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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어버린 한민족

자연환경·국방. 통일

by 21세기 나의조국 2010. 5. 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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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어버린 한민족

 

왜 우리 동방 한민족의 시원역사가 왜곡, 말살되어 미궁에 갇혀버리게 되었을까? 그 결정적 이유들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외래 종교에 의한 역사 왜곡이요, 둘째는 숱한 전란과 병화兵火로 인한 고유사서들의 소실이요, 셋째는 중국 중화사관의 중독中毒, 일제 식민사관의 왜독倭毒, 서양 실증주의 사관의 양독洋毒으로 인한 폐해 때문이다. 여기서는 외래종교의 폐해와 전란으로 소실된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1. 외래종교에 의한 한민족 역사 왜곡

 

단재 신채호는 외래종교, 외래사상에 물들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다 잃어버린 세태를 이렇게 통탄하였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낭객의 신년만필」동아일보 1925.1.2.)

 


①유교에 의한 폐해

 

요순堯舜의 가르침을 뿌리로 하는 유교사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그 밖의 모든 민족은 중국에 예속된 오랑캐라는‘중화주의中華主義’를 제창한다.

 

이 중화주의 사관의 표본이 다름 아닌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춘추』는 공자가 자기의 조국인 노나라를 춘추시대의 중심국가로 하여 기술한 역사서이다. 춘추필법은 이『춘추』의 필법을 말하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역사를 기술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공자의 경우와 같이 자국을 높이는 자기중심의 역사 서술을 말한다.

 

이 춘추필법에 의해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철저하게 중화주의 사관으로 역사를 기술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고 수치스런 일은 감춰버렸으며[위국휘치爲國諱恥], 중국은 높이고 오랑캐는 깎아 내렸으며[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사는 상세히 쓰고 이민족 역사는 약술하였는데[상내약외詳內略外], 이 과정에서 동방 문화의 주인공인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 변방의 한 오랑캐 족속의 하잘것 없는 역사로 왜곡되었다.

 

중국의 양계초梁啓超는 그의 저서『중국역사연구법』에서‘중국의 모든 역사는 중국의 목적을 위한 추구芻狗(집짐승)의 노릇을 할 뿐이다. 그 결과 역사를 반드시 중국 증심으로 억지로 왜곡하여 사가史家의 신용이 땅에 떨어졌다. 이 악습惡習은 공자로부터 나와 2천 년 동안 그 해독害毒이 전해져 왔다’고 비판할 정도다.

 

중국 한족의 이러한 중화주의 사관도 문제지만,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 땅의 존화 사대주의자들의 태도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철두철미한 공맹孔孟의 제자가 되어, 오랑캐의 색채를 지운다는 명분으로 스스로‘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의 들러리로 전락시켰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기자동래교화설箕子東來敎化說’이다.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은 중국 한대에 왜곡 조작하여 만든 이 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우리 역사의 출발점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우리 민족은 기자의 교화를 받아 비로소 문명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자 이율곡, 이퇴계도‘중국 은나라의 기자라는 분이 미개한 우리 조선민족에게 문화를 전해줘서 우리가 문화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들 유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국통國統맥을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 남삼한, 신라로 연결되는 것으로 왜곡하였다. 그 선구적 인물이『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다. 그는『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만주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의 역사는 완전히 지워버리고 동시대의 신라 역사는 망하는 날까지 세세히 기술하였다.

 

그는 또한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을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우리 당태종[我唐太宗]”이라고 칭하였다. 심지어 거리를 측정하는 것까지도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몇리라 하지 않고 북경에서 몇 리라고 운운하였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은 망국멸족亡國滅族의 사대주의 사관의 표본이 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고 공자의『춘추』와 주자의『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사서들은 이단이라 하여 압수·소각함으로써 동방 한민족의 참 역사와 신교문화는 더욱 급속히 잊혀 갔다.

 

그 구체적 사례로, 조선 개국 초 태종 이방원은 당시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사서들을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여 소각하였고, 세조, 예종, 성종 등은 전국의 관찰사들에게 계속하여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예종 1년(1469)에 내린 전교典敎에서는 이러한 책들을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하라고까지 하였다.

