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안전은 국가의 무한 책임입니다. 국민들께서 안심하실 때까지 끝까지 챙기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2022년 8월17일)에서 한 약속은 깨졌다. 10월29일 밤 서울 한복판에서 156명이 압사한 이태원 참사는 윤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참사 전후 국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경찰청장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은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했다. 대통령은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매일 찾아 추도했다.
국민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6개월을 이렇게 맞았다. 고물가, 고금리, 공급망 불안 등 경제위기, 북한 미사일 발사 시험 등 안보위기에 이어 많은 사람이 서울 도심에서 목숨을 잃는 안전위기까지 겪었다.
국민의 실망감은 여론조사 결과에 그대로 투영됐다. 코리아리서치가 문화방송(MBC) 의뢰로 11월7~8일 전국 성인 1001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윤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는 33.4%, 부정평가는 59.7%였다. 긍정평가는 한국방송(KBS) 조사(11월6~8일, 전국 성인 1천 명, 한국리서치)에선 30.1%였고, 에스비에스(SBS)는 28.7%(11월7~8일, 전국 성인 1006명, 넥스트리서치)였다.
30% 전후의 긍정평가는 역대 대통령(1년차 2분기 기준) 가운데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나쁜 성적표다.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83%)이고, 김대중 전 대통령(62%)도 높았다. 빠르고 과감한 개혁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 덕분에 국민의 지지를 모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도 75%로 높았다.(전국 성인 1001명 갤럽 조사, 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윤석열 정부 6개월을 대통령과 집권세력, 경제, 안보 등 분야별로 나눠 분석했다. 윤석열 정부와 함께 여당인 국민의힘의 난맥상도 짚었다. _편집자주
“경제는 대통령이 살리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22년 3월7일 선거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경쟁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유능한 경제 대통령’ 슬로건을 내세우자 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기업과 민간이 정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돈도 많이 있고 훨씬 머리도 좋고 똑똑하다. 지금은 대통령이나 정부가 그저 멍청한 짓 안 하고 정직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주도하기보다는 민간경제가 활성화하도록 잘 뒷받침하겠다는 취지다.
11월10일, 윤석열 정부 출범 6개월이 됐다. 정부는 그동안 ‘멍청한 짓’ 하지 않고 잘해왔을까. 국민이 내린 평가는 그렇지 못하다. 한국갤럽의 11월 첫째 주 조사를 보면, 분야별 정책 평가에서 경제부문 긍정평가 비중이 21%였다. 윤 대통령 직무수행 전반에 대한 긍정평가(29%)보다 낮았다. 경제개혁연구소가 10월13일 발표한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 결과’에서도 정부의 경제정책 점수(A~F학점)를 매겨달라고 했더니 F학점을 준 응답자가 46.8%에 이르렀다. 긍정평가한 응답자(A·B학점)는 28.7%였다.
이런 박한 평가에 윤 대통령은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시기는 세계적으로 긴축이 진행되면서 경기가 가라앉는 국면이었고, 국제 정세 불안으로 에너지·곡물 가격이 치솟아 고물가·고금리의 고통이 가중됐다. 윤 대통령은 경기침체의 상당 부분이 한국이 통제할 수 없는 대외 요인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경제는 대통령이 살리는 게 아니라지만 그래도 윤 대통령은 지난 6개월간 나름대로 경제를 챙기는 모습을 보이려는 듯이 ‘비상경제민생회의’를 11차례 주재했다. 물가상승률이 2022년 들어 가장 높았던 7월에 연 첫 회의에서 “지금은 비상상황이다”라고 말하며 취약계층의 생계비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이후에는 소상공인이나 청년 대출 이자 감면 등 민생 대책과 바이오·인공지능 산업 육성 계획 등을 간간이 내놨다.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지자 10월27일 개최한 11번째 회의는 이례적으로 생중계했다. 각 부처가 열심히 일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취지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국민이 느끼는 경제고통이나 위기의식에 견줘 관료들의 인식은 절실하지 않아 보인다는 평가가 나왔다. 회의에서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금융시장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고 경기둔화 우려도 커지는 복합위기에 직면했다”고 분위기를 잡았지만 정작 주요 내용은 2차전지, 원전, 방위산업, 해외건설 등 주력 산업의 수출 확대 전략이 강조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흘렀다. 윤 대통령도 “전 부처가 산업부라는 생각으로 산업 증진과 수출 촉진에 매진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인 고물가·고금리 대책, 금융시장 불안 해소 방안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고물가와 경기침체를 돌파하려면 (고통 분담을 위해) 국민을 설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공공기관이 먼저 개혁해야 한다. 하지만 현 경제팀은 관료 중심으로 구성돼 그냥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치중한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정책 의지를 현실에 맞춰 실현해야 하는데 같은 철학을 공유하더라도 좀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들어와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부는 최근 부동산 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한 “과감하고 센 처방”이라며 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 부동산 규제 지역 추가 해제 등도 발표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금리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서영수 키움증권 이사는 11월2일 낸 ‘부동산 및 금융시장 동향’ 보고서에서 “최근 아파트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매매가격이 급락하는 것은 금리상승에 따른 과다 채무 주택보유자의 주택 매도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매수자 역시 신규 대출금리가 상승해 매수 여력이 낮아져 신규 매수 수요가 늘어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최근 금융시장 불안을 야기한 사건이 잇따라 벌어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보여준 대응 역량도 아쉽다. 레고랜드발 채권시장 경색 사태는 9월28일 강원도가 레고랜드 운영기업(강원중도개발공사)을 회생 신청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촉발됐다. 강원도가 강원중도개발공사 부채 2050억원의 보증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를 낳으면서 채권시장이 불안해졌다. 국채만큼 안전하다고 여긴 지방채도 믿지 못하게 되자 일반 회사채 투자 수요가 줄었고 회사채 금리는 급격히 올랐다. 정부는 개입을 꺼리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0월27일에야 50조원 자금을 공급해 회사채 등을 매입하면서 시장 안정화에 나섰다.
