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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황사 전문기자는 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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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2. 2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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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황사 전문기자는 왜 사라졌나

[중국 속에서 15년 ④] 급증하는 한중 교류, 감지되는 위기
오마이뉴스  2014.02.20 16:44 최종 업데이트 2014.02.25 14:40  조창완(chogaci)

 

2002년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내게는 중국에서 생활한 지 4년째를 맞는 해였다. 현지 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중국 관련 뉴스와 이슈를 접하다보니 중국이 빠르게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 정도 시기가 가장 위험한 시기다. 스스로 중국을 좀 안다고 느끼면서, '진짜 중국'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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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 진출한 한국 철강회사의 생산라인 모습 한중 수교 10년인 2002년을 전환점으로 우리 대기업의 중국 투자도 봇물을 이루었다. 하지만 다시 십수년 지금, 위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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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중국 속 한국은 뭔가 위태로웠다. 그런 내용들을 정리해 2002년이 시작될 즈음부터 나는 <오마이뉴스>에 '차이나 드림'이라는 연재기사를 7차례 썼다.  '중국은 있지만 우리가 얻기엔 멀다' '식지 않는 열기, 뒹구는 상처들' '그나마 10% 정도가 성공했다고 할까' '개인은 물론이고 대기업도 진출에 쓴맛' 등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진출에 대한 우려와 신중을 요청하는 기사였다.

 

사전에 학습을 하고 시스템을 갖춘 대기업은 괜찮았지만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의 환호는 10년 만에 곡소리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와는 상관없이 대기업들의 중국 러시는 계속됐다. 그해 2002년 10월 현대자동차도 베이징자동차와 합작으로 중국에 진출해 빠르게 정착했다. 굴착기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던 대우(이후 두산에 매각)나 삼성전자, LG전자 등도 잘 안착했다. 좀 늦었지만 포스코 역시 성공적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92년 26억5400만 불로 6번째 수출국이었던 중국은 10년후인 2002년 237억5400만 불로 10배 가량 늘어났다. 수출국 순위에서도 미국(327억8000만 불)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중국 수출 수치는 2013년(1~11월) 1328억4000만 불로 전 세계 전체 수출시장 중 26% 차지해 미국(11.1%), 일본(6.26%)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하지만 안타깝게 이런 현상은 지속되기 힘들어 지고 있다. 두산 굴착기는 이미 시장 대부분을 중국기업이 가져갔고, 포스코도 바오산철강이나 우한철강에 밀리는 상황이 됐다. 삼성전자는 시안(西安)에 신규투자로 새로운 도약을 바라보고 있지만 기술에서 별로 밀리지 않은 중국과 승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명확하다. LG전자는 상당 부분 철수했다.

 


이마트는 상하이에서 20여 개의 지점을 내며 성공적으로 진출하는가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흐름은 역전되어 철수의 길을 걷고 있다. 유통업은 외국 기업이 다른 시장에 진출하기 어려운 분야 중 하나다. 가전부터 신선식품까지 다루는 만큼 철저한 제품 관리 등 매장의 서비스가 겸비되야 하기 때문이다. 이 특성 때문에 유명한 해외 유통업체도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했다. 그런데 비슷한 오류를 우리 기업들은 중국에서 경험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기사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대안은 그저 막연한 수준이었다. 기술과 마케팅 능력의 격차가 좁협지는 만큼 중장기으로 신중하게 접근하라고 주문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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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 발원지인 네이멍구 주도인 후허하오터에 닥친 황사 오후 3시께인데도 황사로 인해 밤처럼 어두워진 후허하오터 역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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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국을 확실히 각인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대지를 어둡게 할 정도로 강한 황사가 베이징, 톈진을 지나 한국에도 몰아닥친 것이다. 이 황사는 중국의 환경 문제가 한국에게도 큰 위협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이 황사는 기자로서 내 본능을 일깨우는 소재가 됐다. 그해 2월 다른 취재를 위해 충칭에 들렀는데, 봄꽃이 예년보다 휠씬 빨리 피는 게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가 나는 중국 기사 등을 참고해 기사 '중국 이상 기온이 한국도 위협한다'를 썼다.

