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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성이 필요한가? 외국인 노동자의 불행

◆경제지혜·미래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09. 8. 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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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성이 필요한가?
- 쪼잔한건 촌스럽다. 대범해야 지성이다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09-08-26)

오해는 사절한다. 베라씨가 뭘 잘못했다는건 아니다. 그 정도는 자연스럽다.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실수의 자유도 포함) 그것도 팔아먹자고 쓴 책일텐데 그 정도를 문제삼는다면 촌스러운거다.

 

필자가 방점을 찍어서 강조하는 것은 저쪽동네 ‘무뇌좌파’와 우리동네 ‘선골(仙骨)’ 사이에 강이 있다는 거다. 본질에서의 차이가 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건 인정해야 대화의 질이 높아진다.

 

그쪽은 최대개입을 추구하고, 우리는 최소개입을 추구한다. 그쪽은 법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흐름에 있고, 이쪽은 선가(仙家)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그쪽은 쪼잔하고 이쪽은 대범하다.

 

그쪽은 인위를 주장하고 이쪽은 무위를 주장한다. 그쪽은 제도로 근본을 삼고 이쪽은 미학으로 근본을 삼는다. 그쪽은 계몽을 수단으로 삼고 이쪽은 문화를 방편으로 삼는다.

 

그쪽은 통제를 앞세우고 이쪽은 소통을 앞세운다. 그쪽은 평균을 끌어올리고 이쪽은 뛰어난 1인에 맞춘다. 그쪽은 선형적, 이항대립적, 흑백논리적 대칭적 사고의 교착에 빠져 있고, 이쪽은 비선형적, 비대칭적, 입체적 사고로 바깥으로의 출구를 획득한다.

 

근본적으로 가는 길이 다르다. 그 차이를 말하려는 거다. 본질에서 지성과 비지성의 차이다. 지성은 인류의 지적 네트워크다. 인류전체를 단위로 하는 개념이므로 국가간 차이를 넘어선다.

 

문제삼지 않을건 문제삼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인 니들은 왜 개고기 먹냐.’ ‘일본인 니들은 왜 고래고기 먹냐?’ ‘아랍인 니들은 왜 돼지고기 안먹냐?’ 이런거 따지면 피곤해진다.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안 되는 거다.

 

그런 개입은 지성이 아닌 거다. 베라씨의 글은 독일인 중에서도 전형적인 독일인의 글이며, 아주 독일냄새가 팍팍나는 글이며, 독일은 유럽 중에서도 공적개입 잘하기로 그 특징이 유난한 고장이다.

 

뭐냐하면 '이탈리아-≫말 안듣는 애는 팬다.' '프랑스-≫말 안듣는 애는 잔소리로 꾸짖는다.' '독일-≫말 안듣는 애는 붙잡아 앉혀놓고 알아들을때 까지 끈질기게 설득한다.' 이건 유럽에서 만들어진 유머다.

 

독일은 철학자의 나라다. 유명한 철학자의 책을 한권씩만 꼽아도 책장을 가득 메운다. 그 영향으로 국민이 모두 철학에 달통했는데 그게 전통이 되어 앉혀놓고 끈질기게 설득하는 문화를 만든 거다.

 

합리주의를 앞세워서 합리적으로 설득하면 당연히 납득해야 한다고 여긴다. 근데 그게 웃기는 짜장이다. 깨달음이 없는 철학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억지 합리를 표방할 뿐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인간을 설득해서 어느 하나의 기준에 맞추려 하면 안 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을 희생시키는 거다. 그렇게 살도록 놔둬야 한다.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예(禮)다.

 

일상적으로도 독일인은 인생을 집짓기에 바친듯이 건축에 열심이고, 피서지에 가도 텐트를 성벽처럼 둘러쳐서 외부인의 동선과 시선을 차단하고(그러려면 바닷가에 왜 왔나? 사진 풍경이 딴판.) 도로에서 자동차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무지하게 화를 내고 이런거 유명하다.(내차 앞의 빈 공간도 안방처럼 내 영역이라고.)