 

조선 초기 임금들의 이러한 움직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조 유학자들의 정신은 오로지 사대 존화로 일관하였다. 세종 때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조종祖宗이래 지성으로 중국에 사사師事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훈민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라”하였다.

 

유가의 대성大聖으로 추앙받는 우암 송시열은 사대주의의 성지聖地,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고, 말년에는 아예 중국의 관복을 입고 다녔다.

 

조선의 개혁정치가로 추앙 받는 조광조도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다. 그는 소격서昭格署의 제례를 도교의 행사라고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여러 유신儒臣들과 조직적인 운동으로 관철시키면서 제복祭服, 제기祭器, 신위神位등을 땅에 묻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삼신 상제와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리던 신교 문화의 오랜 전통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아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 종교, 철학의 귀중한 자료들이 석굴에 묻혀버리거나 산실散失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민족사를 탐구하는 데, 중화사상에 절어있는 중국 사료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 최면에 걸려있던 조선 초기가 지나고 15대 임금 광해군 때 후금(청)이 건국되자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전개하였는데, 이때 청태조 누루하치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 조선의 유약한 사대 근성을 꾸짖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내가 듣건대 조선은 기자의 유민이다. 은나라 왕이 무도하여 기자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머슴처럼 분장을 하고 있다가, 조선에 가서 그 땅을 점유하였다. 요동은 본시 조선의 국토다. 지금 명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빼앗았는데, 너희는 명나라가 원수인 것도 모르고, 도리어 신복하고 있다. 진실로 기자의 자손은 노예근성이 남아있나 보다. 나는 워낙 명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희가 나와 수호하지 못하겠다면, 뜻대로 하라. (청태조 6년, 광해군 13년(1621)의 국서)

 

 「吾聞, 朝鮮箕子之遺民. 殷王無道箕子爲之奴, 故遁之朝鮮, 據有其地. 遼東本朝鮮國土. 明人奪之, 爾不知讐, 復反臣服於明. 眞箕子之子孫, 有爲奴之遺性者矣. 吾固不畏明, 爾若不能與吾修好,任爾可也.『」滿文老������秘錄』(박시인,『 샘이 깊은 물은 국사 개정의 방향』, p65~66.)

 

유가문화의 이런 고루하고 부패한 역사의식으로 인해 근세조선은 결국 망국의 운명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세조 3년(1457) 수거령

 世祖7卷, 3年(1457 丁丑) 5月26日(戊子)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周南逸士記』『, 誌公記』, 『表訓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 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一百餘卷, 『動天錄』『, 磨*錄』『, 通天錄』『, 壺中錄』『, 地華錄』『, 道詵漢都讖記』等文書는 不宜藏於私處니 如有藏者는 許令進上하고 以自願書冊으로 回賜니 其廣諭公私及寺社하라”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등 삼인이 기록한『수찬기소修撰企所』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진상進上하게 하라. 대신 원하는 책을 내려줄 것이니라. 이를 관청과 민간, 절간과 단체에 널리 효유曉諭하라”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

 

이 가운데 대변설(대변경), 조대기, 삼성밀기, 안함노·원동중의 삼성기는 환단고기에 인용된 사서들이다. 이때까지도 우리 고유 사서들이 많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② 불교에 의한 폐해

 