 


거대한 황사가 닥친 것은 3월 20일이었다. 이후 막강한 황사가 계속됐다. 당시 거주하던 톈진에 황사가 오면 다음날은 어지없이 서울 등 수도권에도 황사가 닥쳤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황사를 예보했다. 또 황사 발원지인 네이멍구 쿠푸치 사막과 마오우스 사막 현지를 취재해 당시 영상통신원으로 일하던 KBS <세계는 지금> 등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나는 매년 황사철이 되기 한 달여 전부터 황사에 관심을 가졌다. 대부분 황사 발원지인 네이멍구나 깐수성을 취재한 후 기사를 썼다. 운좋게도 매년 거의 정확하게 황사 상황을 맞춰 '황사전문기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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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 발원지인 쿠푸치 사막 한국 황사의 절반 이상은 네이멍구 남쪽 마오우스 사막과 쿠푸치 사막에서 발원한다. 이곳은 사막화를 막기 위해 목양을 금지하지만 주민들이 생업인 목양을 버리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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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활동은 2008년 끝났다. 다른 일로 급거 귀국한 후 나는 중국 기상청 자료 등만을 근거로 황사 예측기사를 보도했다. 나는 그해 황사가 많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해 황사는 약했다. 황사철이 지난 후, 나는 더는 '황사 예보'를 하지 않겠다는 기사를 썼다. 가장 큰 이유는 봄철에 강하게 불어 황사를 몰고온 편서풍이 지구 대기의 혼돈으로 인해 이제 힘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황사는 그저 한철의 자연현상이지만 지구 대기의 변화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마지막을 묵시록으로 끝낸 셈이었다. 실제로 그 이후에는 봄철에 황사가 찾아오는 일은 별로 없었고, 미세먼지나 오염물질이 우발적으로 한국을 찾아오는 형국이 됐다. 황사를 예보하기 위해 네이멍구 기상청이나 연구기관의 황사 전문가에게 예고 없이 찾아가 취재를 하는 등 위험천만한 취재 등 황사와 같이한 6년여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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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초 베이징 왕푸징에 등장한 중국의 헌혈차 매혈이 큰 수익이던 시기에 헌혈차는 신기했다. 하지만 헌혈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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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세계는 한일 월드컵의 열풍 속에 빠져 들었다. 첫 본선 진출을 이룬 중국도 들떴다. 한국이 16강, 8강, 4강으로 가는 시간은 유학생들에게도 가슴 벅찬 시기였다. 한국인회나 유학생회가 주최한 응원장소에서 경기를 본 이후에는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군중에 대한 두려움이 있음에도 공안도 이 순간만은 별다른 제제를 하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은 본선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실력차를 확인하면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씁쓸히 바라봤다.  

 


2002년 6월 중국에서는 한 상징적인 사건이 중국 부모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피를 팔아 자식의 학비를 지원했는데, 자식이 학업을 포기하면서 실망한 부모가 아이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당대판 '허삼관 매혈기'로 불린 이 사건의 주인공은 칭하이성 러두(樂都)현에 사는 천방순(陳邦順. 50세)씨였다.

 

척박한 지역인 농부인 천씨는 큰 아들이 공부를 제법하자 시안(西安)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한 학기 5000 위안에 달하는 학비를 댈 방법이 없어, 그는 9개 매혈소를 돌아다니며 전혈과 혈장을 파는 방식으로 한달에 300~400위안을 벌어 아들의 학비에 보탰다.

 


4년 동안 6만3000위안이나 되는 큰 돈을 보내면서 아들이 자신과 남은 두 아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뒤 천씨는 아이의 담임교수에게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성적불량으로 제적위기라는 소식이었다. 아이는 그간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등 놀면서 시간과 돈을 허비한 것이었다.

 

결국 분노한 천씨는 여론재판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대화'에 참여해 아들에 대한 감정을 풀어보려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 사건을 통해 독생자녀제도 이후 소황제가 된 아이들과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는 씁쓸한 사건으로 기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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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협 물담기 전에 벌어지는 마지막 용주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우산사람들 장강 삼협의 중간인 우샤의 도시인 우산에서 축수전에 벌어지는 마지막 용주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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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의 마지막날 창지앙 중류에 건설되는 산샤댐의 물막이 공사를 위해 뱃길을 끊었다. 1994년에 시작되어 2009년에 마치는 산샤댐은 호수 면적만 1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용이었다.