 

타인의 영역에 사적으로는 침범불가, 동시에 공적으로는 지나치게 침범한다. 사소한 것도 메뉴얼이 갖추어져 있고, 시청 같은데서 교육받아야 하며 시시콜콜 검사받아야 한다. 이사라도 가려면 온갖 절차를 챙겨야 하고 등등.

 

한국도 쓰레기는 분리수거 하고 일회용 나무 젓가락은 못쓰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에서 그런 것도 참견하냐’고 하지만 독일에서는 그게 유난히 심하다. 따지는게 많아서 그 나라에서 살려면 배워야 할게 많다.

 

독일은 통제교육을 지향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메뉴얼로 해결을 보는데 메뉴얼을 잘못 가지고 와서(일본것을 가져온듯, 아마 일본과 한국의 문화차이를 구분못하는 사람이 메뉴얼을 만든듯) 투덜거리는 거다.

 

중요한 것은 독일의 이런 특성이 선가의 전통을 앞세우는 한국과 아주 상반되고 일본과는 좀 맞는다는 거다. 사적영역에 함부로 참견하는 한국인의 고질병에 대해선 필자도 무수히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외국인이 비판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명을 먼저 만든 사람이 기준을 정하면, 뒤에 가는 사람은 군말없이 따라야 할 때가 많다. 무조건 한국 잘못이다 하고 독일 기준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 많다.

 

그래서 한국사람이 ‘줄 잘서고 규칙 잘 지킨다’는 독일규칙 열심히 배워서 독일 갔더니, 정작 독일사람은 도로에서 경찰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무단횡단을 일삼는다. 멀거니 서 있는 경찰에게 따졌더니 ‘성인이 자기책임으로 하는 행동에 국가가 왜 개입하나?’ 하고 반문한다. 그 한국인 어리둥절.

 

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한국은 공사구분이 불투명한 나라다. 그 사이에 금만 잘 그으면 문제해결?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하나의 문제가 새로 불거진다. 공과 사 사이에 금긋기는 독일에서나 통하는 방법일 뿐이다.

 

개인이 각자 완성되어 있으면 메뉴얼은 필요없다. 정리하자.

 

최대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최소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법가의 전통을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선가의 전통을 계승할 것인가?
쪼잔하게 행동랄 것인가 아니면 대범하게 행동할 것인가?
인위를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무위를 주장할 것인가?
제도를 근본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미학을 근본으로 삼을 것인가?
계몽을 수단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문화를 방편으로 삼을 것인가?
통제를 앞세을 것인가 아니면 소통을 앞세울 것인가?
평균을 끌어올릴 것인가 아니면 뛰어난 1인에 맞출 것인가?
흑백논리, 이항대립적 사고, 대칭적 사고, 선형적 사고로 교착될 것인가 아

    니면 깨달음, 통합의 관점, 비대칭적 사고, 입체적 사고로 바깥으로 난 출구

    를 획득할 것인가?

 

전자는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에서 유래하고 중국에서도 북방 유목민의 특징이다.(엄격한 규칙은 흉노선우 묵특) 후자는 농경지역 전통에 기반한 것이고, 중국에서도 양자강 남쪽 산악지역 사람들 생각이다.

 

초원은 넓어서 순식간에 모일 수 있고 또 순식간에 흩어질 수도 있다. 유목민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10만명 단위의 대집단이 형성된다. 그들은 집단주의에 익숙해 있다. 이게 히틀러의 나치로 발전한 거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면 넓은 초원에 흩어져서 철저한 개인주의로 변한다. 사적 영역의 보호는 몽골이 훨씬 더 심하다. 몽골에서는 남의 게르를 방문할 때는 몇십미터 앞에서 말에서 내리며 하는 동작이 정해져 있고, 20미터 앞까지 접근해서 해야하는 딴청이 정해져 있다.

 

게르 20미터 앞에서 일단 동작그만 자세로 하늘을 쳐다보며 ‘오늘 날씨가 말먹이기에 적당하군’ 이런 말로 딴청피우기를 몇 초간 해야 한다. 그동안 천막 안에서는 상대가 무기를 감추었는지 확인한다.

