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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며 ★★★★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3. 1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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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며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11-03-04)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하기로는 여러분 중에서 내가 아마 꼴찌 근처일 것이다. 정치는 몰라도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분이 많은데 나는 반대다. ‘바보 노무현’이라고들 그러는데 나는 바보 안 좋아한다. 하긴 내가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한다. 사람 없는 데서 한 10년 살기도 했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같은 양반이 한국 바닥에 존재하여 있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했다. 그게 신기한 거다. 이 척박한 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책 없이 순수한 존재가 일으킬 평지풍파에 대한 기대. 노무현의 존재는 언제나 내게 야릇한 설레임을 가져다주었다. 그 설레임이 좋았다.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 날 것만 같은 느낌 말이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영화에서 듣는 휘파람 소리 같은~.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 나는 노무현의 눈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소를 보았다.

 

청문회에서 처음 봤을 때… ‘아 이거 대박인데… 노다지야.’ 하는 기분. 그야말로 횡재한 거다. 길가다가 금덩이를 주운 거. 말하자면 엄청나게 재미있는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읽은 기분 같은 거.

 

박상륭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첫 페이지 읽고 홀려서 끝까지 다 읽느라고 혼났지. 첫 페이지에 홀려서 끝 페이지까지 안 갈 수 없는 기분. 힘들어서 중간에 씨바씨바 하면서도 페이지는 계속 넘겨. 졸라. 그런 거.

 

“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乞士라거나 돌팔이 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 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 요기에 홀려버리는 거다. 계속 간다.

 

노무현 대통령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고 지지하지 않고를 떠나서, 그 사람이 잘났고 못났고를 떠나서, 그 분의 인격이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고를 떠나서, 이 지점에서 역사의 어떤 드라마틱한 맥박을, 역사의 숨결을 느꼈으면 좋겠다. 내가 느낀 기분을 여러분도 느꼈으면 좋겠다.

 

내가 들은 휘파람소리를 여러분도 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발견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빛을 여러분도 발견했으면 좋겠다. 내가 박상륭 소설 첫 페이지를 읽고 뿅 갔던 기분을 여러분도 함께했으면 좋겠다.

 

뿅 가는 첫 문장들은 소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도 있고, 역사에도 있다. 위대한 만남이 있다. 그 순간의 떨림이 있다. 나는 그 처절한 첫 페이지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멈출 수가 없다.

 

이미 홀려버렸고 그렇다면 계속 가는 거다. 여러분도 그 살 떨리는 긴장 안으로 들어와 주었으면 좋겠다. 그 역사의 지점들을 포착하는 민감한 센서를 여러분도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반응했으면 좋겠다. 감지했으면 좋겠다. 나는 희망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유시민도 마찬가지다. 백범일지라면 그대로 한 편의 멋진 장편소설이다. 그런 거 있다. 말젖 짜던 볼추가 짜던 말젖 챙기지도 않고 그대로 둔 채, 말 도둑 추적하던 15살 소년 용사 테무진을 처음 만나 행장도 꾸리지 않고 바로 따라나서듯이, 뒤도 안 보고 가는 그런 거 있다. 바로 그런 장면에서 세르지오 레오네의 휘파람 소리가 나와주어야 한다. 엉덩이 들썩거리고 가는 거다.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실려 있는 운명의 드라마에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범, 장준하, 김대중, 노무현, 그분들에게는 적어도 이야기가 있고 드라마가 있다. 뭘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딱 봐도 주인공 캐릭터다.

 

실수를 해도 주인공의 실수요 잘못을 저질러도 주인공의 잘못이다. 오버를 해도 주인공의 오버요 패배를 해도 주인공의 와신상담 절치부심이다. 사건은 계속 가는 것이며 잘하고 잘못하고 모든 잡다한 에피소드들은 그 전체의 과정에서 용해되고 만다. 그 전체의 웅대한 기승전결 드라마를 보고 계속 가는 거다.

