치가였지만 문화대혁명의 격랑 속에서 고통을 겪은 성장기의 청년, 처음에는 농촌의 벼룩조차 힘들어 포기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공청단을 거쳐 당원이 된 청년, 청화대학에 들어가 테크노그라트 출신의 지도자로 성장, 군인 출신인 특급 가수 출신인 부인 펑리위앤과의 만남,

 

저지앙성과 상하이 당서기를 거친 상하이방이 인정한 지도자 등 중국의 권력과 연결된 모든 곳에 뿌리를 둔 정치가였다. 그로서는 거칠 것 없는 권력을 잡은 셈이다. 하지만 그만큼 큰 권한에는 그만큼 큰 책임도 따른다.

 


성장률 8%유지라는 바오빠(保八)정책의 포기, 테이퍼링으로 인한 국제경제의 위축, 사회주의 국가라는 인식으로 인한 국가간 장벽, 지나치게 집중된 중국 공산당 귀족층이 가진 부의 재분배 등 문제는 어느 하나도 그가 쉽사리 뛰어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노동절 연휴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5월9일 대만 어선 '광따싱28호'가 필리핀 공무선의 사격을 받고,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만은 필리핀인에 대한 노동비자 발급 중단, 필리핀 여행 제한 등으로 맡서고, 중국도 대만 편을 들었다.

 

필리핀은 3개월 만에 사과 사절단을 파견해 겨우 문제를 봉합했다. 이런 사건들은 향후에도 이 지역을 두고 결코 평화스러운 미래만이 있지 않다는 것을 화긴해준 셈이었다.

 


7월6일에 아시아나항공기가 LA공항 착륙 사고로 중국인 학생 3명이 사망했다. 16살로 항저우 인근 명문학교의 고1일 학생이던 예멍위앤(葉夢圓)과 왕주지아(王琳佳)는 자신들이 좋아하던 피아노와 책을 놓고 떠나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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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정의 보시라이 한때는 주석까지 바라보는 태자당의 선두주자였지만 이제는 당원자격까지 잃고 몰락하고 말았다
ⓒ 중국정치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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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중국 산동성에 있는 지난(濟南)시 중급인민법원은 1심 선고공판에서 보시라이(薄熙來 65)에게 뇌물수수, 공금횡령,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해 무기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또 보시라이의 정치적 권리를 종신박탈하며 모든 금융재산을 압수한다고 밝혔다. 시진핑보다 4살 많은 보시라이는 성장부터 관직생활까지 모든 면에서 경쟁적인 인물이었다.

 


시진핑은 칭화대를, 보시라이는 베이징대를 나왔다. 시진핑이 연예인이면서 군인인 유명한 부인을 두었고, 보시라이의 부인도 구카이라이도 전문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구카이라이는 미국에서 1심에 패소한 중국업체를 맡아 미국으로 건너가 상급심을 뒤집는 등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추문들이 보시라이를 더 옥죄면서 그녀 역시 종신형을 선고 받은 처지다.

 


보시라이의 처벌은 전후 과정을 떠나 그가 정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 시절 그는 가장 촉망받는 정치인이자 잘 생긴 외모 등으로 차세대 상무위원에 오를 것을 의심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자신감이 있었다. 때문에 정치국원에 오르는 순서나 상무위원에 오르는 순서도 한 템포씩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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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호도선 정판교의 말을 연원으로 삼아 만들어진 술 '소호도선'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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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총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리석기는 더욱 어렵다(聰明難 糊塗更難)'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양주팔괴 중 하나인 정판교(鄭板橋 1693 -1765)의 고사 '어리숙한 첫 하기 어렵다'(難得糊塗)에서 나온 말이다. 공식 인구 14억명의 중국에서 총명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백지장 차이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자신이 가진 장점을 부각하기 보다는 주변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성장하기 어렵다. 보시라이는 이런 자질이 부족했다. 반면에 시진핑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자신이 같이할 조직을 내세웠다.

 


공직 생활을 3년도 채우기 전 나에게도 위기가 왔다. 일하던 새만금경제청이 폐지되면서 내 일자리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정대로 9월 12일에 국토교통부 산하에 외청으로 새만금 개발청이 발족했지만 자연스러운 승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10월초 면접을 보고 나는 혼자 지리산을 향했다.

