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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이 있는 풍경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2. 2. 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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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이 있는 풍경

구조론연구소 김동렬슨생  2012.02.07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20202205008021&cateid=1052

 

이 기사 보신 분 많을 거다. 직장내 왕따문제를 제기한 건데 네티즌 의견을 ‘등록순’으로 보면 의외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다 한나라당 알바는 아닐 거다.

 

“그런것도 컨트롤 할줄 알아야 되지않을까..? 학교생활 군생활 직장생활 오년차지만 왕따 당하는 사람은 모두 이유가있다.(아무개)

 

“오죽 했으면 직장상사가 횟집에서 회식을 하는 걸로 부하직원을 왕따시켰을까?(아무개)”

 

“회를 먹는 게 죽는 거보다도 싫더라도 직장내 회식에선 회를 먹어줘야 하는 게 직장생활이고 사회생활이다.(아무개)“

 

이들은 화가 나 있다. 왜 화가 났을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왜 스트레스를 받을까? 상부구조의 개입, 곧 무의식의 작동 때문이다. 뇌가 공동체의 긴장을 감지했을 때 호르몬을 분비하며, 그 호르몬에 의해 흥분하게 된다. 비이성의 광기로 치닫는다. 이는 기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화가 나는건 당연하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버리면 실패다.

 

기자는 사회문제를 제기한 건데 악플러는 개인을 겨냥한다. 왜? 사회에 각을 세우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회의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는 거대한 성벽과 같다. 감히 범접할 수 없다. 건드려봤자 답 안 나온다. 그들은 만만한 개인을 건드린다. ‘너 하나 참으면 된다’는 식이다.

 

버거워도 사회전체에 대립각을 세우는게 용기다. 100년이 걸려도 1000년이 걸려도 조금씩 확률을 높여가며 뚜벅뚜벅 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사회의 구조, 제도,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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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노숙자를 향해 ‘저 게으럼뱅이들 같으니라구.’ 하고 화를 낸다. 왜 화를 낼까? 화가 나기 때문이다. 왜 화가 날까? 아프기 때문이다. 왜 아플까? 찔렸기 때문이다. 어디에 찔렸을까? 양심에 찔린 거다.

 

공동체의 긴장을 감지한 데 따른 스트레스다. 상부구조로부터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였다. 무의식의 지령이 내려왔다. 호르몬이 분비되었다. 분기탱천했다. 그들은 흥분하여 콧김을 실룩거리며 쇳소리를 낸다. 약자를 공격한다.

 

개인은 언제라도 스트레스를 집단에 전가한다. 이는 공동체적 동물인 인간이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인류는 이 방법으로 진화해 왔다. 매우 비합리적으로. 매우 느리게. 여전히 그 진화의 시스템을 쓰는게 야만이다.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무조건 약자를 공격한다. 그 사람을 희생시킨다. 모두가 그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 방법으로 집단을 긴장시킨다. 집단 전체가 하나의 사건에 주목하게 한다. 집단에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다.

 

현대인이라면 언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을 쓴다. 사건을 공론에 붙이고, 회의를 소집하고, 집단의 의사결정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야만은? 언론도 없고 회의도 없다. 의사결정방법도 없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을 쓴다. 심청을 인당수에 던진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인다. 원시의 희생제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를 죽여야 공동체가 긴장하고 정신을 차리는 거다. 심청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어야 선원들이 조심해서 항해한다.

 

피를 부르는 그 야만의 본능을 극복하라. 그래야 인간의 자격이 있다. 문명인이라면 본능이 아닌 이성으로, 개인을 공격할게 아니라 시스템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이를 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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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까페? 그들은 왜 나꼼수를 비판했을까? 화가 났기 때문이다. 왜 화가 났을까? 나꼼수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나꼼수를 통제할 수 없을까?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왜 통제하려 했을까?

 

나꼼수가 권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왜 나꼼수가 권력화 되었을까?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공동체 내부의 밸런스가 깨졌다. 모두들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래서 화가 난 거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버리면 실패다. 그게 야만이다. 그게 이성적이지 못한 거다. 그게 무의식의 명령을 따른 거다. 전혀 본능을 극복하지 못한 거다. 이는 전혀 배운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못 배워먹은 행동이다.

 

무엇이 잘못인가? 무엇이 저울추를 기울게 했는가? 본질은 따로 있다. 공동체 내부의 균형을 위하여 나꼼수가 활동을 그만두어야 할까? 공격수가 너무 빠르게 치고 나가면 감독은 공격을 스톱시키고 후퇴를 명령해야 할까?

 

일본 만담의 논법으로 하면 보케가 너무 잘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츳코미가 받쳐주지 못해서 탈이다. 김병만이 잘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류담이 못받쳐줘서 문제다. 김어준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재빨리 조율하여 그것을 수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츳코미의 역할이다.

 

전방의 선발대가 너무 빠르게 전진하면 후방의 보급부대는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나꼼수가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서 선두와 후미 간에 간격이 벌어졌다면 후미의 지원부대가 더 행군속도를 높여야 한다.

 

그들이 화가 난 이유는 나꼼수가 무언가를 생산하는 동안 그들 자신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부 밸런스가 깨졌고 그 때문에 공동체 내부에 강한 스트레스가 걸렸고 따라서 화가 난 것이다.

 

실상 그들은 자기네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있다. 자기네들이 밸런스를 못 맞추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비겁하다. 이는 부자가 노숙자를 향해 화를 내는 것과 같고, 악플러가 직장왕따의 피해자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다.

 

기자가 제기한 직장내 왕따문제는 사실 해결하기 어렵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미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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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생쇼? 변희재한테 얻어맞고 나꼼수에 화풀이? 변희재에게 맞을 때는 표현의 자유, 나꼼수를 때릴 때는 표현의 억압?

