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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우리의 미래다

노짱, 문프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7. 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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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우리의 미래다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사회디자인연구소 / 김병준 / 2011-07-22)

 


※ 이 강의록은 라디오21이 주최한 ‘고 노무현 대통령 2주기 추모’ 강연의 제6강(2011년 6월 15일)을 녹취하여 읽기 편한 문장으로 재정리한 것입니다.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부 첨삭과 일부 내용의 전후 이동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메시아’는 없다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오늘 강의의 제목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오래된 화두입니다. 젊은 시절 시민운동에 뛰어들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거죠. 첫 번째 강의에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이 지방자치와 공동체 문제로 시작되었었다고 했는데, 그때 그 이야기 속에도 이런 질문과 생각이 깔려있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곧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행정 체제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분권이고 자치고, 공동체였습니다.

 

평소 우리는 사람 중심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누가 어떻게 해서 기업을 키웠고, 누가 어떻게 해서 나라를 흥하게 했고, 또 망하게 했다는 이야기들이죠. 틀린 거 아닙니다. 일은 사람이 하죠. 누가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사람 키우자는 이야기도 하고 리더십 이야기도 하는 거죠.

 

그러나 그 이면을 보십시오.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게 된 배경부터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데까지의 모든 과정에는 그 나름의 상황이 있고, 배경이 있습니다. 또 동지와 동료들도 있고. 고객과 후원자도 있습니다. 이들이 상황변수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역동성이 그 인물과 그 업적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훌륭하고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기다리는 거죠. 사람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을, 또 다른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같은 분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이런 분들이 나와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단칼에 해결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성공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거죠.

 

메시아는 올 것인가? 그야말로 ‘단칼’에 말씀드리죠. 그런 메시아… ‘성공하는 메시아’는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습니다. 좋은 정치지도자가 나올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나와도 성공하기 힘듭니다. 냉소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말이죠. 대통령 선거도 어느 쪽이 덜 나쁜 쪽인가를 가리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둘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첫째, 이제 우리나라는 누구도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위대한 생각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또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다 해도, 이 땅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단칼에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칼’ 자체가 없거나 날이 무디어져 제대로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강의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특히 대통령직은 그러합니다. 더 이상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를 하던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힘은 누가 가지고 있나? 이미 많은 부분 국민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시민사회가 가지고 있고, 시장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언론이 가지고 있고 종교단체가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또 이를 장악한 특정인이나 집단이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 겁니다. 전쟁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누가 이를 용납하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마음대로 힘을 쓰기는 어려웠습니다. 정부에 순종하는 신민적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고, 군과 경찰을 비롯한 억압기구들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정부는 막대한 정치자금을 만들어 정치공작을 해야 했고, 정치·사회의 주요 인사들을 끊임없이 회유해야 했습니다. 또 저항과 억압의 악순환을 부를 수밖에 없는 진압행위를 계속 해야 했습니다. 마음대로 안 되니 돈도 뿌리고 폭력도 쓰고 한 거죠. 그러다 결국 내부의 반란으로 대통령이 시해되는 일이 일어났죠. 그때도 그랬는데 시민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오늘에야 오죽하겠습니까? 누구도 메시아가 될 만큼의 힘이나 영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 사회의 이해관계 구조입니다. 과거와 달리 매우 복잡합니다. 단순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 건드리면 저것이 터지고, 저것 건드리면 이것이 터집니다. 이해관계를 잘 조율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대학등록금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처음 이야기 나올 때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되죠?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복잡합니다. 대학교육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군지? 돈이 어디서 나와야 되는지? 등록금을 지원하게 되면 대학을 가지 않고 산업체에서 기술을 익히고 있는 사람들과의 형평은 어떻게 되는지? 우리 대학들이 정말 정부지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교육을 시킬 수나 있는지? 등…. 설령 칼을 높이 들었다 해도 곧 슬며시 내려놓게 됩니다. 자칫하면 이쪽 아니면 저쪽에서, 아니면 이쪽저쪽 모두로부터 욕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부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결정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욕을 별로 안 먹습니다. 여기저기 인간다운 면모 보여주며 인사만 잘하고 다니면 됩니다. 그러나 결정행위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욕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결정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자 했을 때는 부동산을 가진 사람 누군가를 때리게 되어 있죠. 수능 1등급을 4%로 할 거냐? 아니면 7%나 11%로 할 거냐? 어느 쪽 손을 들어주든 욕은 먹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부모라도 공부 잘하는 첫째가 대학 갈 때와 공부 못 하는 둘째가 갈 때의 입장이 다르거든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특정 업종에 대한 진입규제 문제… 등, 모든 문제에 신념과 가치, 그리고 이해관계가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맺고 끊으며 사회적 쟁점이 되는 이슈들을 정리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개그 콘서트에 나오는 말처럼 그야말로 ‘제명이 됩니다.’ 화살을 맞거나 총을 맞거나 유탄을 맞죠. 어떤 형태로든 공격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메시아’를 보기 힘들 것이라는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할까요? 이건 신문에 난 것을 일부만 카피한 한 건데요(그림 1), 2008년 1월의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 신년교례회 때의 이야기입니다. 2007년의 대선이 막 끝난 직후였으니 교례회의 분위기도 뜨거웠습니다. 몇 사람이 축사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저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영상 메시지가 먼저 나가고, 그다음에 한나라당 대표 등 두어 사람이 축사를 했습니다. 맨 뒤가 박근혜 전 대표였고, 제가 그 바로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축사를 하신 분이 듣기 거북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대구·경북이 드디어 한 건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축사가 “그동안 좌파 정권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이제부터 대한민국 잘 될 겁니다.”… 이렇게 나갔죠. 이것저것 앞의 정부들에 대한 과한 비판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다음인데, 참 곤란하더군요. 덕담이나 하는 자리에서 조목조목 반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무책임한 것 같고요. 고민을 하다가 그 당시 가지고 있던 생각과 심정을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새 정부를 담당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충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신문에 난 겁니다만…