 

영화라면 그렇잖은가? 잘못해도 주인공이니까 밉지 않다. 패배해도 주인공이니까 다시 살아날 거다. 에너지가 그 안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상영시간은 90분, 입장료 7천 원을 받아챙겼으니 중간에 주인공을 죽이지는 못하리.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고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다. 유시민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잘났고 못났고를 떠나서, 우연처럼 보여지는 여러 사건들이 겹쳐서 어떤 운명에 의해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있다.

 

역사의 순간에 역사의 현장을 지키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런 역사의 에너지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를 원한다. 내가 반응하고 설레었듯이 여러분도 그렇기를 원한다. 그 설레임 안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거다. 짜짜자잔 짜자아아안~ 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3전 4기 끝에 인제 보궐선거에 당선되자마자 5·16쿠데타가 터져서 의원선서도 못해보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명패 던지고 정치 안 하겠다고 도망가서 이인제가 찾으러 다녔다. 유시민은 평론가로 방송에서 잘 나가다가 후단협 때문에 ‘노무현 살리자’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그 분들을 놓아주지 않았다는 거.

 

우리가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순간의 드라마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의 기승전결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 역사의 울부짖음이 내 귀에 들려야 한다. 그럴 때 사로잡히고 만다. 발을 떼지도 못한다. 그 분들은 그렇게 꼼짝없이 끌려들어 간 것이다. 왜냐하면 반응했으니까. 역사의 맥박을 느꼈으니까.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원형이정, 정반합, 생로병사, 고집멸도, 도가도 비상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우리는 그 모형들의 운행법칙 안에 들어와 있다. 그것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 거룩한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바야흐로 사건은 시작되었다. 사건은 자체 에너지를 가지고, 자체동력을 가지고 사건의 완결을 향해 치닫는다. 쏜 화살은 중도에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간다. 원인이 있으면 당연히 결과가 따르고, 시작이 있으면 당연히 끝이 있고, 살인이 있으면 마땅히 복수가 있다. 심판이 있다. 그 역동하는 에너지 흐름에 반응하는 것이다.

 

좋은 연주에 관객이 반응하듯이, 폭풍 같은 연주에 관객도 덩달아 흥이 오르듯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응이야말로 그대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힘차게 다음 페이지를 넘겨도 좋다. 반응하지 못한다면 이미 시체다. 반응하지 못한다면 몸이 살았어도 영혼은 죽은 거다.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악기, 찢어진 북, 끊어진 현, 깨어진 종, 시들어 죽은 영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반응은 구조의 대칭성에서 비롯된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칭성의 논리틀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하면서 반공을 들고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자동으로 세팅되었다. 이미 인과법칙이 작동한 것이다.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도가도 비상도가 움직인 것이다. 원형이정이 전개한 것이며, 기승전결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을 볼 때까지 계속 가는 것이다. 그것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 대칭구조의 작동을.

 

시작에서 끝을 보는 것이 반응하는 것이다. 나는 묻는다. 여러분은 반응하는가? 여러분은 시작에서 끝을 보아내는가? 여러분은 원인에서 결과를 포착하는가? 발단에서 결말을 예상하는가? 역사는 기승전결의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봄이 시작될 때 겨울은 이미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 원형이정이다. 후단협이 처음 작동했을 때 유시민은 맞대응하여 일어섰고 바로 그 발단의 지점에서 오늘의 전개와 내일의 위기는 세팅되어 있었다.

 

맹자는 ‘만약 우물에 사람이 빠져 있다면 누가 그것을 보고도 구해주지 않고 지나치겠느냐’고 설파했지만 필자가 주장하는 완전성은 맹자의 그것과 다르다. 우물에 빠진 사람이 불쌍해서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기승전결 구조, 인과의 고리 안에 링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구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칭성 원리에 따라 맞대응하는 것이다.