 

필자의 문제제기는 다른데 있다. 어쨌든 그 퍼포먼스는 적어도 예술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예술을 공격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야만이다. 불량한 예술도 예술이다. 싸구려 홀딱쇼라도 예술의 흉내를 내었다면 적어도 그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왜? 그것이 배운 사람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왜? 그것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예술 앞에서는 겸허하라. 창의성 앞에서는, 아이디어 앞에서는 겸허하라. 설사 어린이의 저급한 낙서라 할지라도 뭔가 해보려는 몸짓 앞에서는 진지한 자세로 바라보라. 그 지점이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선이다.

 

나쁜 방법이든 좋은 방법이든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일체의 창의적 예술행위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작가 앞에서는 재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연주자 앞에서 후원자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면 넌센스다. 발명가 앞에서 장사꾼이 목청을 높이면 곤란하다. 앤디워홀은 바스키아의 낙서 앞에서도 겸허함을 잃지 않았다.

 

예술은 공동체 내부의 상호작용을 늘리고 인류의 집단지능을 끌어올린다. 기성세대가 저급하다고 말하는 만화도 인류의 아이큐를 올리고 문제해결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정해야 한다.

 

약간의 아이디어가 있고, 창의성이 있고, 재치가 있고, 지적 모험심과 탐구심이 있는 일체의 예술행위나 그러한 시도 앞에서는 할 말이 있어도 입을 꽉 다물고 참아야 한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보고 분노가 치밀어도 점잖은 체 해야 한다. 입에서 욕지기가 올라와도 입을 앙다물고 미소를 지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다.

 

시험에 들고 만다. 그대는 인간인가?

 

적어도 인간이라면 이를 악물고 그 인간됨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아는 사람의 대화상대가 될 수 있다.

 

저급한 창의에는 고급한 창의로 응수하는 방법 외에 없다. ‘가슴이 터지도록 나와라 정봉주’가 저급해서 불만이면, 그 저급한 아이디어를 망신시켜 주는 고급한 아이디어로 뒷통수 치는 방법 외에는 그 어떠한 방법도 없다. 원래 없다.

 

허접 창의를 깨수부는 방법은 진짜 창의로 응수하는 방법 뿐이다. 설사 그렇게 해도 최초로 그것을 한 사람에게 저작권이 있다. ‘가슴이 터지도록 나와라 정봉주’가 먼저 치고 나온 아이디어이므로, 이걸 비판하든, 씹어돌리든, 반대하든, 응수하든 모두 하부구조로 종속된다. 이미 기선을 뺏긴 거다. 족보로 논하면 모두 그의 자식들이다. 아류는 원본을 이길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뛰어난 아류도 저급한 원본을 비웃을 수 없다. 아이디어는 절대적으로 먼저 하는 사람에게 권리가 있다. 후발주자는 입 다물라. 궁물을 우려먹는 평론가는 결코 작가 위에 올라설 수 없다.

 

뭐 이딴게 중요한건 아니다. 겨우 이딴 걸로 핏대 세우고 논쟁하면 한심한 거고 문제는 조중동이 북치고 장구치고 열심히 띄운 자본주의 4.0의 대몰락이다. 이게 문제의 본질이다. 그들은 지금 의제설정권을 잃었다.

 

자본주의 4.0 대작전의 화려한 몰락, 형광등 100개 아우라 작전의 대실패, 종편 시청률의 무한몰락. 새누리당 당명의 대참사. 새누리당 로고의 대파국. 그들은 지금 힘을 잃었다. 그 어떤 콘텐츠도 먹히지 않는다. 시장의 반응이 없다.

 

그들은 자존심 접어두고 진보진영 내부의 다툼을 중계방송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잘하고 있다. 진중권이 문제가 아니라 조중동이 그것을 기사라고 써주는게 문제의 본질이고, 그 이유는 조중동이 이미 의제설정권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제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쪽을 싸움붙여놓고 중계방송 하는 저급한 전략을 쓰기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법은?

 

신경쓸거 없다. 어떻든 우리는 내부의 상호작용을 늘려가면 된다. 치고 박든, 지지고 볶든 우리가 뉴스를 생산하고, 우리가 의제를 설정하고, 우리가 방향을 잡아가면 된다. 우리가 내부에서 치고 받고 할수록 박근혜의 존재감은 엷어진다.

 

진중권이 뭐라든, 조중동이 이를 어떻게 악용하든 우리는 이를 거꾸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끼리 쟁투하면서 박근혜를 저 멀리 잊혀진 존재로 만들기다.

 

진보가 분열하면? 양동작전을 쓰면 된다. 전혀 걱정할거 없다. 오히려 진보의 지나친 압승이 걱정거리다. 어떻든 우리는 아슬아슬한 긴장구도를 끌고가야 한다. 속 편하게 가고 싶은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5년 전에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큰 거다. 그들의 분열이 그들을 키웠다. 분열하는 척 하면서 역할분담으로 판짜기 한 거다. 지금은 우리가 문재인, 안철수로 역할분담 하면서 공간을 벌리고 파이를 키운다.

 

그물은 양쪽으로 폭넓게 벌려야 물고기를 가둘 수 있다. 진중권 대 나꼼수로 벌리든, 문재인 대 안철수로 벌리든, 진보당 대 통합당으로 벌리든 일단 공간을 폭넓게 벌려줘야 일이 된다. 그렇게 벌리면서 박근혜를 벼랑끝으로 밀어내는 거다.

 

우리의 진짜 적은? 우리를 해이하게 만드는, 내부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창의력을 바닥나게 하는,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동기를 잃게 만드는, 전선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피아구분을 못하게 하는, 애매하게 물타기 하는 그런 것들이다.

 

눈빛이 매서운 자가 최후에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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