 

<그림 1>2008년 대구·경북 신년교례회 관련 신문기사

 

“선거에 이긴 것 축하드린다. 그리고 한 마디 드리겠다. 민주사회에서의 권력은 손잡이 없는 양날의 칼과 같다. 그것도 매우 무거운 양날의 칼이다. 그래서 잡는 순간 손을 베인다. 행사해 보겠다고 높이 드는 순간 팔목을 다친다. 그리고 이리저리 휘두르다 보면 그 칼이 이미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이 무겁고 험한 물건을 내려놓는다. 솔직히 홀가분하다. 자, 이제 그 칼 가지셨으니 잘 쓰시라. 다치시지 말고….”

 

셋째, 우리 정치과정의 문제입니다. 공장으로 치면 공정과정이 엉망입니다. 공정과정이 엉망인 공장에서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겠습니까? 공정과정이 시원찮으면 제품도 시원찮지요.

 

우리 정치과정 보십시오. 제대로 된 부분이 있습니까? 정당부터가 엉망이죠. 우리가 원하는 정도의 좋고 유능한 사람들을 불러 낼 수 있는 구도가 아닙니다. 또 어찌어찌 그런 사람을 불러내었다고 해도 제대로 키우고 보호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비방하고 찌르고 하죠. 이유가 어디에 있건 말입니다. 그러니 정치적 냉소는 하늘을 찌르고, 그 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거죠.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오기 힘든 구도죠.

 

노무현 대통령 같은 분도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죠.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기적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게다가 결국은 꽃길을 밟으며 퇴임하지 못하셨죠. 살아서 메시아가 되지도 못하셨고요.

 

정치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계기는 그나마 정치공정이 대대적으로 수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민경선 말씀입니다. 국민경선이라는 과정이 없었다면 여당의 후보가 될 수 없었죠. 언감생심, 생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공정이 어떠했습니까? 후보가 되었다고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후보에 대한 지지도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죠. 그런데 하향추세에 있다고 바로 다른 후보로 바꿔야 한다고 야단들을 쳤습니다. 당내 인사들이 말이죠. 한두 분이 아니었습니다. 후단협(후보단일화협의회) 기억하시죠. 정몽준 의원을 새로 만든 당의 후보로 내어 놓고, 후보교체를 하겠다고 나오니 지지도는 더 떨어졌죠. 그렇지 않아도 언론환경이 최악인 상태에서 말입니다. 후보가 된 다음, 후보께 말씀드렸습니다. 후보가 되기보다 후보 지위를 유지하기가 더 힘드실 거라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던 거죠.

