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번 글 올리고 나서 꽤 오랫만에 글을 올리는 셈이 되었습니다. 설연휴도 있었고, 좀 바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좀 더 차분하게 정리된 글을 올리려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던 탓도 있습니다.
두바이에서 시작된 잔물결 효과가 그리스, EU 전체로까지 번지면서 일련의 사태가 전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참 여러 가지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듯 합니다. 차차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오늘은 사태를 바라보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 사태가 금융시장에 작은 패닉을 불러일으켰던 날, 언론기사 중에 눈에 띄는 언급이 있었습니다.
“지구인들이 더 이상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제 우주인 도움이라도 받아야겠죠.” 민간부실이 국가부실로…유럽발 ‘금융 쇼크’ 한겨레
어느 금융시장 전문가가 사태의 진행을 보고 농담처럼 내뱉은 넋두리를 전한 것입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진정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리스발 국가부도사태 우려로 EU 전체가 흔들리면서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는데, 결국 지구인들로서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취지의 지적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현재 전 세계 경제가 처한 상황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태를 바로 보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왜 그리스에 대한 지원이 어려운 것일까?
그리스의 국가부도사태 우려로 EU의 존립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U 각국은 그리스에 섣불리 구제금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을 그냥 윤전기에서 찍어내면 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EU 중앙은행이 윤전기를 돌려 그냥 유로화를 더 찍어내서 그리스를 지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를 지원하지 못하는가 하면, 그냥 찍어냈다고 돈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용(통화)시스템에서는 신용만 있다면 돈을 얼마든지 더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반대로 신용이 없다면 돈을 더 만들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즉 신용(통화)시스템은 신용의 양으로 돈의 양이 제한되는 것입니다. 금본위제는 금의 양으로 제한된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신용(통화)시스템에서는 종이돈이므로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고 자꾸 생각하는 데서 큰 판단착오가 생겨납니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번 그리스, EU 사태는 물론, 세계 경제위기 전체를 꿰뚫어보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종이돈을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면 EU가 그리스를 지원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를 지원하지 못함으로 해서 EU의 존립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EU로서는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종이를 찍어낸다고 해서 돈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글,
에서 사회 내의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소비수요가 부족하게 되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이 소비수요 부족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빚’을 늘려왔다는 사정을 설명드렸습니다.
윗 글에서 소개해드렸던 이 그래프는 미국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지만, 미국만이 아니라 EU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고 전 세계 경제가 처한 상황도 이와 똑같습니다. 이 그래프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지구인들은 짜낼 수 있는 신용을 다 짜내서 돈으로 바꾸어 이미 모두 써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어느 금융전문가의 넋두리는 ‘신용을 다 써버려서 지구인들에게는 더 이상 신용이 남아있지 않다면, 이제 우주인에게서라도 신용(=돈)을 빌려와야 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언급처럼 외계인에게서라도 빌려오지 못한다면 이제 지구상에는 더 이상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신용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를 지원하고 싶어도 지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EU의 신용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여기서 돈을 더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EU가 보유한 신용의 크기를 넘어서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그리스만이 아니라 EU 전체의 신용을 의심받게 될 수 있습니다. 즉 문제가 더 커져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EU는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을 망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 지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던 EU 주요 5인자 막후 협상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와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신용(통화)시스템의 원칙에 민감한 중앙은행 총재와 바이마르 공화국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경험을 갖고 있는 독일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사태의 파장이 워낙 커지니 지난 16일에 열렸던 EU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지원 의지’를 재차 확인했다고 하는군요. 시장은 ‘지원 의지’의 확인으로 그리스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며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기사를 보면 EU의 재무장관들이 지원 의지를 재차 확인한 것이 맞는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30일 뒤로 시간만 미루었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EU "그리스 긴축안 없으면 제재" 강경책 아시아경제
앞으로 구체적인 진행경과가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겠지만, 최종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있습니다. EU가 어찌어찌하여 1차적인 지원을 결정해서 시간을 연장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그리스 문제가 해결되도록 모든 지원을 다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1차 지원을 받아 시간을 연장했던 두바이의 부도위험이 다시 치솟고 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를 지원하면 남부 유럽의 돼지떼들(PIGS)이라고 경멸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늘 아침에 보니 이탈리아 또한 통계를 조작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는군요.
결국 EU가 역내의 모든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해결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다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원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결국 EU와 유로화 전체에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서 EU에는 충분한 신용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EU가 그리스에 대해 구제금융을 제공할 것 같다는 이유로 외환시장에서 유로화가 강세를 보인다는 것은 넌센스일 뿐입니다. 보유하고 있는 신용의 크기를 넘어 통화를 증발하겠다는 얘기인데, 유로화에 재앙과 같은 크나큰 약세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조금 지나면 시장이 상황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서, 유로화의 약세요인이라고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 EU 사태는 통념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오늘날 대공황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 중의 하나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서 떠받치고 정부가 적자재정을 통해 경기부양책을 실시해서 떠받칠 수 있기 때문에 공황이 다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글자 그대로 통념에 불과한 것이고 오류에 빠진 생각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미국, EU, 중국, 일본 어느 나라도 자국이 보유한 신용의 양을 넘어서서 돈을 더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위 그래프가 보여주듯 세계 각국은 자국이 보유한 신용을 이미 다 써버렸기 때문에 돈을 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 EU 사태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를 보면, 현재도 심각한 경기침체와 실업증가로 고통받고 있는데, 현재보다 재정지출 계획을 훨씬 더 감축하라고 합니다. 이는 공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리스 사태가 터진 후 세계 각국 정부는 앞다투어 향후 재정지출을 줄여나갈 것이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G7 재무장관 회담에서 각국 재무장관들은 기존의 경기부양책은 계속 유지하지만, 추가적인 경기부양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임을 다짐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경기부양책을 계속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 교수 같은 경우는, 현 국면에서 붕괴를 방지하려면 2차 경기부양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와 같은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도 과다한 재정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최고 신용등급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신용평가사들의 경고가 이어지고 있고, FRB 의장 버냉키도 ‘FRB 출구전략’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리스, EU 사태는 오늘날의 경제위기 한복판에서도 신용(통화)시스템의 원칙을 무시할 수 없다(또는,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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