 

이미 원인이 작동했기 때문에, 그 구조 안에 에너지가 걸려 있기 때문에 결과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칭성의 작동을 봐야 한다. 새끼를 지키는 어미 고니는 암수 중에서 한 마리가 앞으로 가면 다른 한 마리는 뒤로 간다. 하나가 앞으로 갈 때 다른 쪽의 뒤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 장면에서 그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밥을 왜 먹는지, 내가 일을 왜 하는지도, 내가 숨을 왜 쉬는지, 내가 삶을 왜 사는지도 한꺼번에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팅되어 있다. 인과관계의 연쇄고리로 이어져 있다. 그중의 하나가 부정되면 나머지 전부도 한꺼번에 몰아서 부정된다.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다음 장면의 복선으로 되는 것과 같다. 의미 없는 장면은 없어야 한다. 빼도 되는 장면은 빼야 한다. 모두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장면은 다음 장면과 그다음 장면을 물고 들어오는 연쇄고리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 고리들의 물림은 긴밀할수록 좋다. 그래야 긴장된다. 관객이 몰입한다. 삶은 치열해진다. 허무는 극복된다. ‘왜 사는가?’ 하는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된다. 그 삶에서 빼도 되는 장면은 하나도 없게 된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내가 길을 가는데 하필 내 앞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 나타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야 한다. 신의 대본에 각본이 나와있다면 어쩔 수 없다. 우물에 빠진 사람이 불쌍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통째로 부정할 수 없으므로 구하는 거다.

 

불쌍하지 않아도 구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외면하면 내 인생이 통째로 외면되기 때문이다. 그 선선한 새벽에 볼추가 짜던 말젖 팽개치고 테무진을 따라나서듯이. 설레임 때문에. 휘파람소리 때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차가운 미소 때문에.

 

극 중의 주인공이 목숨을 거는 것은 관객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없다면 로미오도 줄리엣도 시큰둥하다. 관객이 없다면 춘향도 몽룡도 시큰둥하다. 다 관객 때문이다. 삶의 일관성이라는 드라마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모든 장면들이 내 관객이다. 어제의 나와, 그저께의 나와, 내일의 나와, 모레의 나가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삑사리가 나면 내 인생의 오케스트라는 전부 깨지고 만다. 한꺼번에 와해되고 만다. 인생은 바닥부터 붕괴되고 만다.

 

내가 내 인생을 통째로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의 무수한 나날들 전체가 객석에서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만 발길을 멈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일만 명의 관객이 한꺼번에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라운드에 앉아있는 부엉이를 걷어찬 콜롬비아의 어떤 축구선수는 정신 못 차린 거고.

 

정신 차려야 한다. 내 인생 전체가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삑사리가 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고 만다. 삶의 드라마는 실패로 되고 만다. 민감한 센서를 가진 사람이라면, 반응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설레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삶의 일관성이라는 일만 명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순간에 정신을 차릴 것이다.

 

오늘 술을 먹고 취하여 대책 없이 뻗어버릴까 아니면 내일을 위해서 여기서 멈출까? 근데 오늘이가 왜 내일이를 위해서 양보해야 하는 거지? 오늘이는 나고 내일이는 남인데, 왜 내가 남을 위해 양보를 하느냐고?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삶의 일관성 문제다.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고 외면하는 사람이,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여 참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이 내가 아닌 타인으로 여겨진다면, 내일의 나도 내가 아닌 남인 거다.

 

내일 감옥에 붙들려 가든 말든 그건 내일이 알아서 책임질 일이고, 오늘 나는 신나게 범죄를 저지르는 거다. 그렇지 않나? 모든 범죄자는 바로 그런 이유로 범죄자가 된 것이다.

 

내일이 오늘의 연장선 상에 있듯이, 남은 나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것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는 논리에 의해 붙어 있다. 인과법칙에 의해, 기승전결에 의해, 원형이정에 의해 다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그 덩어리에서 나를 따로 분리해낼 수 없다. 왜? 설레임 때문에. 휘파람소리 때문에.

 

그 덩어리에서 나를 분리해낼 때, 타인을 분별해낼 때, 설레임은 잃는다. 장중한 오케스트라의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졸다가 영화의 줄거리를 잊어버리고 극에 몰입하지 못함과 같다.