삼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불교는, 처음 들어오던 당시만 해도 한민족의 정통 신교정신을 계승한 낭가郞家사상의 한 부분으로 소속되어 더부살이 하던 처지였다. 그 후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불교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낭가의 공동체정신과 상무정신을 우리의 민족 정서에서 지워 버렸으며 우리 역사를 창업한 주인공들을 온통 불제자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고려의 승려 일연은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국가인 환국의 초대 환인을 한낱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삼국유사』를 지으면서“석유환국昔有桓”(옛 적에 환국이 있었다)이라 하고 주석에는“위제석야謂帝釋也”(제석이라 부른다)라 하여, 환국을 다스린 환인桓仁을 불교에서 받드는 제석환인帝釋桓因이라는 신으로 오인하게 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일본 제국주의가 한민족의 역사를 뿌리째 뽑을 때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불교의 폐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사찰에 가면 석가모니를 모신 성전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는데, 대웅전은‘큰 성인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다. 이 대웅전은 본래 불교문화에서 온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뿌리 문화 즉 신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환웅전桓雄殿’, 즉 환웅천황을 모신 성전이 있었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환웅전의 환桓자를 대大자로 고쳐서 대웅전大雄殿이라 하고, 민족사의 뿌리인 환웅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석가모니를 앉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단군의 탄생일인 4월 8일을 석가탄신일로 변조시켜 놓았으며,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올린 유서 깊은 마리산摩利山(머리산)을 불교식으로 개칭하여 마니산摩尼山으로 만들어 버렸다.

 

 

③ 기독교에 의한 폐해

 

19세기 말 개화와 더불어 서구 물질문명의 유입에 편승하여 들어온 기독교는 이 땅에 발을 붙이는 그 순간부터 한민족의 고유 정신문화를 유린하고 시원역사를 부정해왔다. 환국, 배달, 조선의 유구한 역사를 인정하고 환인, 환웅, 단군 성조를 한민족의 시조신으로 인정한다면 기독교의 유일신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국조 단군의 역사를 공공연히 신화로 치부하였다. 그들의 왜곡된 역사의식이 빚어낸 폐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특별시에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임을 상징하는 단군성전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세계에 자랑할 문화유산의 하나라고 여겨 사직공원에 있던 협소한 단군 재실齋室을 확대 개축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단군성전 건립 결사반대’라는 붉은 글씨의 현수막을 교회마다 내걸고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며 우상이라고 우겨서, 계획을 무산시켜 버렸다. 또한 뿌리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전국의 초등학교에 세워둔 단군 상을 톱질하여 온 국민을 경악케 하였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뿌리 역사와 사상, 문화를 줄곧 배척해 왔다. 유대인들의 구약 역사서는 줄줄 외면서 정작 한민족의 상고사에 대해서는 알아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서구 과학문명을 이 땅에 들여오는 데는 공로를 세웠다 할지라도 이처럼 한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불교, 유교, 기독교의 폐해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주인 정신을 지닌 사람에게는 외래사상이 좋은 약이 되고 발전의 밑천이 되지만, 주인 정신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아편과독이 되고 만다. 외래사상의 무조건적인 배척은 편협한 국수주의에 불과하다. 외래사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민족만이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는 전제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2. 전란으로 인한 사서 소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는 법이다. 그 전란에는 약탈과 방화가 뒤따라 소중한 역사 서적, 유물, 문화재 등이 탈취, 소각되기 마련이다. 이 땅에서 벌어진 전란으로 한민족의 중요한 사서들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 대표적인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동천왕 18년(244)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공격해 왔을 때, 많은 사서가 소각되어 버렸다.

 

둘째,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사고史庫가 통째로 불타버려 백제 왕실에 전해 내려오던 사서들이 멸실되었다.

 

셋째,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수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고구려의 경전과 서적들을 모두 탈취해갔다.

 

넷째,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치고서 신라 서책들을 후백제의 본거지인 전주로 옮겼는데, 그 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멸망당할 때 그 책들이 소실되었다.

 

다섯째, 고려 인종 4년(1129) 금나라에 서표誓表를 바친 후 그때까지 남겨져 있던 많은 역사책들을 빼앗겼다.

 

여섯째, 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의 침입 때 몽고군에 의해 사서들이 소진되었다. 『삼한고기 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가 이때 없어졌다.

 

일곱째, 조선 선조 25년(1592)에 시작된 조일전쟁 즉 임진왜란 때 무수한 전적典籍이 왜적에 의해 방화·소실되었다.

 

여덟째,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아까운 수많은 사서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전란과 병화로 소실된 고유사서들 중에는 사본이 달리 전해지지 않는 희귀한 사서들도 많았다. 그 책들이 보존되어 오기만 했어도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한민족사를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적바림  [월간개벽 201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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