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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말에는 딴지를 걸자!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6. 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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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말에는 딴지를 걸자!   

2011.6.3   호호당의 김태규님

 

 

 

초여름 빛이 한창이다. 내리쏟는 강렬한 직사광은 主調音(주조음), 그로 인한 반사광은 變奏(변주)가 되어 세상은 온통 壯麗(장려)한, 웅장하고 화려한 빛의 하모니로 가득하다. 백열의 태양이 지휘하는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래 전부터 품어온 환타지가 하나 있었다.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짙은 물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씩 하고 쪼개며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생각.

 

서른 중반의 시절에 시작된 꿈이었는데, 당시 직장 다니던 처지라 불가능했고, 또 당시 어린 아들에게 물어보니 ‘아빠 곁에서 함께 걸어가지 않겠다’는 단호하고도 보수적인 의견을 듣고 나서 그만 접어두었던 터.

 

하지만 환타지는 죽지도 결코 시들지도 않고 은밀히 곰팡이 胞子(포자)처럼 내 마음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나는 일본의 明匠(명장)이 만든 핸드 메이드 안경테를 하나 선물 받았다. 작은 동그라미가 두 개 이어진 테, 존 레논이나 주윤발이 썼던 모양의 테였다.

 

정초 무렵 생각해보았다. 내 나이 쉰 하고도 일곱이 되는데, 더 늦기 전에 환타지를 약간 변형된 형태로라도 구현해보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陰謀(음모)였다.

 

며칠 전 화요일, 기온 상승과 함께 희부연 수증기가 확연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나는 서랍 속에 모셔져 있던 안경테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두 번째 만난 안경점에서 내가 원하는 짙은 물색의 렌즈를 발견했다. 안경방 주인은 ‘이건 너무 진하지요?’ 했고, 나는 ‘아니오,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 이거요’ 했다.

 

20 분 뒤 나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거리에 나섰다. 내 눈빛은 짙은 렌즈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니 상당히 안심이 되었다. 내친 김에 유니클로 매장에 가서 짙은 남색 셔츠를 사서 작업실로 돌아왔다.

 

짙은 물색 선글라스, 짙은 남색 셔츠, 그리고 푸른 청바지, 청색으로 코디를 한 것이다. 컨셉은 ‘엑스 블루, X Blue’ 였다.

 

야, 이제 머리만 빨강으로 염색하면 완성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섣불리 시도할 일은 아니다, 이 정도면 내 환타지의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일단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알고 있다, 환타지를 완성하지는 못할 것임을, 다시 말해 빨강머리로 염색하는 일은 차마 그렇다. 이게 나의 한계인 것이다. 동시에 외국에 나가면 한다는 그런 얍삽 비겁한 생각도 없으니 나의 강직(?)함이다.

 

내가 비록 청년남성들의 잡지인 맥심(Maxim)을 아들을 시켜 구매토록 한 뒤 자기 전에 정말 재미나게 읽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청년남성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맥심, 건강한 수컷의 욕망과 일탈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한 정말 훌륭한 잡지이다!)

 

짙은 물색 선글라스를 끼고 며칠 살아보니 온 세상이 파랗다. 다른 세상, 아주 멋진 블루의 세상이다.

 

그런데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달라 보일 정도로 좋건만, 왜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라고 하지?

 

선글라스가 바로 색안경인데,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색안경을 끼면 세상을 왜곡시킨다 그거지, 참 원. 이거 뭐 우리말 卑下(비하)도 아니고 뭐람?

 

‘색안경을 끼고 보면 사물을 왜곡한다’는 이 제법 흔히 쓰는 말 속에는 타락한 언어가 주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 처음 참신한 말 표현을 하면 사람들은 금방 따라한다. 그 결과 그 표현은 금세 진부해지고 타락하고 오염이 된다. 말이란 그런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틀린 말이 아니지만 직시하다보면 눈만 아파질 수 있음이다, 좀 깜박거리거나 에둘러 보면 안 되는가?

 

물론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 자주 사용하고 또 듣다보면 진부해져서 방금처럼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나는 말과 그 표현에 부단히 ‘딴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 민주주의, 기득권, 소통, 융합, 통섭, 어쩌면 이런 어휘들이야말로 지난 10 년간 우리 사회를 타락시키고 오염시켜온 말들이다. 단어 자체에 무슨 죄가 있으랴 만은 그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변태스런 말까지 들었으니, 이는 마치 ‘더 많은 국민소득이 필요하다’는 말과 하등 다름이 없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이 진보라면 그 진보 틀렸다, 더 많은 국민소득을 원한다면 그 보수 틀렸다. 모두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제 量(양)에서 質(질)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양에 집착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GDP가 이미 정답이 아님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달리 갈 길을 모르는 까닭에 기존의 것만 고수해왔다.

 

그러다가 좀 상황이 팍팍해지자 급기야는 ‘복지’라는 또 하나의 타락한 美名(미명) 아래 미래 세대의 소득을 미리 앞당겨 몽땅 털어먹자고 나서는 몰염치한 오늘의 기성세대이다.

 

이거 글이 왜 이러지? 돌아오자. 뭐 색안경 하나 썼다고, 갑자기 사이비 사회비평가로 돌변해서는 안 될 일이니.

 

다만 한 가지만 얘기하자.

 

사랑해, 이 말이 너무나도 흔하게 사용되다 보니, 전화 벨이 울려서 받으면 갑자기 ‘고객님 사랑합니다’ 하는 컴퓨터 음성이 들려오는 세상이다.

 

그러니 당신은 정작 진짜로 사랑하고 戀慕(연모)하고 愛慕(애모)하는 사람 앞에서 당신은 이 진부해빠진 표현을 여전히 쓰고 싶은가? 써야 하는가?

 

차라리 당신의 간절한 심정을 담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저 그윽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든지 아니면 어렵더라도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 단계로서 기존의 말과 표현에 부단히 딴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글라스, 아니 색안경을 쓰고 걷는 거리는 시원하고 아름답다, 여름내 색안경을 끼고 돌아다닐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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