 

 

노무현 후보 쪽에서 단일화로 치고 나가지 않았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자세히 이야기 드릴 일은 아닙니다만 정말 후보 지위가 날아갈 뻔했습니다. 복기를 해 보면 소설로 써도 그 정도면 독자들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기적이 반복되면 ‘황당무계’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거죠.

 

강의 끝나고 뒤풀이 할 때나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때도 그렇습니다. 설문조사하는 날짜만 다르게 잡혔어도 정몽준 후보를 이기기 힘들었을 겁니다. 전화설문 조사라 요일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죠. 다행히 일요일을 포함된 날짜가 잡혔고(일요일과 월요일) 그것도 설문대상자들의 응답률이 높다 보니 조사 자체가 일요일에 다 끝나 버렸죠. 이게 노무현 후보에게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30대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평일에 전화를 받는 사람과 일요일에 전화받는 사람이 다를 수 있거든요. 말하자면 샘플이 달라진다는 거죠. 나중에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정치공장’의 이런 공정과정이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또 얼마나 바뀔까요? 국민경선도 몇 번 시도되면서 그 열기가 식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가 되던 그때의 열기가 아닙니다. 국민적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거죠, 상대적으로 정당조직의 영향이 더 커지고 있고요. 지금의 추세라면 각 정당이 고장 난 공정 그대로, 아니면 조금 고치는 시늉이나 하면서 제품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큽니다. 메시아가 나타날 수 있는 공정이 아니죠.


메시아의 이면

 

 

힘을 쓸 수 있는 메시아가 나타난다 해도 걱정입니다. 권력이나 영향력이 집중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당분간은 잘 나갈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긴 그림자를 남기게 됩니다. 말씀드리기 좋게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 보죠. 인권을 탄압했느니 민주주의를 말살시켰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많이 하던 이야기이니까요. 오히려 그분이 잘했다고 하는 경제성장의 이야기를 해 보죠. 미래와 관련된 의미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나 카리스마가 경제발전의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는 그렇게 다스려야 해’라고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멋있어 보이죠. 특히 남성우월적 사고에 젖은 사람들이나 결단력과 추진력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보십시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어느 신문이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하면서 제목으로 썼던 말입니다만, 전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당신들 나한테 불만 있어? 그래도 참아,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와! 못 참겠어? 그러면 나보다 오래 살아. 그래서 나 죽고 난 다음에 내 무덤 앞에서나 욕이나 해.” 이런 말 아닙니까?

 

실제로 이런 카리스마가 경제를 잘 돌아가게 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와 현대조선소 같은 성장기반이 군사작전 하듯 건설되었죠. 공사 중에 사람 몇 죽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안 되면 되게 하라’의 정신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은 위험부담 없이 투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가 하라고 하는데 뭘 못하겠습니까? 잘못되면 정부가 다른 무슨 특혜라도 주겠죠. 그래서 손해를 보전하게 되겠죠. 게다가 투자자금 또한 빌린 돈 아닙니까? 망해도 손해날 게 별로 없었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노동부문까지 통제해 주었습니다. 투자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죠. 과감하게 투자를 했고, 이러한 투자는 고용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시 국민소득 증가로 이어졌고요.