 

최대 7.0까지 된다는 몽골인의 뛰어난 시력으로 문틈을 보고 있다가 이방인이 영역 안으로 함부로 들어오면 봐로 쏴버린다. 접근을 허락받고 들어올 때도 문지방을 밟으면 큰 망치로 두개골을 뽀사버리며(동방견문록) 문 안으로 들어와서도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방향 틀리면 죽음이다.

 

초원에서는 순식간에 쳐들어와서 순식간에 몰살시키고 순식간에 양떼를 훔쳐가버려도 대책이 없다. 농경지역은 다르다. 순식간에 접근할 수도 없고, 재산이 토지라서 땅을 떠매고 갈 수 없으니 훔쳐가지도 못한다.

 

농경민들은 가족 위주의 소집단을 이룬다. 대집단은 형성되지 않는다. 히틀러식 대규모 집단주의는 없다.(한국인은 자갈이라 뭉치지 않는다.) 반면에 개인주의도 약하다. 남의 집을 함부로 기웃거려도 화내지 않는다.

 

진정한 개인주의는 중국하고도 남쪽 산악지역에서 나왔다. ‘내 몸에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에 이득이 되어도 터럭을 뽑지 않겠다’는 사상이다. 산악에 고립되어 살기 때문에 타인과 협력할 이유가 없다.

 

초원에서는 전쟁나면 다 죽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 협력하다보니 나치가 된다. 반면 중국 양자강 남쪽 산악지역에서는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므로 전쟁이 났는지도 모른다.

 

유럽식 개인주의는 사적 영역을 강조하면서 그만큼 공적간섭을 일삼는 이중적인 개인주의다. 깨달음의 토대 위에서 최소개입을 주장하고, 무위에 맡기고, 미학으로 소통하는 진정한 개인주의가 아니다.

 

유목민 전통의 독일인이 농경민 전통의 한국인을 이해못하는건 당연하다. 공자는 예에 달통했는데 ‘곡례 3천’이라 하여 3천가지 예법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 많은 규칙을 어떻게 다 외웠느냐고 물었더니 공자왈 ‘외우지 않았다 단지 서(恕) 하나로 꿰뚫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공자가 예법에 밝아서 행사의 사회자로 초빙되었는데 순서마다 '다음 차례는 뭐죠?' 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예을 안다면서 왜 그걸 묻소?' 하고 따지니 공자왈 '바로 그것이 예다'고. 자기 기준이 아닌 상대방 기준 존중.

 

서(恕)는 타인에 대한 배려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베라씨가 한국식에 적응못하는 것은 메뉴얼로 해결하려는 버릇 때문이다. 규칙을 외우려 하면 안된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1초만에 적응한다.

 

그게 지성과 비지성의 차이다. 서(恕) 하나로 해결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바보같이 수첩에 뭔가를 계속 적고 있는 거다.

 

최대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최소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21세기 인류문명의 방향성에 걸맞는 모드는 어떤 것인가?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 연대에 걸맞는 개념은 사적참견의 한국식도 아니고 공적통제의 독일식도 아니다.

 

창의적인 집단이 성공한다. 법가의 유목민이 창의적일까 유가의 농경민이 창의적일까 선가의 산악민이 창의적일까? 구글본사라면 어떨까? 다양한 인종, 다양한 관습,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독일식도 한국식도 아니다.

 

인터넷 유목민이라는 말이 있지만 인터넷이 반드시 노마드의 것은 아니다. 인터넷 오타쿠들은 오히려 산악민에 가깝다. 유목민이든 농경민이든 산악민이든 구애됨이 없어야 참된 지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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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의 불행
- 차별과 특권은 동시에 발생한다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09-09-10)

 

한국에 취업하고 있던 외국인 노동자 모씨가 자국의 개인 웹공간에 쓴 몇 마디의 짧은 감상문이 문제로 되어 자기나라로 쫓겨갔다고 듣는다. 이 시점에서 그 사건도 아닌 사건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다른 국적을 가진 여러 외국인 노동자와의 형평성 때문일게다.

