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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소진리(小眞理)>>,<<우리 선조들의 정신>>><<< 강금원의 의리>>>

일일 필독문

by 21세기 나의조국 2009. 3. 2. 11:57

본문

 

 

 < 생활 속의 소진리(小眞理)와 대진리(大眞理) >  

 

 

소진리란 수학이나 과학에서처럼 답이 하나인 것을 말한다.
즉, 1+1=2라고 하는 개념이며,
달은 지구의 위성이라는 개념이며,
핵분열을 하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과 같은 개념을 말한다.

 

 

그렇다면 대진리가 무엇인지 짐작하시리라 믿는다.
대진리란 인문학이나 경영학에서처럼 답이 여러 개인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답이 불명확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수학에서는 1+1은 반드시 2가 되어야 하지만
경영학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한 개인과 다른 개인이 협력하여 일을 하였을 때,
반드시 두 사람의 효과가 나온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두 사람의 능력이 결합하여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발휘하여
세 사람 혹은 다섯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역으로 한 사람이 한 것만도 못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경영학은 그렇다 치고,
철학에 이르면 어떻겠는가.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서 이루는 결과가 무엇이뇨? 하고 묻는다면
철학자들은 무궁무진한 답을 토해 낼 것이 아닌가.

 

 

소진리도 진리요, 대진리도 진리다.
둘은 어우러져 공존한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소진리와 대진리, 그 둘의 조화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만들어내는 무지한 사람들의 오류가 큼을 보며 하는 말이다.


 

그것이 무모함이요
그로 인해 고집과 아집과 독설과 강요가 난무하니 하는 말이다.

 


인간 개개인은
누구나 어떤 사안에 대하여 확신적 신념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이 지식과 학식에 바탕 할수록 그 주장은 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함에 있어
 '넌 틀렸어’라는 전제를 먼저 던지는 부류의 인간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 말을 사용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논리든 서두에 그런류의 전제부터 까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대화의 끝은 대부분 저렴하고 무익하고 허무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곤하다.


 

 

포장마차에서 한 잔의 소주를 마시며
 '난 소주가 달아..’ 하고 미소지었을 때,
‘넌 틀렸어. 소주는 원래가 쓴 맛이야’라고 말하는 인간을
친구로 두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냐, 짜식 오늘 좋은 일 있구나.
난 근데 오늘 졸라게 쓰다’ 하면서
한 입에 탁 털어 넣는 친구가 옆에 있으면 술 맛 난다.

 

 

살아가며 매사 여기저기 피곤하게 부딪치는 그런 아이가 되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소진리와 대진리에 대해 잘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다 싶다.

그게 가정교육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어떻게 교감을 나누는 것이
바르게 사는 법인지 알게 되는 것이
가장 큰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해보자.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 서프라이즈에서 펌 -

 

  

 

 

< 우리 선조들의 정신 >

 

 

동양정신의 정수는 '중도'에 있다. 문제는 중도와 중간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도를 중간으로 잘못 알고 있다. 역사는 흐른다. 흐르는 것, 움직이는 것에 있어서 중도는 결코 중간이 아니다.

 

 

운동의 중심, 힘의 중심, 변화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항상 부피의 중간에서 앞쪽 3보 위치에서 무게중심인 그것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국민의 중간에 중도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의 중간에 중도의 길이 있다. 아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중간에도 중도는 없다. 진정한 중도는 새로운 세력, 젊은 세력,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의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공자형님의 중용을 찾기 위해서는, 또 석가형님의 중도를 찾기 위해서는 군중의 중간, 무리의 중간이 아니라, 전투기의 조종석이 맨 앞에 있듯이, 자동차의 운전석이 항상 전방에 있듯이.. 변화하는 것의 중심은 중간이 아니라 나아가는 방향  앞쪽 3보 위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서구의 합리주의 전통, 마르크스의 찌꺼기 논리가 중용을 표방하고 있는 공자형님, 중도를 표방하고 있는 석가형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앞의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서프라이즈에서 -

 

 

 

 

 < 강금원의 의리, 장세동의 의리 > 

 

 

기업인 강금원이 정치인 노무현에게 끌린 것은 당선이 보장된 종로 지역구를 두고 낙선이 뻔한 부산에서 호남당으로 낙인 찍힌 민주당 후보로 나와서 판판이 깨지면서도 지역주의에 끝까지 맞서는 의기에 감동을 받아서였다. 호남 출신으로 젊어서 부산에 와서 호남에 대한 편견에 시달리면서 기업을 일군 강금원은 왜 그렇게 이명박 정권의 탄압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무현을 돕는 것이냐는 물음에 호남인은 절대로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의리 하면 장세동도 둘째 가라면 서럽다. 전두환의 경호실장을 지낸 장세동은 호남 출신으로 베트남전쟁 때 인연을 맺은 전두환의 심복이다. 경호실장 시절 “각하”의 심기까지 보살피는 “심기 경호실장”을 자부했고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어르신” 대신 무려 네 번이나 감방에 들어갔다. 장세동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나이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욕해도 장세동은 은근히 멋있게 보는 사람이 많은 것도 장세동이 의리파로 보였기 때문이다.