 

<그림 2> Il Saking과 Leroy Jones의 책

많은 분들이 이런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찬양해 왔습니다. 언론이 앞서고 학자들이 뒤를 받쳤죠. 해외에 까지 한국 경제의 성공적 스토리가 그렇게 알려졌죠. 이 책 보시죠(그림 2). 오래전에 재무부장관을 지내셨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지요, 사공일 박사께서 메사추세츠 대학의 리로이 존스(Leroy Jones) 교수와 70년대에 쓴 책인데요,

 

‘Government, Business, and Entrepreneurship in Economic Development: The Korean Case’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국 경제발전의 과정과 전략을 다룬 책인데요,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했나를 적고 있습니다. 특히 집행력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Koreans are even better at implementation than planning…” 한국 사람들은 계획 세우는 것보다 집행하는 걸 더 잘한다는 뜻이죠. 

 

그렇습니다. 잘했지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풍자인데,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날 지방순시를 나갔다가 다리를 지나가면서 “이 다리가 왜 여기 있지? 저쪽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했다는 거죠.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저쪽’에 새로 놓여진 다리로 지나갔다는 겁니다. 분석이나 검토도 없이 결정을 해도, 또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결정을 해도 집행력 하나는 ‘끝내 주었다’는 거죠. 다른 일화도 많죠. 정부가 권하는 중공업 분야 투자를 망설이던 재벌 회장이 청와대 호출을 받았다는 거죠. 황급히 들어갔다 왔는데,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는 겁니다. 얼마나 혼이 났던지 돌아온 다음에는 자기 사무실 안에 있는 화장실을 못 찾더랍니다. 웃지 못할 ‘전설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강한 리더십, 그리고 비정상적인 정부와 기업의 관계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갔을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우선 정경유착이 일상화되면서 많은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기업은 회계를 제대로 할 수 없었죠. 당연한 일이죠. 돈이 나갔는데도 기록을 할 수 없으니…. 그 결과 회계 투명성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융기관도 외부투자자도 도대체 돈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또 얼마를 투자해서 얼마를 버는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관치가 약화되는 순간 돈을 제대로 빌릴 수도, 투자를 제대로 유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부가 기업을 죽이고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기업은 경영혁신이나 기술혁신보다는 정부와 정치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더 큰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기업정신이 발휘될 수 있었겠습니까? 돈 빌려 여기저기 투자하면서 재무구조는 악화되고, 문어발식 경영에 중소기업의 성장기반까지 해치게 되었죠.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지속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대통령과 정부가 가진 구심력 때문이었습니다. 정부가 금융과 노동 그리고 기업과 시민사회 모두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통제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시장의 힘은 커지고 있었고, ‘독재타도’를 외치는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목소리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죠. 이런 점에서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체제 아래서의 우리 경제는 일종의 시한폭탄을 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경제를 크게 성장시키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시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때 경제가 성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기업의 자본축적을 돕고 사회간접 자본을 확충하고 수출중심의 전략을 수립한 것 등 중요한 업적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자가 너무 깁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IMF 위기의 뿌리가 그때 이미 자라고 있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합리한 관계와 부동산 문제 등 지금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많은 문제들도 마찬가지고요. 많은 분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박정희 리더십의 이면입니다.


까다로움과 성공을 향한 열정

 

 

 

정말 우리는 특별한 정치지도자 때문에 잘살게 된 걸까요? 여기 미국 살다 오신 분들도 계신데요. 외국에 사시는 우리 교민들 대단하죠. 똑같이 식당의 버스보이로 출발해도 우리 교민들은 10년 뒤면 괜찮은 식당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나라 이민자들은 여전히 버스보이나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여기도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이 있어서입니까? 그래서 교민들이 운영하는 기업에 특혜도 주고, 가게 점원들이 데모하면 경찰을 동원해서 막아주고 했습니까?

 

정치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불만이 많습니다만 되돌아보면 정치도 경제만큼이나 빨리 성장했습니다. 불과 25년 전까지 체육관에서 대통령 뽑던 나라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그 얼마 전에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다시피 했고요. 그런 나라가 그로부터 불과 15년 만인 2002년에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경선을 통해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했습니다. 세계 역사에 유례없는 속도의 발전이죠. 이걸 누가 했죠. 일부 지도자의 영향력이 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국민이 한 겁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말이죠. 국민이 메시아였습니다.