 

일전에 있었던 독일인 베라씨 사건과도 유사하다. 확실히 한국은 문제가 있다. 관습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봉건 계급사회의 잔재가 남아있다. 동남아에서 입국하여 3D업종에 취업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는 흔히 주류 한국인 일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으로 치부되곤 한다.

 

반면 미국이나 서구에서 온 취업자는 한국인보다 높은 계급으로 올라선다. 한국인들은 비굴한 낯빛으로 그들을 섬기며 뭔가 부가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다. 영어 몇마디라도 얻어배우고자 공연히 주변을 배회하며 어설픈 미소를 보낸다. 천박한 노예근성의 표출이다.

 

*** 노예근성 - 이방인을 자신과 대등한 관계로 보지 않고, 고달픈 노예신세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줄 윗선의 라인으로 여겨, 그 줄을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줄이 튼튼한 줄이냐 썩은 줄이냐에 따라 변덕스런 이중행동을 보인다.

 

과도하게 히딩크를 섬기는 한국 언론의 낯간지러운 행태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다가 사소한 비하발언이라도 드러나면 부여된 특권이 졸지에 몰수되기도 한다. 부가적인 수익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배낭여행자가 동남아를 방문한다면 주의해야 한다. 관광지가 아닌 전통마을 주민들이라면 이방인을 극도로 경계한다. 여행자는 멋 모르고 친절을 베푼다. 주머니를 뒤져 사탕이라도 던져준다. 그 사소한 사건은 그들에게 심리적 상처가 된다.

 

고립된 지역 주민은 그 닫힌 공간에서 자신을 탈출시켜줄 외부의 친절한 손길을 기다리며 기대를 품지만, 여행자는 단순한 뜨내기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가슴 속에 심어진 증오심과 복수심을 즐거운 한국인 여행자는 모른다.

 

몇 알의 사탕에 기뻐하는 태국 시골마을 꼬마의 웃는 모습을 추억하며 환상에 빠져든다. 다르지 않다. 그 모습이 바로 얼마전까지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625 직후다. 너나없이 굶주렸던 시절. ‘츄잉껌 기브미’를 왜치며 미군지프차를 뒤쫓다가 원하던 츄잉껌도 쵸콜렛도 얻지 못하고 무안을 당했을 때의 환멸감 말이다.

 

그 행복한 웃음짓던 시골 꼬마의 숨은 증오심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다. 그 상처 오래간다. 이런 사건은 앞으로도 한국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한국은 여전히 실력으로 경쟁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습적 계급제도가 은연중에 유지되는 낙후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인 모씨는 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 내버려두고 한국에서 성공하려고 했을까? 한국이 더 만만하기 때문이다.

 

베라씨 사건도 비슷하다. 그 정도의 지적 수준으로 독일에서 방송출연이 가능했을까? 아니다. 만만한 한국이니까. 외국인 여성의 다리를 상품으로 삼는 수준이하의 방송을 하는 덜 떨어진 방송국이 있는 한국이니까, 여행자의 기본상식도 없는 무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닌 미모로 어떻게 어필하여 그저먹기 된 것이다.

 

확실히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 대해 동경심을 품었고 그들에게 과도한 특권을 부여했으며, 환상이 깨지고 환멸을 느꼈을 때, 냉담한 현실을 깨달았을 때, 역시 과도한 분노를 표출하곤 한다. 외국인 피해자 입장은 황당할 뿐이다.

 

두만강 국경에는 비닐봉지에 밥을 담아 던져주는 인간 사파리 여행의 중국인 관광객들 있다. 그밥을 고맙게 받아가는 굶주린 북한주민이 있고, 바로 옆에서 돌을 던지는 눈매 사나운 북한 젊은이가 있다. 고맙게 밥을 받아가는 사람의 마음과 돌을 던지는 청년의 마음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반복되는 사건의 본질은 외국인에 대한 환상 때문에, 실력이 아닌, 실력 이외의 것을 보는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다. 정당하지 않은 것을 기대하고, 정당하지 않은 특권을 부여하며, 역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여된 특권을 몰수한다.

