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일 낼 것인가?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10-02-16)
표면적으로는 성적이 좋아도.. 뭔가 암운이 드리워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겉보기가 엉성해도 뭔가 믿음이 가는 경우가 있다. 이건 직관이다. 직관 이야기하면 다들 비웃는다.
‘직관 좋아하네! 전문지식 가지고 토론해보자’며 반격할 사람 많다. 요즘은 네티즌들이 다 전문가 수준이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아마추어가 전문가를 이기는 것이 또한 구조론의 세계 아닌가.
토론은 토론, 실전은 실전. 다르다. 현장 들어가면 게시판에서 떠드는 화려한 전문지식 아무 소용없다. 그렇다. 게시판에 넘치는 네티즌 전문가들, 그 화려하고 치밀한 분석. 그거 다 허당이다.
구조를 알면 보인다. 뭐가 보이나? 포지션이 보인다. 포지션이 어떻다는 건가? 공격 때는 한 명의 뛰어난 병사 덕분에 적진을 돌파하고, 수비 때는 한 명의 얼간이 때문에 전멸하게 된다.
자칭 전문가들이 인용하기 좋아하는 ‘수치상으로 나타나는 객관적 전력’은 장기전에서나 먹히는 거지 단기전에는 전혀 의미없다. 단기전의 특성은 강점이든 약점이든 극대화 된다는 것이다.
쇠사슬은 강하지만 약한고리에서 끊어진다. 약한 고리 하나가 전체의 수준을 결정한다. 11개의 사슬 중에 딱 하나만 맛이 가면 전부 무너진다. 다른 건 객관적 수치가 어떻다 해도 의미없다.
딱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고수다. 온갖 자료 들이대면 하수다. 화살은 오직 탄두 하나가 단단해서 과녁을 충분히 관통한다. 뒤는 물렁해도 앞만 강하면 된다. 이걸 알아야 한다.
이러한 포지션 구조의 특성이 직관을 낳고 느낌을 낳는다. 이거 알면 답이 보인다. 이길 때는 한 사람 덕에, 질 때도 한 사람 때문에. 이는 단기전에만, 큰 시합에서만 나타나는 특성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참고하자. 멍청한 지휘관 한 명이 부대를 전멸시킬 때도 있고, 반대로 유능한 지휘관 한 명이 상승을 이끌기도 한다. 언제나 하나가 전체를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공격이냐 수비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공격할 때는 무능한 병사 한 명쯤 있어도 괜찮다. 멍청이가 지휘관만 아니면 된다. ‘웹스터’처럼 사격술 꽝이 있어도 이지중대는 강하다.
수비할 때는 반대다. 한 명이 뚫리면 전멸이다. 유능한 지휘관은 이 점을 활용한다. 수비는 믿음직한 노장을, 공격은 겁 없은 신인을 앞세운다. 돌발상황에선 경험많은 베테랑이 뒤를 받친다.
전술의 변화에서는 축구지능이 높은 즉 판단력있는 중원 지휘관을 투입한다. 요는 이러한 조합이 갖추어져 있느냐다. 이게 잘못되면 망가진다. 그래서 팀을 만드는 과정이 중요한 거다.
문제는 네티즌들이 불안해 한다는 점이다. 시합이 끝나자 일본에서는 ‘오카다 짤리게 됐다’는 환호성 터지고, 한국에선 ‘허정무 생명연장 했다’는 통곡이 쏟아진다. 이쯤되면 신경증이다.
그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아무거나 뭐라도 하려고 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감독 짜르기 신공’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심리적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뭔가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
필자는 허정무호의 진로에 대해 기대하는 편이다. 이는 허정무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다. 되어가는 집안의 특징이 있다. 팀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구색이 맞춰지고 있는 거다.
그게 보인다. 이번 시합에서 멍청한 수비의 뻘짓과 겁 없은 신인의 공격이 두루 선보였다. 중요한 건 역동성이다. 불안요소는 확실히 있다. 그런데 불안요소를 감추는데 능한 감독이 있다.
그런 감독이 최악이다. 불안요소든, 긍정적 요소든 최대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겉보기 포장술로 역동성을 없애는 지휘관이 있다. 일본식 짧은 패스는 최악이다.
그딴 짓은 스타일이 비슷할 때만 먹힌다. 말하자면 갑옷을 입은 격이다. 병사가 갑옷을 입으면 어떻게 될까? 구멍이 감춰진다. 약한고리가 은폐되는 것이다. 그 경우 네티즌은 안도한다.
약한 고리는 평소에 갑옷 덕에 숨겨져 있다가 본선에서 노출된다. 갑옷이 원래 그렇다. 한번 뚫리기 시작하면 전멸이다. 뚫리는 갑옷은 없느니 못하다. 다행히 한국팀은 갑옷을 버렸다.
