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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달라진 광개토대왕릉비 주변... 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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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2. 2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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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달라진 광개토대왕릉비 주변... 그땐 그랬지

[중국 속에서 15년 ⑥] 동북공정으로 한중 갈등 점화된 2004년
오마이뉴스  2014.02.25 15:56 최종 업데이트 2014.02.25 15:56  조창완(chogaci)

 

 

 

한중 경제 교류는 수교 10년을 넘어가면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2003년 우리나라의 중국 수출은 351억1100만 달러로 342억1300만 달러인 미국을 처음으로 제쳤다. 전년 대비 중국 수출 47.8% 증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보였다. 중국과의 무역 수지도 132억 달러였다. 2004년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은 497억6300만 달러였다. 이 즈음부터 한국 경제 수지를 논할 때는 중국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경제 교류와 달리 문화나 정서적인 교류의 폭은 크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2004년 정초부터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사건의 단초는 바로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문제'였다.

 


이 문제가 물밑에서 움직인 것은 2002년 2월 중국 최고의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동북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과제'가 정부의 승인을 받으면서부터다. 연구의 목적인 고구려·발해 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해 한반도 통일이 일어날 경우 관련 지역의 영토에 관한 역사적 토대를 장악하기 위함이다.

 


일본의 근대 이전 지도나 교육에서 독도가 한국땅으로 표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사교과서나 인식에서 고구려는 한국 역사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중국 사학계의 급진좌파들이 목적을 우선시 한 이런 연구를 주장하고, 한반도의 복잡한 정치적 흐름과 맞물리면서 표면에 드러났다.

 


우리 역사 유적인데 도둑 촬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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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보호막을 씌운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 지안(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2002년까지 일반에 촬영을 허가하던 중국은 이후 보호막을 씌우고 촬영 등을 막았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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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은 고구려 유적이 많은 고구려의 첫 도읍 환인(桓仁)이나 국내성 유적지인 집안(集安) 등에서 감지됐다. 2002년 이전에 집안의 광개토대왕릉비는 촬영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2002년부터는 감시원이 상주해 비의 촬영을 철저히 막았다. 이런 태도는 비밀스럽게 사진을 찍다가 걸리면 삭제를 요청한다거나, 카메라를 빼앗으려는 등의 행태로 더욱 강경해졌다.

 

급기야 이후에는 비석을 덮는 건물까지 세웠다. 나 역시 이후에 방송코디네이션 등의 일로 고구려 유적을 찍으러 가는 일이 많았는데, 위험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문제는 고구려사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발해사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코디네이션 일 때문에 발해 왕궁터 등 여러 유적지를 꼭 찍어야 했었는데, 피 말리는 도둑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밖에서, 장수왕릉은 새벽에 일찍 가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2004년 초께였다. 한국 언론들은 본격적으로 동북공정을 보도했고, 중국과 한국의 갈등은 첨예화됐다. 연일 관련 칼럼 등이 쏟아지면서 한중 관계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진실'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4년 2월, 중국 인문 명문인 베이징대의 고대사 교과서에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하는 교재가 쓰이고 있는 게 알려졌다. 2004년 3월에는 교육부 산하 고구려 연구재단이 발족하면서 학문적 준비도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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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 영토 분쟁으로 조용할 날 없는 댜오위다오 중국이 대양으로 나가는 교두보이기 때문에 이 섬에 대한 영토분쟁은 끝날 수 없을 것이다
ⓒ 중국정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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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혀 다른 곳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나왔다. 바로 중국과 일본이 영토 갈등 중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문제가 더 불거졌다. 이곳은 오랫동안 갈등 지역으로 분류됐는데, 2003년 초 일본이 임차권을 주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 이후 2004년에는 중국에서 반일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3월 24일, 중국인 활동가 일곱 명이 댜오위다오에 상륙해 일본이 이들을 체포했다. 당시 일본은 송환을 미뤘는데, 이때 중국 내 반일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이에 동북공정 문제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흘러가기 시작했고, 2004년 8월 27일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자칭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회담을 통해 이 문제를 차분히 정리했다.

 


'노팁·노쇼핑·노옵션' 여행사를 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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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중 '야출고북구기'의 탄생지인 고북구 장성 앞에서 테마여행단 베이징에서 열하(청더)로 가는 길에 있는 고북구장성. 이곳에서 '야출고북구기'라는 명문이 나왔다. 필자가 운영하던 테마여행에 참석했던 참가자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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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2004년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있었던 해다. 중국 여행책 두 권(<알짜배기 세계여행 중국> <중국도시기행>)을 출간하고, <오마이뉴스> 등에 관련 내용을 기고했다. 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중국 여행에 대한 질의가 늘어났다. 이 쪽 세계에서 제법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몇몇 사람이 톈진에 있던 나를 찾아와 중국 전문 여행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나는 이들과 2004년 1월, 한국에 알자여행을 창업했다.