 

 

지도자의 역할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반 국민의 역할이 컸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문화론적인 해석이 되겠습니다만 우리 국민들에게는 두 가지 큰 특성이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는 까다로움입니다. 대단히 까다롭습니다. 웬만해서는 만족을 안 합니다. 우리 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으면 세계 어떤 나라의 사람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화장품이든 전자제품이든, 무슨 서비스든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서 갈 수 있는 겁니다. 까다로움이 바로 혁신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타보십시오. 아시아나나 대한항공 서비스가 제일 낫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소비자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웬만큼 잘해 가지고는 만족 시키지 못하거든요. 까르프와 같은 세계적인 유통회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철수하곤 했죠. 커피집들도 처음에 외국계 프렌차이즈가 극성을 떨지만 곧 국내 프렌차이즈들이 강력한 도전자로 나타납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 정도로는 한국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거죠. 반대로 한국 사람을 만족시키는 수준의 서비스면 다른 어떤 나라의 사람들도 만족시킬 수 있죠. 그래서 유통이건, 서비스건 강한 경쟁력을 가지는 겁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 힘이 강합니다. 성공을 향한 열정이 대단하지요. 아이들이 영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영어를 하게 만듭니다. 스포츠계를 보십시오. 골프는 미국사람들이나 유럽 사람들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 우리 선수들이 LPGA와 PGA를 휩쓸고 있습니다. 스케이트, 수영 등도 마찬가지죠. 이거는 아니다 싶었는데, 어느새 세계정상에 있습니다. 농담입니다만 농구는 안 될 것 같은데요. 한번 두고 보죠.

 

술집이건 밥집이건, 둘러앉으면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느냐? 아니면 또 누가 되어야 하느냐 등의 이야기들이죠. 재미있습니다. 재미있으니 하는 거죠. 그러나 의미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누가 되느냐보다도 우리 국민이 가진 까다로움과 열정이 어떻게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겠느냐가 문제인 거죠. 지도자만 잘 뽑아 놓으면 잘 될 거라는 생각이 우리를 멍들게 합니다.


메시아는 있다 - “깨어 있는 시민”

 

 

국민들이 가진 열정과 까다로움이 좋은 방향으로 제대로 발휘되게 하자면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민사회의 역동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분권과 자율의 철학이 제대로 반영된 정치제도와 행정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겁니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우리의 정치체제와 행정체제는 여전히 ‘협치’보다는 ‘통치’를 위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공정거래와 같은 공적 기능을 국가기관이 독점을 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이죠. 이런 부분들이 대거 바로 잡혀져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모든 이야기를 드릴 수는 없겠죠. 오늘은 우리 사회의 담론 수준을 높이는 문제를 이야기 드리고 강의를 마무리 지었으면 합니다. 메시아가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하자면 다른 무엇보다도 세상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통령의 말씀으로 하자면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대통령께서 왜 정치를 하셨을까요? 직접 한 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세상 좀 바꿔 보려고 하셨다더군요. 권력을 잡아 그 권력으로 세상을 이리저리 요리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나? 아니면 검찰을 동원해서 나쁜 사람들 혼내고, 국회의원들 동원해서 나쁜 제도들 일거에 다 없애는 법도 만들고…. 아닙니다. 대통령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사람들 생각을 바꾸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농담 삼아 그러셨잖아요. “대통령 되고 나니까 좋은 게 하나 있어요.” “뭐가 좋으신데요?” “마이크를 뺏어가는 사람이 없어요.” 토론회다 뭐다 해서 가면 발언시간이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국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대통령 되고 나니까 40분, 50분, 1시간, 2시간 이야기해도 누가 그만 하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농담 같지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말로써, 생각의 전달로써 세상을 바꾸고 싶으셨던 거죠. 검찰과 국정원 동원하고 언론 죽이고 해서 세상 바꾸고 싶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권력으로는 세상 바꾸지 못한다는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거고요.

