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친구’문재인이 사는 세상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30년 ‘동업’… “올해 대통령님 기념사업 근거지는 봉하”
‘외유내강’(外柔內剛). 문재인 이사장은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다. 아랫사람에게도 하대하지 않는다. 과묵하지만 부드럽다. 그리고 강하다. 특히 ‘원칙과 상식’에 어긋나는 일에는 타협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강경하다. 강직함은 말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묻어나온다.
그는 권력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거쳤다. 그는 그 시기에 “행복하지 않았다. 힘들었다. 내 삶에서는 일종의 일탈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렇지만 군부독재 시절 강제징집으로 끌려간 특전사는 “체질에 맞았다”고 한다.
운명
운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30년을 지기(知己)처럼 지냈다. 노 대통령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운명의 실타래는 어디에서부터 얽히기 시작됐을까.
“나와 사법연수원 동기인 박정규 전 민정수석이 대통령님과 고시공부를 같이했다. 박 수석이 대통령님과 함께 일하기로 하고 사무실 준비까지 다 마쳤는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미안하니까 나보고 한 번 만나보라고 추천했다. 첫 만남에서 통했다.”
1982년의 일이다. 문 이사장은 그날이 “내 삶에서 엄청난 변곡점이 됐다”고 회상한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변호사는 그 후 역사의 격랑을 거슬러 올랐다. 그는 그 만남 이전에도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다. 가난해서 역사학자의 꿈을 접고 법대를 갔으나, 유신 반대시위로 인한 구속과 제적, 강제징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흥남시청 농업과장이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빈손으로 2주 정도 예상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생계는 어머니가 꾸렸다. 그는 대학에서 제적을 당한 뒤 선배들의 배려로 해운회사에 취업을 하려 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내가 구속당하고 제적당했는데 제대 후에도 복학이 안 되던 시절에 돌아가셨다. 잘 된 걸 보지 못했다. 죄송했다. 다시 고시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버님 때문이었다.”
그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으나 과거 시위전력 때문에 판사로는 갈 수가 없었다. 검찰에서 오라고 했지만 검사를 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유수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는 과감하게 거절했다. 얼마 뒤 운명처럼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다. 그리고 30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동업을 시작했다.
“연수과정에서 판사, 검사, 변호사 시보까지 다 거쳤는데, 그때까지 만난 법조인과 완전히 달랐다.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게 전혀 없고, 너무 소탈했다. 법조인 모임에 나가면 판사, 검사, 변호사가 복장과 말투에서 표가 난다. 아무래도 검사들은 권위적인 모습이 나타난다든가, 총체적으로 법조인들의 느낌이 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노 변호사와 문 변호사는 찰떡궁합이었다. 주변에서는 “성격상 보완이 잘 되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였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생리적으로 가식이 없고, 본능적으로 어떤 척하는 걸 싫어한다. 그럼 다른 점은 없었을까.
“대통령님은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했다. 하다못해 이전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양식 같은 게 있는데 그런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소송위임장 봉투 양식도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고쳤다. 그런 시도가 번번이 다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고, 열 번에 한두 번은 오히려 이전보다 못했다. (웃음) 그래서 원상복구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대체로 문제의식 자체는 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권
문 이사장은 누구보다 열성적인 ‘인권변호사’였다. 그는 영남지역의 시국사건이나 노동사건을 전적으로 떠맡다시피 했을 때도 있었다.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시국사건이나 노동사건을 많이 맡은 변호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다.
그는 “노동사건이 고생은 해도 보람이 컸다”고 말하는데, 이뿐만 아니라 다른 변호사들이 맡으려고 하지 않는 사건들도 기꺼이 떠맡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6년 일어난 패스카마호 사건의 변론이다. 1996년 남태평양 참치잡이 조업에 나간 원양어선에서 조선족 선원들이 선상반란을 일으켜 한국인 선원 7명을 비롯하여 11명을 살해한 충격적인 참사였다.
“당시 피의자인 조선족들은 코리안 드림을 찾아서 한국에 왔다. 그러나 상급자들로부터 가혹한 구타와 모욕을 당했다. 그게 사건으로 폭발했다. 말하자면 잘 살아보겠다고 온 사람들을 학대해서 엄청난 범죄자들로 만들어 버렸다. 1심에서 변호사 조력도 못 받고 전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항소심을 맡았다.”