 


이 즈음에 한국에서는 베이징·상하이는 물론이고 장지아지에(장가계) 등 여행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수많은 여행사들이 여행 상품을 만들었지만, 대부분 패키지 상품이어서 중국을 제대로 아는 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우리 여행사는 가장 먼저 '노팁' '노쇼핑' '노옵션'으로 정가제를 표방했다. 또 제대로 된 여행 안내자를 동행시키는 여행 상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마케팅이었다. 당시에도 나는 <오마이뉴스>에 찾아가 테마여행을 같이 해보자고 요청했다. 그래서 처음 만든 여행은 '고미숙과 떠나는 열하기행'이었다. 여행 기획을 한 뒤 동숭동에 있던 '수유 너머' 고미숙 연구원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부탁했다. 고미숙씨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출간해 인문학계의 신선한 충격을 던진 상태였다.

 


길에 대한 이해 부족과 청동릉(淸東陵)까지 보여주려는 욕심에 코스를 너무 힘들게 잡았다. 때문에 다음 행선지에 오후 10시에 도착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이 여행을 진행하면서 나는 여행 문화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여행 도중 고미숙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책을 읽고 스스로에게 변화가 없다면 진정한 독서가 아니고, 여행을 한 후 변화된 것이 없다면 좋은 여행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내 깊숙이 들어왔다. 대학시절, '하루에 한 권 이상 책을 읽자'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쏙, 사회에 나온 뒤부터는 PC통신 독서일기로 '잘난 척'을 했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이 길을 통해 '제대로 된 노마드가 되자'고 다짐했다. 이런 다짐 때문인지 이후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다가 최근에는 공직의 길을 걷고 있다. 물론 이 역시 한시적일 수 있지만, 일에 노마디즘을 접목하는 방식으로 역마살을 붙잡고 있다.

 


동북공정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있었지만 5월 10일에 한중 최초의 합작 드라마인 <북경 내사랑>이 방영됐다. 20부작이었던 이 드라마는 배우 김재원과 순페이페이가 호흡을 맞췄다.

 


중국인이 한국인과 비교해 부족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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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근대 지성인 루쉰의 고거 입구 중국인의 몸의 병을 고치는 대신,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섰던 루쉰의 옛 마을. 저지앙 샤오싱에 있는 고향에서는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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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중국에는 재미있는 화두가 던져지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1972년생인 문화평론가 '장홍지에'(張宏杰)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나 민족성을 비교한 <중국인이 한국인과 비교해 부족한 게 무엇인가>(中國人比韓國人少什么?)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옌징(베이징)을 긍정적으로 읽는 방식을 소개하는 등 한류(韓流) 등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한국인의 민족주의·근면성·청결 등을 바탕으로 단기간 급속한 성장을 이룬 한국인의 민족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 내면에는 현대 제도를 철저하게 받아들인 것과 민족의 정신·전통을 잘 보존한 것을 꼽았다.

 


중국인의 민족성에 날선 비판을 한 것은 장홍지에뿐만 아니다. 루쉰은 단편소설 <약>에서 선각자가 흘린 피를 만두에 묻혀 폐병 걸린 자식에 주려는 민중의 어려석음을 꼽았다. 대만에서 활동하던 작가 보양은 <추악한 중국인>이라는 책을 통해 중국인의 각성을 요청하기도 했다.

 


중화주의가 강한 중국인들로서는 뼈저린 이야기여서 비판의 여지가 많지만 내부에서 던진 반성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장홍지에도 이후 중국 최고의 지성 논단 백가강단의 주빈으로 성장하는 등 역사와 현대를 연결하는 저술과 강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한국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지한파 중 한 명이다.

 


4조 원 들인 생산시설... 빛 바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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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리엔 창싱다오에 있는 STX 제조 도크 이때 시작된 STX의 중국 진출은 4조 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건질 수 없을 만큼 힘들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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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경제·문화적으로 복잡한 흐름들이 감지됐다. 경제적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도 있었다. 그해 2월 LCD 분야의 강자였던 하이디스가 중국에 팔렸다. 당시 8~10년 정도 차이가 있던 것으로 평가받던 이 분야에서 이 일을 통해 기술 차가 없어졌다.

 


국내 대기업 산하의 다른 관련 회사들도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다가 2010년이 넘어서면서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선배들도 퇴직 후 중국 회사로 자리를 옮겨가기도 했다. 최고 경영진에 있었던 만큼 기술은 물론이고 마케팅 기법, 국제시장의 인맥들도 그들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해 진해에 있던 조선기업 STX도 중국 진출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지금 총리인 리커창 당시 랴오닝 성장이 적극적으로 주선해 따리엔 인근 창싱다오에 100만 평의 땅을 무상제공했다. STX는 4조 원을 투자해 그룹 생산시설과 엔진공장 등을 창싱다오로 옮기기 시작했다.

 

조선 산업은 서서히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10년 후인 2014년 거대한 자금이 들어간 창싱다오 공장은 STX 채권단의 이전투구 속에서 투자금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 금액으로 평가받으면서 위기에 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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