 

나는 묻는다. 극장에서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영화를 보는 사람이, 드라마에 홀려서 보는 사람이, 본방을 사수하겠다는 양반이, 하물며 역사에서 모든 장면을 놓치고, 인생의 모든 설레임을 놓치고, 삶의 모든 치열함을 잃어버리고, 기승전결의 흐름이 끊겨버린 채, 모든 반응을 못하고 왜 사느냐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왜 사는가? 삶의 발동이 걸렸기 때문에,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인과의 체인이 앞에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폭풍 같은 연주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 흐름에 이미 올라탔기 때문에, 내 마음이 그 에너지와 소통하고 공명하기 때문에, 그 설레임 때문에, 그 휘파람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하루를 사는 것이다. 날아가던 화살 계속 날아가느라고.

 

왜 구하는가? 마찬가지다. 이미 발동이 걸렸기 때문에,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대본에 다 나와 있기 때문에, PD가 지시하기 때문에, 감독이 큐 사인을 내렸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신의 시선을 느껴야 한다.

 

불쌍한 느낌이 들지 않더라도 구해야 한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구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는 사실을 그대가 알고 있기 때문에 구해야 한다. 측은지심은 내 안의 완전성에 반응하는 본능이다.

 

내 안의 보석같이 빛나는 완전성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보호하는 심리다. 거기서 이심전심이 나온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소통한다. 마음 안에 완전성의 모형이 갖추어져 있고 그 모형에 안테나가 있어서 반응한다. 객석의 관객이 무대 위의 연주에 반응하듯이 곧바로 반응한다.

 

안테나가 전파에 반응하듯이 마음은 반응한다. 마음 안에 완전성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반응한다. 역사의 송신을 수신한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고 여러분께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전혀 반응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름없다. 그 영혼이 이미 죽은 것이다.

 

음식에 맛을 느끼지 못하고, 그림에 미를 느끼지 못하고, 음악에 흥을 느끼지 못하고, 꽃에서 향을 느끼지 못하고, 새벽 공기에 설레임을 느끼지 못하고, 드라마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인간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역사의 부름 소리를 들어내지 못한다면, 삶의 긴밀함을 잃었다면 이미 죽은 것이다. 오래전에 죽은 것이다.

 

반응하는 것이 존엄이다. 모든 반응하는 것은 인과의 고리로 얽혀서, 기승전결로 얽히고, 원형이정으로 얽혀서 하나가 된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어제와 오늘이 하나가 되고, 오늘과 내일이 하나가 되고, 세상 모두가 연결되어 하나로 된다. 전부 한 덩어리가 된다. 바로 반응한다.

 

우물의 사람을 구함으로써 인류는 진화해왔다. 그 진화의 흐름에 올라탐으로써, 그렇게 반응함으로써 인류는 존엄해진다. 구하지 않는다면 그 흐름에서 내려버린 것이며, 인류의 진화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인류는 애초에 진화하지 못하므로 나의 존재조차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찔한 자기부정이다. 그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다.

 

설레임을 부정하고, 부름 소리를 부정하고, 반응하기를 기피하고, 손길 내밀기를 거부할 때 나의 일관성은, 삶의 긴밀함은, 오늘과 내일을 이어주는 고리는, 무료한 일상을 극적인 클라이맥스의 한 장면으로 승화시키는 에너지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며,

 

종은 깨져서 그만 소리를 잃고, 북은 찢어져서 울림을 읽고, 피리의 리드는 찢어져서 못쓰게 되고 만다. 소통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존엄을 잃고 비참해진다. 설레임 없는 삶이 비참이다. 휘파람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는 삶이 비참이다.

 

사건으로 보라. 인과관계로 보라. 기승전결로 보라. 원형이정으로 보라. 우리가 서로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마음으로 이어져서 하나가 되듯이,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도 서로 엮여 있다. 그들은 모두 한 패거리이며 인류의 하나 됨을 깨는, 인류의 집단인격을 깨는, 인류의 진보를 깨는 인류의 적이다.