 

대학 2학년이던 93년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문학기행을 위해 처음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를 한 후 한국에 있을 때는 매년 다녔던 산이었다. 보통은 2박3일 긴 산을 걸으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흔 중반의 지리산은 교만스럽게 자신 껏 걷는 산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한 걸음으로 느껴졌던 산장과 산장간도 길게 만 느껴졌다. 거기에 마침 지리산에 접근한 태풍으로 인해 세석산장에서 급거 하산해야 했다. 천왕봉을 5킬로미터 앞두고, 물로 흠벅 젖은 등산화를 신은 체 급하게 하산하는 길은 처음에 참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서서히 아름다운 한신계곡이 눈에 들어왔다. 10여차례 지리산을 왔지만 정작 종주에 집착하다가 지리산 속에 있던 아름다운 곳들은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내 인생도 목표만 보면 과정 속에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리라는 경고 같았다. 다행히 새로운 곳에 합격해 출근하기 시작했다. 3년여간 정들었던 전라북도를 떠나 세종시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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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 선생의 정글만리 표지 소설적 완성도를 떠나 노작가가 우리나라에 던지는 중국에 관한 담론이다
ⓒ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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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을 달군 책은 조정래 선생의 '정글만리'였다. 중국을 배경으로 비즈니스 맨들과 유학생, 의사 등이 등장인물로 나온 이 소설의 인기는 의외였다. 우선 앞에 출간됐던 대작들에 비해 소설적 수준은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한국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독자들이 너무 잘 이해한다는 듯 3권의 시리즈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작가는 중국이 향후 미국을 넘어 G1으로 간다는 것을 전제한 듯이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에 드러나는 내용들이 지나치게 편향적인 것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10년 간 현지에 있었던 나도 몰랐던 내용이 많았다. 2006년 출간된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이 중국을 알게했다면, 조정래 작가의 책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이상 중국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요소라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12월 6일에는 남아공 지도자 만델라가 서거했다. 12월 중순에는 북한의 2인자로 알려졌던 장성택이 처형됐다는 소식이 알려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북한 내부에서 대표적인 지중파이자 유연한 인물로 알려진 장성택의 처형은 중국으로서도 놀랄 상황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의 원조로 인해 북한에 대해 혈맹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또 북한의 자원, 동해로 연결할 수 있는 나진선봉항 조차 등 다양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간과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지중파의 처형은 분명히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김정은의 북한과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운 숙제를 남긴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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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토끼호 달에 착륙한 후 활동하던 옥토끼호. 수명은 길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 중국위성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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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21시 11분 중국의 우주선 창어 3호(嫦娥三號)의 달 탐사선 옥토끼호가 달에 착륙했다. 비록 예정된 활동시간을 채우지 못했지만 계획하던 달 탐사계획의 성공에 중국은 고무됐다. 

 


12월 28인 마오쩌둥의 탄생 120년이 되는 날로 조촐한 행사들이 이어졌다. 1893년 이날 후난성 상탄(湘潭) 샤오산(韶山)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열정적인 모습과 카리즈마 넘치는 능력으로 중국 혁명을 이끌었다.

 

저우언라이나 장궈다오, 류샤오치 같은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때로는 능력으로 때로는 간계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들을 물리치고 중국의 지도자가 됐다.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는 말이 있을 만큼 실수도 많았다.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수천만이 굶어죽기도 했다.

 


1959년 류샤오치에게 주석직을 물려주고, 뒤에서 그를 봐야하는 마오의 심사는 분명 편치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문화대혁명으로 가는 상황을 결국 묵인했다. 류샤오치는 물론이고 린뱌오 등이 그를 대적했지만 오히려 패배해 비극적 죽음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묘한 상황도 있었다. 류샤오치와 함께 개혁 성향이 있었던 덩샤오핑은 그의 눈밖에 남에도 불구하고, 당적을 박탈하지 않아 부활의 기회를 주었다. 실질적으로 마오의 시대를 이은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이 외세에 밀리지 않고, 세계 양대헤게모니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지금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신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인물이 됐다. 그는 지금도 톈안먼의 앞에서 거대한 초상화로 세상을 응시하고 있으며, 중국 지폐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는 마오쩌둥의 인물화로 장식되어 있다.

 



대학시절 중국과 인연이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나는 제 2외국어조차 중국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고, 2013년 다시 새로운 곳에서 중국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투자유치는 사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같은 일이다. 특히 내가 느끼는 이 일은 한중관계의 미래는 물론이고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 대기업이 서서히 위축되듯 국제경제무대에서 한국은 중국을 상대로 제 역할을 찾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한국이 중국의 등을 타지 못한다면, 혹시 탔더라도 역린을 건드려 떨어진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이럴 경우 한국은 지속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오는 중국 자본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또 이런 상황이 몇십년만 고착화되면 화교자본에 영향력에 들어간 동남아 국가들과 비슷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하기 어렵다. 중국을 주 타깃으로 투자유치를 하고 있지만 무작정 업무를 추진하기 보다는 미래 국가전략을 가져야만 제대로 된 국가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내가 공직 생활에 들어왔을 때 잘 버틸까를 걱정했다. 하지만 어려운 조직사회 속에서 나름대로 내 일을 기획하고, 완수해나가는 노하우를 찾아왔다. 그러나 한계도 뻔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나 역시 노마드를 지향하던 내 모습을 잃고, 성안에 안주하는 것을 즐기는 나태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하지만 난 내 스스로에게 이 문구만은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다"(칭기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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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여행 윈난성 따리 얼하이호를 여행할 때 동행들을 찍었다. 다시 편안한 여행이 있을까 싶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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