 

동경과 환상이 특권과 차별을 낳는다. 문제는 순전히 한국인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변덕스러움에 멀미를 일으킨다. 왜 한국인들의 내면문제 때문에 외국인이 한국에서 황당한 경험을 해야 하지?

 

콤플렉스가 존재하는 한 한국인은 지속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고, 동시에 특권을 부여하며, 또 변덕을 일으켜 부여한 특권을 회수할 것이다. 일관성 없는 행동이 외국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불개입 태도가 중요하다.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개인의 사적 영역에 대한 과도한 개입은 잘못이다. 헛된 기대를 품고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는-속을 들키는- 심리적 개입은 더욱 위험하다. 베라씨 사건와 이번 사건은 한 마디로 한국인이 '속을 들킨' 것이다. 노예근성 말이다.

 

네티즌의 자유발언에 대한 지식인의 과도한 개입도 잘못이다. 그 외국인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에게 환상을 품은 한국인이 자신의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하고, 부여한 특권을 회수하려는 노력은 정당하다.

 

소속사는 확실히 잘못을 저질렀다. 외국인 노동자의 언행에서 발견되는 지성의 결핍,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은 큰 문제다. 얼굴만 멀끔하면 원초적으로 아닌 애를 아무나 데려다가 로봇처럼 훈련시켜 아이돌이라고 데뷔시키는, 극단적 실용주의가 적용된 비뚤어진 집금방식의 폐해다.

 

영어만 되면 범죄자라도 데려다가 강사를 시키는 무개념 학원가와 다를 바 없다. 소속사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런 식의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인- 소모적인 마찰은 계속될 것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함부로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3류 지식인들(오마이뉴스 김갑수들 말이다)의 대중에 대한 경멸적 시선의 이면에 특권의식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도 추궁되어야 한다. 자기네 지식인 집단이 알아주는 외국통이므로, 같은 외국통(해당국가에서)끼리 연대의 정신을 발휘하는 거다.

 

왕조시대의 유럽귀족들은 그냥 귀족이 아니다. 외국 왕가와 연계되어 있었다. 프랑스 귀족이라면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독일, 러시아 왕가와 결혼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왜 귀족은 특권을 가지는가? 귀족이 전쟁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독일이 침략해오면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와 동맹해야 한다. 해당국가와 라인이 있어야 한다. 해당국가 왕가와 혈연으로 연계된 귀족이 나서준다. 그런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귀족계급이 존재했다.

 

지금도 비슷하다. 먹물들의 특권의식은 자기네들이 외국의 지식집단과 연계되어 있으며, 그것이 때로 쓸모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데서 생겨난다. 그 사대주의, 노예근성 역시 비판되어야 한다.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문제가 아니다. 차별과 특권이 본질이다. 그 심리의 안쪽에 도사린 컴플렉스가 문제다. 애국주의가 문제라면 정운천의 무분별한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는 왜 했는가?

 

왜 한국인들은 여전히 ‘값싸고 질좋다’는 미국 쇠고기 놔두고 비싼 한우를 먹는가? 정녕 정운천은 13덩이의 에이미트 미국 쇠고기로 260만두의 한국 쇠고기를 때려잡은 영웅 이순신인가?

 

저질 조폭영화나 양산하게 하는 스크린쿼터제는 왜 찬성하는가? FTA는 왜 반대하는가? 서유럽 국적 외국인의 특권이 깨질때 자기네 먹물의 특권도 깨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안다. 부당한 특권을 지키려는 얄팍한 계산에 불과하다.

 

근세 100여년 간 식민지, 전쟁, 독재에 시달리면서 황폐해진 인문정신이 그들 한국인들에게서 자부심을 앗아갔다. 자부심의 결여에 따른 콤플렉스가 사대주의, 노예근성을 낳는다. 노예근성이 외국인에 대한 헛된 기대를 낳는다. 그것이 차별과 특권의 변덕스런 이중행동으로 나타난다.

 

헛된 기대가 깨져서 환멸로 바뀔 때, 외국인에 대한 과도한 공격행동으로 나타나는 야만의 악순환이다. 이제는 극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문정신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안의 가치를 재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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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 김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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