 

히틀러는 나쁘지만 박정희는 괜찮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히틀러와 박정희는 역사의 인과법칙에 의해 이미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전쟁을 일으키기 전의 히틀러는 괜찮았다고 말하는 식과 같다. 살인하기 전까지는 살인마도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살인하기 전에 살의가 예비되어 있는 것이며, 나쁜 짓을 하기 전에 역사의 추동력에 의해 전부 엮여 있다.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니카라과의 소모사, 북한의 김일성, 우간다의 아민, 가봉의 봉고, 이라크의 후세인, 칠레의 피노체트, 아이티의 뒤발리에, 대만의 장개석,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필리핀의 마르코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이들은 모두 히틀러와 스탈린의 가족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와 김영삼과 이명박에 박근혜, 조중동까지 모두 박정희에 포함되어 있고, 이등박문과 히로히또에 속해 있다. 그것이 역사의 인과다.

 

그들을 퇴치해야 하는 임무가 바로 당신이 지금 살아있는 이유다. 설레임의 이유다. 삶의 긴밀함과 치열함의 이유다. 우리가 하나인 이유다. 그쪽이 엮여서 한 덩어리이므로 이쪽도 하나 되어 한 덩어리로 맞대응인 것이다. 백범과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이 하나의 기승전결 고리 안에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잘했는데 김영삼이 말아먹고 이명박이 뻘짓한다는 식은 성립될 수 없다. 박정희 똥구녕에서 김일성, 김정일, 이명박,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카다피, 후세인이 줄줄이 사탕으로 나왔다. 이들 모두는 히틀러 똥구녕에서 나왔고 히틀러 역시 히로히또 똥구녕에서 나왔다. 그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이듯 그들도 하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보아낼 수 있느냐다. 그것을 보아낼 수 있는 민감한 센서를 갖추었느냐다. 안테나를 세웠느냐다. 긴장하고 설레느냐다. 긴밀하고 치열하냐다. 덩어리를 파악하려면 옳고 그름의 단순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선형사고를 극복하고 입체의 모형으로 비약해야 한다. 입체를 넘어 진화형 생장구조를 내장해야 한다. 근원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부디 옳다/그르다에 집착하는 단세포에서 벗어나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인과로 보고, 원형이정으로 보고, 기승전결로 보아야 한다. 옳고 그름 따위는 그 드라마 안에서 에피소드를 이룰 뿐이다. 그 과정에서 역설이 작용하여 전부 용해되고 만다. 시작점과 끝단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사건의 엔진이 되는 기승전결의 기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고 역설과, 역효과와, 상대성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기준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창의하는 사람이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고, 외부에서 소스를 들여오는 사람이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설계하여 주도적으로 판을 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게임의 룰을 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여 득점을 올리는 것보다 게임의 판을 여는 감독이 되고, 프로듀서가 되고,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 잘하는 사람보다 동료가 잘하도록 밸런스를 잡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 웃기는 일만큼 잘 웃기도록 옆에서 받쳐주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노무현이 옳고 유시민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다. 사건의 기승전결 고리 안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부디 이르노니 자를 들이대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저울을 들이대어 사건의 경중을 판단하라. 기승전결의 기에 서는 것이 무겁고 결에 서는 것은 가볍다. 씨앗을 심는 일은 무겁고, 추수를 하는 일을 가볍다. 원인 쪽에 서는 것이 무겁고 결과 쪽에 서는 것이 가볍다.

 

청나라는 개화하다가 망했고 일본은 쇄국하다가 흥했다. 그걸 지켜본 대원군이 ‘앗싸! 정답은 쇄국이다. 일본을 봐!’ 하고 따라 하다가 망했다. 개화한 인도 망했고, 개화한 필리핀 망했고, 개화한 터키 망했고, 개화한 에티오피아 망했다. 개화를 하는 족족 다 망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이른바 지사였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니 쇄국을 해야 한다. 청나라를 보라. 서양인과 통상하다가 아편전쟁으로 개박살이 나지 않았는가? 료마는 개화를 하려는 막부를 타도하기 위하여 조선의 유교를 이용했다. 유교의 논리로 임금을 높이고 막부를 끌어내렸다.