흥국생명의 채권 상환 연기 또한 금융당국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사안이다. 채권금리가 빠르게 치솟아 자금조달 비용이 크게 늘어난 흥국생명이 5억달러 규모의 국외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일(11월9일)을 앞두고 상환을 연기하겠다고 11월1일 발표했다. 채권의 일종인 신종자본증권은 만기(30년)가 돌아오면 자동 연장되는 영구채이지만 시장에서 관행적으로 발행 5년이 되면 신종자본증권 발행 기업이 채권 투자자에게 원금을 돌려줘왔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만기 5년’짜리 채권으로 인식해왔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5년 전 발행한 이 신종자본증권을 조기상환하고 새로 발행하려니 조달비용이 크게 뛰어 조기상환을 연기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결정이 알려지자 국내 회사가 발행하는 외화 표시 채권 가격이 급락하는 등 국내 회사 발행 채권의 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됐다. 금융위원회의 개입으로 흥국생명은 애초 방침을 철회하고 결국 11월9일에 조기상환했다.
문제는 레고랜드 사태를 겪은 금융위원회가 흥국생명의 조기상환 연기 방침을 알고 있었지만 괜찮을 거라 판단한 점이다. 11월8일 국정감사에서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전에 조치할 수 있었던 시점이 있었을 텐데 금융당국은 대응능력이 없다고만 한다. 이 사안에 대해 이해력과 대처를 종합적으로 가졌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정부가 더 일찍 개입할 수도 있으나 그에 따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언제 어디에서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응이 늦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고 해명했다.
지난 6개월간 보여준 윤석열 대통령과 정책 담당자들의 굼뜬 행보는 정부가 과연 앞으로의 경제위기에 잘 대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키운다. 2022년보다 2023년은 더 험난한 고난길이 예상된다. 먼저 금리인상의 정점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11월2일(현지시각)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기준금리를 연 3.25%에서 4%로 0.75%포인트 올렸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금리인상 속도보다는 최종 금리 수준과 지속 기간이 중요하며, 이전 예상보다 최종 금리 수준은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FOMC 위원들이 예상하는 최종 금리 수준은 기존 4.5~4.75%에서 5% 수준으로 상향 조정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우리나라도 현재 연 3%인 기준금리가 2023년 4%에 이를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전세자금대출은 최고 금리가 7%를 넘어섰는데, 2023년 상반기에는 9%대 진입도 점쳐진다.
전문가들은 고금리에 가장 먼저 휘청대는 분야로 부동산 시장과 기업의 자금조달 시장을 지목한다. 지난 수년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증권사 등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부동산금융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는데 부동산 시장이 꺼지면서 부실이 터질 수 있다. 특히 프로젝트파이낸싱은 건설사업의 장래성을 보고 자금을 지원하는 형태이기에 수익이 나지 않으면 고스란히 부실로 이어지는 구조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22년 9월 말 기준 국내 비은행권 부동산 그림자금융(부동산 관련 대출·보증·금융상품 등) 규모는 842조3천억원이다. 2018년 말과 비교하면 4년 만에 87.3% 증가했다. 특히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이 같은 기간 104.8% 늘었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1월8일 ‘2022년 금융동향과 2023년 전망 세미나’에서 “상업용 부동산은 주택에 비해 차입 비율이 높은데다 경기변동에 따른 가격변동폭이 크고, 가격 하락시 자금회수가 어렵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며 “업황 침체시 사업장 부실로 인한 연쇄부도, 간접투자상품의 경우 환매 요구 증가, 만기 도래시 차환 실패 등의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금조달 시장의 불안으로 대기업이 은행 대출로 몰리는 상황도 우려를 키운다. 대기업에 밀려 중소기업이 대출받기 어려워지면 부도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급한 불 끄기에 골몰하느라 출범 초기에 제시해야 할 비전이 나오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정환 한양대 교수(경제금융학)는 “고물가에 대응해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건 복지정책으로서 필요하지만 그 외 중장기적인 전략도 필요하다. 에너지 문제에 대응해 ‘재생에너지 100%’(Re100) 정책이나 인구문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정권 초기에 국민이 정부에 바라는 게 미시 대응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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