 


내가 산샤를 처음 찾은 것은 뱃길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열리는 용선경기를 취재하기 위해서 였다. 산샤댐의 상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즈구이(姉歸)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이 각별한 것은 중국 최고의 시인 굴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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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원 고향 표지 장강 수몰로 마을을 옮긴 후 관리가 부실해 풀이 난 즈구이 굴원 고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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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屈原 BC 343?~BC278)은 동양의 호메로스라 할 수 있는 비극 작가였다. 뛰어난 학식과 문장력으로 초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두루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런 굴원을 막은 것은 유명한 연횡설을 추진한 진나라 장의(張儀)였다. 굴원은 약한 나라들이 힘을 합쳐 진에 대항하는 합종설을 추진하다가 결국 정치 일선에서 쫓겨난다.

 


초나라의 미래를 아는 굴원은 강남을 유랑하다가 어부사(漁父辭)를 짓고 멱라수에 뛰어들어 자결한다. 그가 죽은 날은 단오(음력 5월5일)가 되고, 물고기가 그의 시신을 먹지 말라고 대나무로 쌓은 밥를 강에 던지고, 그의 시신을 빨리 건지기 위해 배를 타고 경주하는 용선(龍船)경기가 생겼다. 홍콩이나 서양에도 퍼져 '드래곤보트'로 불리는 용선놀이는 멱라수를 비롯해 그의 고향인 즈구이나 삼협 곳곳에서 벌어진다.

 


나는 삼협으로 인해 옛 강가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지는 용선경기를 취재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삼협댐 추진으로 인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과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는 추억들이었다. 고향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민(移民)은 결국 영혼을 찌르는 아픔이었다. 어떤 이들은 남고, 어떤 이들은 떠나 낯선 마을의 섬처럼 파고 들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2002년 단오날의 용선경기는 그래서 더욱 애닮았다.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언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다지 익숙하지 않지만 수십 팀이 차례차례 경기를 벌였다.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던 할머니 한 분이 곧 수몰될 옛집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를 하면서 울고 있었다.

 


이 때를 마지막으로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고 나가고, 세상에서는 새로운 사람이 옛사람을 바꾸어 나간다'(長江後浪推前浪 浮事新人換舊人)는 말도 허언이 되고 말았다. 최소한 의창에서 충칭에 이르는 삼협댐 구간 1000평방킬로미터 안에서는 앞물결 뒷물결이 구별없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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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우지정의 고사가 나온 백제성에서 본 구당협 삼협 가운데도 가장 아름다운 구당협으로 들어가는 협곡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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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물막이 공사를 시작한 삼협댐은 2008년 10월 26일 완공됐다. 댐이 완공되기 얼마 전인 5월에 쓰촨성 원추안(汶川)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의 원인에 산샤댐이 있다는 주장도 많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전력이 급했다. 매년 10% 경제가 성장하는 상황에서 산샤댐의 역할은 컸다. 산샤댐이 생산하는 전력량은 시간당 846억8000kw로 원자력 발전소 18기에 해당한다.

 

이 전기의 사용권에는 광둥성 지역은 물론이고 상하이도 포함되어 있다. 이곳은 산샤댐으로 전력난을 극복했다. 산샤댐의 환경적 위험을 알지만 그 대신 원자력 발전소 18기를 세우는 게 옳은가를 물어보면 쉽게 답을 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가족에게도 이 시기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2002년 8월 용우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전해 2001년 4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그해 가을, 역시 남편을 잃은 이모님과 중국을 찾았다. 두 분을 여행시키기 위해 빠다링 장성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탈 때 아내가 핸드폰으로 임신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10개월 후 내가 중국철학기행 취재를 위해 한 달 넘게 대륙을 헤맬 때, 용우가 태어났다. 귀국해 안산 처남집에서 잠시 머물던 아내와 막 태어난 용우를 보자 눈물이 났다. 아이를 생각해 다시 배를 타고, 톈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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