국민정서상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 조선족 선원들을 변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문 변호사가 속한 법무법인 ‘부산’은 부산, 울산, 창원을 다 연결하는 시국, 노동, 인권 사건의 센터 역할을 했다. 그는 억울하지만 달리 조력을 받을 곳이 없는 사람들을 떠안았다. 패스카마호 사건도 그랬다.
“일어난 범행 자체는 대단히 잔혹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 눈물겨운 바가 있다. 당연히 유죄고 엄벌도 받아야 하지만, 그 과정을 참작해야 했다.”
결국 패스카마호 사건의 피의자들은 항소심에서 한 명만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머지는 무기로 감형되었다. 그 사형수도 참여정부 때 무기로 감형됐다. 통칭 ‘문변’(문재인 변호사)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섰다. 피하지 않았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 정치다. 정치
“나보고 정치를 하라는 건 음치에게 무대 위에 올라가 노래하라는 것과 같다. 음치인 줄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그런 평가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노 대통령님과 함께 했던 이미지, 투영된 이미지에 대한 평가다.”
“우리 쪽에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싶으면 ‘음치론’ ‘후광론’ ‘역할론’에 이어 비장의 카드가 나온다.
“집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말리지 않는다. 진짜 전망이 없던 시절에 나를 만났다. 구치소나 공수부대 면회 오는 일을 겪었기 때문에 변호사가 된 후 돈을 별로 안 벌어줘도, 한겨레 지사 한다고 돈을 좀 날려도 괜찮았다. 그러나 정치하는 것은 집사람도 반대한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 더 나가면 “이제 그 정도로 하자”고 말문을 닫는다. 결코 겸양지사가 아니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모두 사절이다. 그러나 약간의 일탈도 있었다. 모두 노 대통령과 관련해서다.
“2002년 대선 때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만약 노 대통령께서 민주당 경선 때의 분위기와 지지도만 유지했더라도 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많이 어려워졌다. 위기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맡았다.”
참여정부 첫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은 것도 같은 이유다. 노 대통령님이 “검찰 같은 권력기관 개혁은 우리가 재야운동할 때부터 오랜 숙원이었으니까 당신이 민정수석을 맡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없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금도는 있었다.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는 2004년 청와대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알려졌다.
“민정수석을 그만둔 것은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열린우리당에서 총선 출마를 강력하게 압박하는 게 크게 작용했다. 나는 대통령님께 ‘저보고 정치를 하라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해서 다짐을 받은 바 있었다. 때문에 대통령님이 직접 얘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청와대 내에서 은근히 출마를 바라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나는 그 뜻을 받을 수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청와대에 있는 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등산을 좋아한다. 민정수석을 그만둔 그는 꿈에도 그리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노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자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한 그는 급거 귀국해 탄핵심판 사건의 변론을 맡았고, 그해 다시 청와대로 복귀했다.
“탄핵 이후 상황이 어려웠다. 대통령이 되는 데 도움이 됐다면, 그만큼 책임도 져야 했다.”
상처
2008년 2월 25일. 노 대통령은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도 양산으로 그날 거처를 옮겼다. 그는 원래 양산에 연고가 없다. 그래서 낙향에 가깝다. 왜 그랬을까?
“청와대에서 건강이 많이 상했다. 사실 건강 못지않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우리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아주 가혹한 비난이 많았다. 허망했다. 그래서 세상하고 조금 거리를 두면서 쉬고 싶었다. 그때는 세상을 반쯤 떠난다고 생각했다.”
최근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를 겪으면서 “아, 노무현 정부가 정상적인 정부였구나” 하는 말을 그리 어렵지 않게 듣는다. 그럼에도 그는 “대통령님 서거 후 허망함이 더 깊어졌다”고 토로한다.
