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과 올해 전기, 가스 등 공공요금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또 다시 재정건전성이 도마에 올랐다. 한쪽은 "재정건전성이 중요하니 국가부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고물가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 말이 맞을까? 아니면 두 개의 상반된 주장 사이 어디쯤에 정답이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재정건전성 논쟁은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재정건전성 논쟁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정답은 "지금까지 이런 논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재정건전성은 영어 'financial soundness'의 번역어다. 그런데 이는 OECD 등 다른 나라에서는 논의조차 되지 않는 개념이다. 최근에는 재정건전성보다 '재정의 지속가능성'(financial sustainability)을 논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정건전성은 부채가 적고 재정수지*1)(하단설명참조)가 흑자일수록 좋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재정의 건강 상태 유지에 관심을 둔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지금 당장 빚을 져서라도 필요한 투자를 하면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즉, 단기적인 재정건전성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중장기적인 재정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당장의 재정건전성을 위해서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중장기적인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하락한다. 이는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다.
부채가 적을수록 좋다?
국가 부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부채는 적을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부채는 적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할수록 좋다. 2022년 기준 삼성전자는 115조 원이 넘는 돈을 가지고 있다.*2)그럼에도 94조 원의 부채를 유지하고 있다. 10조 원의 매입채무*3)는 물론 5000억 원의 사채까지도 아직 존재한다.
현금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빚을 져서 물건을 사고 사채도 안 갚고 있을까? 삼성전자의 재정 목표는 '가장 적은 부채비율 달성'이 아니다. '가장 적절한 부채비율 유지'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가장 적절한 부채비율을 유지할수록 좋다. OECD 국가 GDP 대비 부채비율 평균은 120%가 넘는다. 부채비율이 적을수록 좋다면 이 국가들이 모두 잘못된 행정을 한다고 평가해야 한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럼 가장 적절한 부채비율이 얼마일까? GDP 대비 50%일까? 100%일까? 불행히도 '알 수 없다'가 정답이다. 하버드대 로고프 교수는 적절한 부채비율을 제시한 적이 있지만, 기초적인 에러가 발견되어 큰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전 세계 어떠한 재정 전문가도 적절한 부채비율을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유독 대한민국 언론과 정치인들은 '적절한 부채비율을 안다'고 주장하고는 한다. 현재 한국 부채비율이 50%로 너무 높다는 말은, 곧 현재 적절한 부채비율이 50% 이하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의 가장 적절한 부채비율이 40%인지 60%인지 알지 못한다. 만약 가장 적절한 부채비율이 40%라면, 현재 부채비율을 50%에서 더 낮춰야 한다. 그러나 적절한 부채비율이 60%라면 반대로 부채비율을 높일 필요가 있다.
부채비율을 높이면 빚을 더 많이 져야 하는건데, 이게 왜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일까? 물론 부채를 통해 조달한 자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허비한다면 당연히 부채는 낮을수록 좋다. 그러나 국가가 부채를 통해서 조달한 자금은 경제성장을 높이고 사회 후생을 높이는 데 쓰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채 조달 비용보다 이를 통해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후생이 더 크다면 부채를 더 조달하는 것이 이익이다.
사례로 내가 A은행에서 4%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고 B금고에서는 5% 이자를 주는 예금상품에 가입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A은행에서 얼마를 빌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 정답은 다다익선이다. 그러나 내가 지나치게 돈을 많이 빌리려고 하면 A은행은 나의 대출금리를 높일 것이다. 또한 내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예금하려고 하면 B금고는 나의 예금금리를 낮추게 된다. 결국 이론적으로는 대출금리와 예금금리가 같아질 때까지 돈을 빌리는 것이 가장 좋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국채 이자를 지불하고 이를 사회에 투자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완벽한 '포트폴리오 투자'*4)를 한다면 명목성장률*5)정도의 이익을 얻게 된다.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우리나라 명목성장률이 국채이자율보다 낮았던 해는 단 두 해밖에 없다. 이는 지난 20년간 국채발행이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발행했다는 방증일 수 있다.
국채 투자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국채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여유 재원을 금고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투자할 것이다. 안전자산인 국채에 투자하는 대신 다른 안전자산인 토지·건물 등 부동산에 주로 투자하지 않을까? 국채는 국가입장에선 채무지만 투자자에게는 자산이다. 그리고 국채 투자자의 80% 이상은 내국인이다. 국가가 국채라는 자산을 공급해주면 투자자는 안정적 이자 수입을 얻고 더 많은 소비를 창출할 수 있다. 최소한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국가경제에 더 효율적일 것이다.
국고채는 한국 전체 채권시장에서 약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최대 공급원이다. 국채가 없으면 채권시장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울 지경이다. 즉, 국가부채는 적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적절할수록 좋다는 점을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지속가능한 '적절한' 부채를 이야기하자
끝으로 국가의 부채비율을 낮췄을 때 어떤 부작용이 발생하는지도 파악해 보자. '매크로 레버리지(macro leverage)'라는 개념이 있다. 정부부채·가계부채·기업부채를 통틀어서 매크로 레버리지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부채·가계부채·기업부채는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가 낮아지면 다른 두 개의 부채는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즉, 정부부채를 낮추려고 하면 가계부채나 기업부채가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가계부채를 낮추려고 하면 정부부채나 기업부채가 높아진다.
현재 한국 매크로 레버리지 상황을 다른 OECD 국가와 비교해보면, 정부부채 비율은 가장 낮은 반면 가계부채는 가장 높고 기업부채는 약간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부채를 낮춘다면 가뜩이나 높은 가계부채 문제가 악화할 수 있다.
재정정책은 균형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부채가 높아지면 부작용이 생기지만, 국가부채가 낮아져도 부작용은 발생한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부채 비율은 낮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적절할수록 좋다. 문제는 가장 적절한 비율이 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도 적절한 부채비율을 알 수 없다면, 국민적 합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질문은 "적절한 부채비율을 구합시다"여야 한다. 즉,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낮은 부채비율을 이룩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건 잘못된 질문이다. 재정건전성이 목표가 되면 안 된다.
한국은 이미 저출생·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 맞춰 지속가능한 부채비율을 유지해야 한다. 저출생·고령화 사회를 대비하는 데 있어 부채비율이 너무 높으면 재원을 마련할 수 없고, 반대는 부채비율이 너무 낮아 사회투자를 하지 못해도 적절히 대비할 수 없다.
우리는 후손에게 빚과 동시에 자산도 물려준다. '0원의 빚과 0원의 자산'보다 '10억 원의 빚과 20억 원의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재정건전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미래의 재정 지속가능성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
1) 정부의 세입과 세출 간 차이 2) 현금 및 현금성 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을 합친 액수다 3) 원재료의 구입 등 일반적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외상매입금과 지급어음 4) 다양한 투자 대상에 분산하여 자금을 투입·운용하는 일 5)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의 합
덧붙이는 글 |글 이상민 조세재정개혁센터 실행위원,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3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