 

언론 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언론탄압을 얼마나 했는데, 무슨 소리냐?”…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대통령이 일부 언론을 ‘잡으려’ 했다는 시각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러나 되돌아보십시오. 언론이 횡포를 부리거나 대통령과 정부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대해 리액션(reaction), 말하자면 반응을 했지, 대통령이나 정부가 먼저 ‘언론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잡겠다’고 나온 경우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브리핑제도 정착시키려 한 것인데, 이거야 당연히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죠. 선진국이야기 하면서 왜 이런 것은 선진국 따라가면 안 되죠?

 

언론에 대해서는 주로 보도에 대해 반박하거나 코멘트를 했죠. 말하자면 말이나 글로써 어떻게 하고자 하셨던 거죠.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료들을 향해서도 논리로써 설득하려 하셨지 권한과 권력으로 일방적으로 내리누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서로들 ‘깨어 있기’ 위해 노력이죠. 욕을 꽤 먹고 있는 ‘검사와의 대화’ 같은 것도 바로 그런 거였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가는 뒤로 하고 말이죠. 옆에 권력을 두고서…, 말하자면 옆에 총과 칼을 두고서 그것을 손에 잡지 않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화가 날 때도 있고 신경질이 나고 짜증이 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집에서 아이들 키우다 보면 그러지 않습니까. 절대로 때려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옆에 매를 갖다 놓으면, 때로 그 매에 눈길이 가죠. 그런데 그런 경향이 없으셨거든요. 언제나 토론과 설득을 중시하셨죠.

 

같은 맥락에서 늘 ‘깨어 있는 시민’을 강조하셨습니다. 국민이 바뀌고 국민이 바른 생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신 거죠. 국민이 깨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권력도 세상을 바르게 잡을 수가 없고, 국민이 깨어 있으면 그 어떤 권력도 세상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는 거였죠. 그래서 늘 무엇이 옳고, 무엇이 역사의 방향인지를 고민하셨던 거죠. 그리고 그러한 고민 속에서 상생과 평화, 그리고 인권과 관용과 같은 진보적 가치를 존중하게 되신 거고요.

 

대통령에게 있어 정치는 수단이었고 집권은 과정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수단이었고, 어디로 가는 과정이었냐? 국민을 깨어 있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앞서 말한 진보적 가치가 실현되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과정이었죠. 국민이 스스로 메시아가 되어 그러한 가치를 실현해 주기를 원하신 겁니다.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뭘 했지? 그분을 존경한다고 그러면서 우리는 과연 뭘 했지? 그분이 그렇게 강조하던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해 무엇을 했지?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대통령께서는 퇴임 이후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시려 했죠. ‘민주주의 2.0’에 열정을 쏟으셨고 연구원도 만들고 하셨죠. 어떻게든 시민사회의 담론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겁니다. 정치를 하면서 가졌던 목적을 정치가 아닌 다른 방법과 과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거죠. 특히 ‘민주주의 2.0’에는 큰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 프로그램의 세부 내용까지 직접 디자인하셨고, 만나는 사람마다 ‘민주주의 2.0’에 신경을 좀 써 달라는 부탁을 하셨죠.

 

‘민주주의 2.0’이 뭐하던 거냐? 기본적으로 토론 사이트죠.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우리 사회의 의제를 제기하고, 그러한 의제를 놓고 토론하는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께서 만드신 이 ‘민주주의 2.0’은 어디로 갔습니까? 돌아가고 있습니까? 대통령께서 마지막까지 열정을 보이셨던 그것, 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곧 혁명이다’ - 노무현의 정신

 

 

흔히들 ‘친노세력’을 이야기하는데요.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적으로는 꽤 좋은 결과가 있었죠. 많지는 않지만 도지사도 나오고 시장·군수도 나오고요. 정치세력화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니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꽤 갔다고 봐야지요. 그러나 정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대통령의 꿈, 깨어 있는 시민을 향한 꿈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죠?