약점도 장점도 쉽게 노출된다. 포지션 구조가 훤히 드러난다. 문제는 이렇게 구조가 드러날수록 네티즌은 말이 많아진다는 점. 노무현처럼 공개하면 말 많고 이명박처럼 은폐하면 침묵.
네티즌은 전쟁의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수준에서 이해 가능한 답을 원한다. 그게 일본식 갑옷. 일본은 짧은 패스로 조직력을 극대화 하는 갑옷을 입었다.
그런 갑옷을 네티즌은 마음 든든하게 여기는 거다. 그거 따라가면 죽음이다. 그런데 최악의 장수는 항상 그 방법을 쓴다. 그 갑옷 중의 하나는 최고의 골게터 1인에게 의존하는 전술이다.
하위팀 상대로 골 잘 넣는다. 근데 꼭 중요한 시합에서 그 한 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수비에 막혀서 진다. 그런 식이다. 갑옷 벗어 던져야 의외의 플러스 알파가 세팅된다. 포지션이 답이다.
필자는 네티즌이 다 알 정도로 고지식한 방법, 전형적인 방법, 뻔한 전술 쓰는 지휘관을 경멸한다. 네티즌들은 불안해 하면서 자기 수준에서 납득할 수 있는 교범적인 전술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게시판에서 논쟁이 붙으면 그런 교범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이긴다. 그러나 현장의 역동성은 그런 분석을 무색하게 한다. 항상 그래왔듯이. 어떤 게시판을 봐도 허정무 까는 글로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가 운장이라고 여긴다. 운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 간단하다. 포지션 조합을 잘 만들어 놓으면 의외의 변수가 항상 유리하게 나타난다. 악재도 현장에서 호재로 변한다.
구조론의 방향성 개념이다. 이쪽 저쪽에서 상반되게 작용하는 에너지가 현장에서는 한 방향으로 유출된다. 반대로 포지션이 겹치면 최고 수준의 선수들만 모아놓아도 의외로 경기가 꼬인다.
다시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돌아가서.. 한두 명의 뛰어난 인물이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것이 구조론이다. 구조적인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축구지능과 체력이 중요하다.
이지중대도 머저리 소벨이 지독하게 체력훈련을 시키는 바람에 병사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거기에 윈터스 중위의 임기응변 지휘능력이 팀을 살렸다. 리더는 순간 순간 무수히 판단해야 한다.
최악의 지휘관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다이크 같은 인물이다. 문제는 최악들이 현장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기 위하여, 미리 팀의 구조를 결정을 안해도 되는 형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문제는 네티즌의 신경증이 ‘결정을 안해도 되는 팀 구조’를 희망한다는 점이다. 현장에서 순간순간 결정한다는 것은 스트레스니까. 뻔한 시합, 뻔한 승부야 말로 편안하게 볼수 있는 시합이니까.
전투는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무수히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충분히 연습하고 연습한데로, FM대로, 원칙대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의 직관에 따라 플러스 알파를 보태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교범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게시판에 글 좀 쓴다는 네티즌이야말로 나름대로 전문가이며, 그들은 설득력있는 논거를 제시하고는 그 글빨로 결론을 끌고간다.
사실에서 정답이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글빨이 정답을 끌어낸다. 글의 논리가 사실의 논리를 압도한다. 그 경우 데이터가 충분한 장기레이스는 뻔하게 잘 맞히고 단기전은 항상 못 맞힌다.
펠레처럼 말이다. 펠레는 늘 오판하지만 항상 근거있는 오판을 한다.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언론을 많이 타는 잘하는 팀을 찍어서 우승할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긴 펠레가 뭘 알겠나.
펠레에게 찍힌 잘하는 팀은 예선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 때문에 집중적인 연구대상이 되어 견제될 뿐 아니라 적을 경시하고 오만해져서 지는 거다. 스타일이 경직된다는 이야기다.
각설하고 네티즌은 매우 불안해 하며, 네티즌의 불안을 달래줄 것은 ‘눈에 띄는 어떤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최고의 스트라이커 및 최고의 수비수 아니면 최고의 ‘노가다’ 뿐이다.
노가다란 것은 주로 체력과 정신력이다. 이런 것을 보여주면 네티즌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그런 따위에 치중하다가는 본선에선 힘도 못 써보고 진다. 체력과 정신력도 좋지만 구조가 앞선다.
노무현은 최고의 노력가가 아니라 최고의 조합이다. 막노동자+말단사병+인권 변호사+엘리트 지식인+고졸서민+재야운동가+민주투사+상업적 경영경험을 조합한 백화점 정치인이다.
이회창은 엘리트 판사만 겪어봤고, 이명박은 삽질만 해봤을 뿐이다. 김근태는 민주화운동만 해봤을 뿐이고, 정동영은 방송만 해봤을 뿐이다. 최고의 조합이 아니다. 노무현은 노력가가 아니다.