 

 

장세동의 의리는 한국 의리가 아니라 일본 의리다. 목숨을 던져서 주군을 섬기는 일본 사무라이의 의리가 장세동의 의리다. 사무라이 의리의 특징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야붕이 무슨 짓을 했건, 부녀자를 겁탈했건, 사기를 쳤건, 사람을 죽였건, 똘마니는 오야붕에게 무조건 충성한다. 자기 주군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 본연의 임무를 팽개치고 멀쩡한 민주 지도자를 빨갱이로 몰아 사형선고를 내리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들고 일어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해도 장세동은 아무런 심적 갈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머리에 주입된 의리는 가치를 추구하는 추상적 보편적 의리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주인에게 묶인 구체적 즉물적 의리기 때문이다.

 

 

개를 생각하면 된다. 개는 주인이 소년 가장을 등쳐먹은 불량배건 전과 14범이건 보신탕 애호가이건 주인 얼굴만 보면 꼬리를 흔든다. 그리고 소년 가장에게는, 전과 14범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는, 동물보호운동가에게는 열심히 짖어댄다. 개의 머리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력이 없다. 장세동의 의리는 개의 의리다. 짐승의 의리다. 짐승은 절대로 약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강자에게만 붙는다. 오직 사람만이 약자의 편에 설 줄 안다. 이것이 사람의 의리다. 강금원의 의리는 사람의 의리다.

 

 

호남 사람 강금원이 영남 사람 노무현 옆에 끝까지 남기로 결심한 까닭은 그가 노무현을 주군으로 생각해서도 아니고, 노무현한테 무슨 국물을 기대해서도 아니고,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인간성에 끌려서만도 아니다. 강금원이 세무조사를 포함하여 기업가로서 당해야 하는 유형무형의 온갖 시련을 감수하면서, 퇴임 이후에도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한테 마구 헐뜯기는 노무현을 끝까지 감싸는 것은 인간 노무현과 공유하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금원과 노무현이 공유하는 가치는 약자의 편에서는 정의감이다.

 

 

노무현은 왜 떨어질 줄 알면서도 끝까지 부산을 떠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멀리는 임진왜란부터 가까이는 동학운동과 광주항쟁까지 이 나라의 등뼈 역할을 하면서 가시밭길을 걸었던 호남을 고립시키려는 지역주의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기득권을 쥔 강자 영남의 호남 매도 논리를 거부하고 약자 호남의 편에 섰다. 강금원을 울린 것은 약자의 편에 서는 노무현의 의리였다. 그리고 강금원이 마치 종소리만 들렸다 하면 배가 고프건 부르건 무조건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노무현한테 조금이라도 불리한 이야기가 나돌면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수구와 진보가 한통속이 되어 다짜고짜 따귀부터 갈겨대는 한국의 미친 언론한테 허허벌판에서 속절없이 당하는 노무현의 곁을 끝까지 지키기로 결심한 것도 약자의 편에 설 줄 아는 의리가 강금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세동과 전두환이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둘 다 군인의 길을 걷다가 베트남전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장세동은 전두환의 앙숙인 노태우의 심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 죽이기에 앞장섰을지도 모른다. 짐승의 의리는 이렇게 우연에 휘둘린다.

 

 

강금원과 노무현의 의리는 우연이 아니다. 둘 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필연에 가깝다. 돈벌이밖에 모르던 장사꾼 강금원이 정치인 노무현과 만난 것은 두 사람 모두 약자의 고통에 분노하는 인간의 의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만든 영일사전의 영향을 워낙 많이 받아 요즘 영한사전에는 justice가 "정의"로만 나오지만 1890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조선인과 함께 만든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에는 justice의 풀이로 “의리”와 “공도”가 먼저 나온다.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의 입에서 가장 자주 튀어나오는 말이 바로 의리와 공도였다.

 

 

조선 의리는 사람의 길이었고 일본 의리는 짐승의 길이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먹힌 것처럼 조선 의리도 일본 의리한테 먹혔다. 약자의 편에 설 줄 아는 조선 의리를 가진 강금원과 노무현이 가시밭길을 걷는 것도 강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식민지 근성이 골수에 박힌 세력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법조계, 정계, 관계, 학계, 언론계에서 일본보다 더 지독한 패거리 의식과 일본 의리로 자기들만의 철옹성을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일본 의리는 우연의 의리지만 조선 의리는 필연의 의리다. 장세동과 전두환은 안 만날 수도 있었지만 강금원과 노무현은 “공도”가 있는 한 만날 수밖에 없었다. 강자한테만 붙는 짐승이 아니라 약자의 아픔에 분노하는 사람으로 살려는 사람은 반드시 “공도”에서 만난다. 장세동의 의리는 “나”의 의리고 강금원의 의리는 “우리”의 의리다. 장세동의 의리는 “나” 하나로 끝나지만, 강금원의 의리는 “우리”를 자꾸 만들어낸다. “나”는 “우리”를 못 꺾는다.

 

 


(서프라이즈 / 개곰 / 200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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