 

그런데 막부와 전쟁을 하려 하니 총이 필요하고 서양인에게 총을 사들이다 보니 내가 먼저 사들인 총을 남은 사들이지 못하게 막아야겠고 그러려면 서양인과 뒤로 손을 잡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이미 개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원군과 료마는 똑같은 논리로 출발했는데 왜 하나는 성공하고 하나는 실패했을까? 왜 정반대의 결과가 되었을까? 대원군은 섭정왕이고 료마는 거지였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이미 성공하여 출세한 인물이다. 기승전결의 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료마는 봉건영주의 도망친 종으로 주인에게 붙들려갈 뻔 하다가 겨우 살아났다. 료마가 제자를 모아놓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주인이 나타나서 “이놈 자슥. 니가 여기서 이러면 소는 누가 키우나? 소는?” 하며 목덜미를 틀어쥐고 잡아가려 했다. 그때 유력인물이 ‘료마는 내 종이 된 지 오래인데 무슨 소리냐?’ 하고 막아서 구해주었다. 더 센 주인을 만나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은 평범한 백성에서 출발했으나 이승만은 왕실과 가까운 귀족에서 출발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할 때 명함에다 조선의 왕자라고 써넣고 다니다가 안창호에게 트집을 잡혀 탄핵되었을 정도다.

 

김대중은 상고 출신으로 시작했으나 김영삼은 일찌감치 거제도 멸치왕으로 출발했다. 민주당은 89석이나 유시민은 0석이다.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끝까지 가느냐가 결정된다. 이것이 사건의 경중이며 경중이 옳다/그르다에 우선하는 상위 단계의 논리다.

 

옳다/그르다는 이미 판단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고 이미 사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거고, 이미 편을 갈라놓은 거고 외부로 난 창을 닫아건 것이다. 밖으로 창을 열면 기준은 흔들려버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게 된다. 원래 쇄국이 선이었는데 하다 보니 개화가 선이 되어 버렸다. 이전에 개화한 나라는 모두 망했는데 일본이 개화하자 성공했다. 일본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기승전결의 기에 섰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 터키, 필리핀, 인도, 중국은 서구문명이 아시아로 들어오는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에서 결에 섰기 때문에 모두 망했고, 일본은 아시아 문명이 새로 일어나는 사건의 기에 섰기 때문에 흥했다.

 

지난 단계의 종결에 서면 망하고 새로운 단계의 기에 서면 흥한다. 이명박은 박정희 개발독재 끝물에 서 있고, 김대중 노무현은 인터넷 신문명 발단부에 서 있다. 그 차이다. 계속 가느냐 마느냐.

 

구조론은 저울 안에 됫박이, 됫박 안에 콤파스가, 콤파스 안에 자가, 자 안에 눈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저울은 계량이 무겁고, 됫박은 부피가 크고, 콤파스는 지평이 넓으며, 자는 바르고, 눈금은 정확하다. 옳다/그르다의 논리는 자를 대어 눈금을 잃는 것이다. 이 단계는 이미 사건의 종결 단계다.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수확한 제품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무거워야 한다. 왜 무거운가? 뒤에 줄줄이 사탕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기승전결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저울에서 되가, 되에서 콤파스가, 콤파스에서 자가, 자에서 눈금이 차례로 펼쳐진다.

 

나는 그대가 설레임으로 반응하기를 원한다. 저울에 서야 반응한다. 그래야 전부 하나로 연결된다. 사건의 발단에 위치해야 한다. 남이 서 있는 줄 뒤에 가서 서봤자다. 봄의 씨앗 포지션에 서 있으면 가을의 수확기까지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가을의 수확 포지션에 서 있으면 장에 내다 팔고 끝난다. 배당은 없다.

 

김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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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4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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