노 대통령 서거 후 그 유례없는 추모 열기는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지식인이나 진보진영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보니까 ‘인간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노 대통령 서거 전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있었던 진보적인 언론매체들의 무책임한 비난은 아직도 마음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갑자기 노 대통령님의 죽음 때문에 없던 애정이 생겨날 수는 없다. 일반 국민들은 원래 노 대통령님의 정신이나 가치들을 높게 평가했다. 다만, 좀 흔들릴 수는 있다. 그동안 한국의 주류들이 워낙 비판을 많이 해대니까 자신은 다르게 생각하지만 판단이 흔들렸다. 그러나 서거 후 500만 인파를 보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고 본다.”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에선 어떨까. 가장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야란 기대에도 불구하고 가장 뜻대로 안 된 노동과 교육 쪽에 아쉬움을 내비친다. 특히 교육 쪽은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진보개혁진영의 역량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 정권을 담당한 사람들의 힘만으로 개혁을 할 수 없었다. 시민사회와 힘을 합쳐야만 개혁이 되는데, 전교조가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 문제로 틀어지면서 협조가 거의 안됐다. 또 과거처럼 청와대가 군림하는 그것을 막기 위해 부처별 수석제를 없애버렸다. 경제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를 사회정책수석이 맡았다. 분야가 너무 방대했다. 다 전문가일 수 없었다. 교육 전문가가 사회정책수석을 맡은 적이 없다. 계획이 틀어진 이유다.”
퇴행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는. 정권을 직접 겪어봤고, 그 성과와 좌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에게서 나온 진중한 첫 마디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였다. 가장 큰 문제로는 “다른 의견을 안 듣고 자기 독단에 빠져 있다”는 점을 들었다.
“예를 들면 참여정부에서는 이라크 파병에 대해 전투병 1만 명 이상의 규모로 보내자는 주장부터 절대 안 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했다. 치열한 논쟁을 거쳤다. 결국 파병을 결정했지만 최소 규모의 비전투병을 재건 명목으로 보냈다. 지금 정부는 전투병 1만 명을 보내야 한다는 사람만 있는 셈이다. 설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전혀 말을 못 하는 구조로 보인다.”
2007년 10월 노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맡아 청와대에서 역사적인 회담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때 가장 심혈을 기울인 합의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소중한 합의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남북관계는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의 경색국면을 맞고 있는 데 대해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정말로 한심하다. 연평도 사태는 오래전부터 예견됐다. 북한이 NLL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굉장히 오래됐다. 참여정부 시절 남북 정상이 해결책으로 합의한 것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다. 그것을 폐기했다. 결국 점점 갈등이 치솟다 터진 거다. 만약 그런 기조로 가려 했으면 사전 대응태세를 갖춰야 했다. 그런 것도 없었다. 사건이 터진 후 대응도 형편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못 할 줄 몰랐다”며, 4대강 사업부터 검찰 개혁까지 이명박 정부의 많은 문제들을 지적했다. 그는 “국정운영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이 안 되고, 비위를 맞추는 참모들만 있으면 우리 대통령제가 좀 위험한 제도”라면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걱정했다. 그렇다면 정권이 교체되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대답은 간명했다.
“모든 것을 정상화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노무현의 가치도 특별한 게 아니다. 오랫동안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다시 되돌아갔으니 정상화해야 한다.”
의무
그는 노 대통령 서거 후의 ‘정신적인 내상’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접고 싶은데도 그를 불러세우는 것은 노 대통령의 추모기념사업이다.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그로서는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올해 노 대통령님 기념사업의 근거지는 봉하다. 봉하 사저를 기념관으로 개방할 예정이다. 대통령님이 퇴임 후 사시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또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료편찬사업도 중요하다.”
문 이사장에게 대통령님 기념사업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키워드다.
“이명박 정부의 폭압적이고 퇴행적인 비민주적 정치행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노무현 정신과 노무현 가치로 대비시키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또 참여정부 5년에 대한 성찰적 복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앞으로 진보세력의 집권능력과 국정능력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노무현재단의 후원회원은 3만 1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모은 후원금은 80억 원을 넘었다. 거의가 소액기부다. 이 대목은 문재인 이사장의 자부심이다.
“지금까지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뿐 아니라 어떤 기념사업도 소액 다수 후원사업으로 한 예가 없다. 회원들께 너무나 고맙다.”
그는 정작 자신의 일에는 수줍음도 많다. 올해 가장 이루고 싶은 일을 묻자, 그는 “노무현재단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고만 말한다. 개인적인 건 없느냐고 한 발 더 들어가자 “변호사 일도 잘돼서 수입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웃는다. 탄핵 때문에 안나푸르나에서 중도에 포기한 네팔 트레킹은 계속 벼르고 있는 현재진행형 희망사항이다.
문 이사장이 생각하는 올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평화’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 절실하고, 평화가 모든 것의 기본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대통령 어록 중에서 그는 “강물은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는 강물처럼 평화가 물결 치는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봉하를 찾는다. 묘역 박석에 그는 대통령님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담았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2011년 01월 18일
노무현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