 

 

많은 분들이 여전히 친노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럴듯해 보이지요.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말이죠. 뭔가 고인의 업적을 잇는 것 같아 보이고요.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인생역정과 우리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의 지도자가 될 분이지, 한 당파나 한 정당의 지도자가 될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분을 자꾸 어떤 당파나 정파의 지도자로 만들려 합니까? 이런 일들에 대해 저는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일부에서는 대통령을 정치상품화하려는 노력까지도 있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지난번 경남 양산 보궐선거 때 일부 정치인들이 대통령의 아들인 노건호 씨를 출마시켜야 한다고 하더군요. 기겁을 했습니다. 심정적으로야 이해가 되죠. 어찌 되었건 이겨야 되겠다는 거죠. 이겨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거죠. 그러나 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는 게 아닙니다. 돌아가신 분을 정치현장의 한가운데 불러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언제 야당이 대통령을 그렇게 위하고 모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죠.

 

좀 뭣한 이야기이지만 혹시 하는 노파심에 미국 있는 건호 씨에게 메일을 보냈죠. 출마 이야기가 나오는데 잘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참으로 기분 좋은 답을 보내왔어요. ‘아버지께서는 이미 국민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셨습니다’라는 취지의 답이었죠. 정말 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들이건 누구건 정치를 하자면 자신의 업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업을 일으키든, 시민운동을 하든, 아니면 또 다른 일로 업적을 쌓든 스스로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두 발로 당당히 서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노무현 대통령과 현실정치가 분리되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지도자로 남게 됩니다. 노무현 초상화를 들고 상주 완장을 차고 하는 정치는 노무현 대통령을 한 집단이나 한 정파의 지도자로 격하시키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소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감정은 그렇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싸워서 이겨라, 그래서 재집권하라’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스스로 깨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정치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회에서 혹은 밖에서 싸워야 할 사안에는 싸워야 하죠. 때로는 멱살을 잡은 일도 중요하고, 숫자를 불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소위 일상정치로서의 daily politics는 그 나름대로 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는 겁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본질을 훼손하지 말자는 겁니다.

 

거듭 강조합니다만 문제의 본질은 어떻게 우리 사회의 담론의 수준을 높일 것인가 입니다. 어떻게 국민 모두가 올바른 의제에 대해 바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스스로 메시아가 되겠는가의 문제입니다.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봉하마을에 내려가 두 장의 사진을 보여 드렸습니다. 먼저 왼쪽 사진인데요, 잘 아시는 촛불집회 사진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죠. 국민이 저렇게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의 정치와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솔직히 이명박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죠. 여당이고 야당이고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의회정치 자체의 한계와 우리 정치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진입니다.

 

<그림 3 > 촛불과 America Speaks

 

그래서 대통령께 이야기 드렸죠. 저 촛불이 어떻게 됐었어야 하느냐? 저 촛불로 나가는 분들이 저렇게 거리로 나갈 게 아니라 같이 모여 토론하고 회의하고, 그 결과가 다시 정치권과 정부에 전해지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보여 드린 사진이 오른쪽 겁니다. 미국의 아메리칸 스픽스(America Speaks) 운동인데 많게는 2만 명 이상이 이렇게 모여 특정 정책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는 겁니다. 소위 담론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공론민주주의라고 하는 건데, 저런 장들이 우리 사회에 계속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씀드린 겁니다. 국민이 스스로 깨어 있게 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말이죠.

 

사실, 저는 스픽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통령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코리아 스픽스(Korea Speaks)가 결성되어 있고 바로 이 건물 옆에 사무실을 두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청계광장에서 ‘반값등록금’ 1,000인 원탁회의도 했습니다(그림 4). IT 기반을 이용한 첨단 회의방식으로 1천 명이 하나의 테이블에 앉아 회의를 한 것처럼 했습니다. 이미 노무현 재단과 몇 개의 지방자치단체의 회의도 주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방안이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림 4>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등록금 1,000인 촛불 원탁회의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임옥상 화백의 그림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봉하에 가면 임옥상 화백의 그림이 있습니다. 봉하기념관에 있죠. 철사로 된 망에 노란 리본을 꽃아 대통령의 얼굴을 만든 작품이죠. 그 노란 리본은 대통령 서거하셨을 때 국민들이 여기저기 달아 놓은 것들이었죠.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애틋한 마음이 잘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또 다른 버전이 있습니다. 2010년 ‘현실과 발언 30주년 기념전’에 전시된 건데 ‘내가 곧 혁명이다’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우선 제목부터 마음에 듭니다. 오늘의 주제 그대로죠. 당신이 혁명을 해 주고 당신이 메시아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곧 혁명의 주체가 되고, 내가 곧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시면 봉하마을에 있는 것과 달리 대통령의 얼굴이 없습니다. 그렇죠? 노무현 대통령 얼굴을 해놓고는 그 위에 까만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얼굴을 지워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흙에다 다시 대추 밤 쌀 이런 곡식을 덮어 놨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이 작품을 보고 제가 쓴 노트입니다.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그림 5 > 임옥상의 ‘내가 곧 혁명이다’