물론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체력은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팀을 리빌딩하는 구조가 더 중요하다. 약하면 약한대로 허허실실로 이기고, 강하면 강한대로 단숨에 제압하는 그런 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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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렬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14373
타이거 우즈의 슬픔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09-12-10)
‘사람장사 욕 먹는 게 당연하다’
꼴이 우습게 된 남자 타이거 우즈 씨. 그 역시 한 사람의 보통 미국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인격에서 보통 미국남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만천하에 밝혀졌다.
새삼스럽게 말이다.
실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별 볼일없는 한 사람의 보통 미국남자라는 사실을.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하기로 뒤로 ‘짰기’ 때문이다. 묵시적 담합, 익숙한 역할극.
‘~답게’ 한다는 것. 챔피언답게, 최고답게, 스타답게.. 그 ‘뭐뭐답게’가 사람을 죽인다. 하여간 지구별 사람들은 ‘뭐뭐답게’라는 해괴한 집단연극으로 사람 꼴을 우습게 만드는 고약한 취미가 있다.
철없는 우즈 씨 걸려들었다.
우즈가 백인이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파트너들은 못해도 유명 영화배우는 되었을 것이다. 실상은 어떤가? 대개 칵테일 바 종업원이다. 백인 중에서도 하류층.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콤플렉스다. 정체성 불안.
그는 흑인이다. 흑인의 정체성을 부정한 결과 불행해졌다. 왜 불행해졌을까? 누구도 그를 돕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돕지 않았을까? 돕고자 해도 도울 수 없는 포지션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수는 누구나 저지른다. 실수로 타격받아 망가지는 사람은 소수다. 누가 망가지는가? 도움받지 못한 자다. 왜 그의 곁에는 좋은 조언자가 없었을까? 그가 포지션을 잘못 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백인이었으면 백인 지식인그룹에 의해 보호되었을 것이다. 그는 좋은 여성과 결혼했을 것이고, 사고를 치고 싶어도 좋은 부인과 주변에 의해 제지되었을 것이다. 사고를 쳤어도 이토록 우스운 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흑인 여성과 결혼했다면 흑인 지식인 그룹에 의해 보호되었을 것이다. ‘보호’가 인위적인 개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의 공론이 있고, 평판이 있고, 분위기가 있고, 위신이 있고, 체면이 있다.
그 문화의 흐름에 적응하다보면 저절로 보호된다. 자기관리 된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실수할 기회 차단당하고, 실수를 저질러도 수습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꼴이 우습게 되었다. 수습이 안 된다.
그는 백인 상류층의 평판, 공론, 문화그룹에 끼지 못했다. 흑인 지식인의 평판, 공론, 문화가 지배하는 그룹에도 편입되지 못했다. 겉돌다가 망가졌다. 아웃사이더가 주류사회에 끼어들다 치이는 공식대로.
과거에도 무수한 아웃사이더들이 이 공식에 치였다. 앞으로도 무수한 사람들이 이 공식대로 몰락한다. 뻔한 공식이 반복된다. 그 공식 알아야 한다. 사회가 철없는 아웃사이더들에게 얼마나 냉혹한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부활한다. 깨닫지 못하고 계속 어리광을 부리며, 남의 탓이나 하다가는 재기 못한다. 세상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처한 포지션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신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했을 때 어떤 의도인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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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라’는 용케 잘 적응하고 있다. 한 방에 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뻔뻔스럽게 적응하고 있다. 능글능글하게 잘 해내고 있다. ‘강호동’도 무난하게 적응한 경우. 언뜻 무식해 보이지만 실로 영악하다.
그것이 단지 그 개인의 인격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인격자이기 때문에 멀쩡한 것이 아니라 평판, 공론, 문화그룹 안에서 흐름을 읽고 자기 포지션을 잘 가져갔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그것이 가능하다.
만화가 ‘박광수’는 전형적으로 깝치다가 망가진 경우. 디시인사이드 김유식도 오버하다가 좌초. 그 외에도 많다.
'지성'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개인의 인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공론과 평판에 기초한 사귐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문화가 사람을 바르게 인도한다. 그래야 치이지 않고 끝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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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지만 양현석, 박진영, 이수만, 박승대의 사람장사도 위험하다. 기본적으로 사고 나게 되어 있다. 사고가 나는게 정상이고 안 나면 이상한 거다. 잘하면 뚜쟁이고 잘못되면 포주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스승이 스승인 이유는 일방적으로 퍼주기 때문이다. 기업논리를 적용하는 순간 자동으로 스승 자격이 박탈된다. 주고받는 거래가 되면 욕을 먹는게 정상이다.
사람장사가 되면, 갑과 을의 지배종속관계에서 돌변하여 어느 순간에 갑자기 사람 대 사람의 수평관계가 되고, 강자와 약자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루려는 제 3의 힘이 작동한다. 이 살벌한 원리 모르면 치인다.
사고확률 백프로에 근접하고 있으므로 사회가 부지런히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그나마 조금 굴러가는 것이다. 이 바닥에서 제 2의 조용필이나 서태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난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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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렬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0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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