 

노란 리본에 둘러싸인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그러나 그 모습은 죽은 모습이다. 노란 리본과 얼굴 윤곽만이 고인임을 짐작게 해 줄 뿐 정작 얼굴은 그 위에 덮여진 황토로 지워져 있다. 작가는 “노무현을 죽이기로 했고, 결국 죽였다”고 이야기한다. 순간 그의 표정이 무겁다. 그 죽임이 쉽지 않았음이다.

 

너도나도 만장을 들고 상주 완장을 차는 세상. 너도나도 ‘노풍’을 기대하고, 영정을 들고 정치에 나서는 세상. 이것이 옳은가? 이것으로 족한가? 이러한 질문에 작가는 답한다. “노무현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우상에 기대어 살아서도 안 된다.”

 

작가는 우상화되어 가고 정지상품화되어 가는 노무현을 자신의 가슴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심한 말로 ‘죽이기로’ 했다. 그래서 노란 리본으로 만든 얼굴에 검은 페인트를 칠해 ‘죽였다.’ 노무현 정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사회의 주인이 되어 우리 사회를 바로 잡는 것. 우상화와 상품화는 바로 그 노무현 정신을 죽이는 것이기에, 또 그 죽음을 헛되어 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그 근원인 노무현을 스스로 ‘죽였다.’

 

노무현을 ‘죽임으로써’ 노무현 정신과 그 죽음의 의미를 살리고자 하는 작가. 그래서 그는 검은 페인트로 ‘죽인’ 얼굴 위에 소금과 숯을 뿌리고 황토를 입혔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쌀, 보리, 콩, 팥 등의 곡물을 씨 뿌리듯 심었다. 그의 표현대로 “싹이 나기를 빌며…….”

 

싹이 나 자라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상 숭배자나 정치상품의 소비자가 아닌, ‘혁명’의 중심이 되면 큰 변화의 바람이 불리라. 그 속에서 고인의 뜻과 죽음의 의미도 살아나게 되리라. 바람이 불면 꼿꼿이 살아나게 되어 있는 그림 속의 노란리본들처럼.


강의를 맺으며

 

 

학교에서 정책학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정책 공부해서 누구한테 이야기할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죠. “관료가 되면 그때 써먹겠다”고. 아니면 또 이렇게 이야기하죠.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권력 가진 사람들한테 이야기하겠다”고. 그러면 제가 이야기합니다. “틀렸다. 그것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네 옆에, 네 앞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라. 부모님과도 이야기하고 친구하고도 이야기하고, 또 동네 아저씨하고도 이야기하고, 그래서 우리 사회의 담론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주인이 돼가는 거죠. 우리 스스로 메시아가 되어 가는 거고요.

 

 

이 강의의 또 다른 제목을 ‘노무현은 우리의 미래다’라고 했습니다. 노무현의 정신, ‘깨어 있는 시민’이 곧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친노’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거부감이 듭니다. 뭔가 지나치게 일상적 정치 즉 daily politics 중심이고, 또 뭔가 과거 지향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부르는 건 뭐라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상적 정치의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적 정치의 상징에 그쳐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의 인물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정신은 우리의 역사를 품고 있고, 우리 정치와 경제의 미래를 향한 길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정신으로 스스로 깨어 혁명의 중심에 서고, 스스로 깨어 메시아가 되었으면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 추모강연. 6주간에 걸친 여섯 번의 강의를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병준 / 前 참여정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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