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윤 대통령의 이번 해외순방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으려 했다. 이미 5개월째 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충분히 차고 넘치고 있었기에 조금은 참고 견디며 이해해 보려 했다.
조문외교를 떠나서 조문을 못했다고 했어도, 그 이유가 갑작스러운 교통통제 때문이라고 했어도 비판하지 않으려 했다. 김은혜 홍보수석이 영국 왕실 대우를 증명하기 위해 대통령이 조문은 못 갔지만, 영국 왕실에선 컨보이 4대를 붙여줬다는 자기모순적인 설명을 했을 때, 잠깐 아찔했지만 또 한 번 잘 참았다.
하지만 27일 윤 대통령이 "바이든은 말한 적 없고, 이 XX 발언은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국민일보>의 단독 기사를 본 순간 나의 인내심은 임계치를 넘었다.
윤 대통령 해명 듣고 떠오른 27년 전 기억
나는 1996년 한국에서 미국 플로리다로 이사를 가서 백인들이 대다수인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 도서관에서 한국 관련 책을 찾아봤더니, 딱 한 권이 나왔는데, 한국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매우 충격이었다. 내가 사는 당시의 서울은 한국 전쟁의 처참함은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5살짜리 백인 꼬마 아이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한국에는 TV가 있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1996년에도 한국은 외국인들에게 그저 한국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뿐이구나'라는 생각에 어린 마음에 자존심도 꽤 상했다.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쓰리고 씁쓸한 나날들을 오롯이 견뎌냈다. 견디며 나아갔고, 나아가서 이루었고, 이루어낸 것들의 결과가 이제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로 흘러넘친다.
최근 우리 대한민국은 모두가 인정하는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고, 뉴욕, 파리, 런던 같은 세계적인 도시들에서는 한국 가수들에게 열광하며, 고약한 냄새라고 서양인들에게 멸시받던 김치는 어느새 세계인들이 찾아 먹는 자랑스러운 음식이 되었다.
업무상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나는 이렇게 변화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피부로 짙게 느낀다. 외국 입국심사대에서 나의 여권을 보며 "You're from Korea"라고 할 때 그들의 미묘하지만 확실한 호감의 뉘앙스가 나를 괜히 더 당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나는 다시 1996년 플로리다 백인 학교의 한 구석에서 주눅 들고 마음 쓰린 한국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참담하고 부끄럽다.
대통령은 스스로 무너뜨린 격을 쌓으려고 온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정확히 어떤 말이었는지 모른다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변명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보와 언어의 공유가 놀랍도록 빠르고 자유로운 이 시대에 해외에서는 이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생각하면 다음 출장길이 왠지 낯 뜨거워진다.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
대통령의 측근들과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시시각각 말장난 같은 방어를 일관성도 없이 하고 있지만, 그조차 권력에 밉보이지 않으려는 애달픈 노력이려니, 속으론 자괴감이 들겠지 이해해 보기도 한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주변에선 그럴 수 있다. 그들이 한 말도 아니니 어쩌겠는가.
윤 대통령 본인이 순방에서 돌아와 첫 출근을 한 지난 26일 출근길 문답에서 스스로 매듭지었어야 했다. 분명 기회가 있었다. '형님 리더십이 있다'는 일부의 평처럼 형님의 큰 배짱과 쿨함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후 국민들의 눈과 귀를 민생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너졌고 대통령은 이슈의 초점을 언론으로, 진상 조사로 가져갔다.
취임 5개월째… 수많은 이슈들로 대한민국 정부의 위상이 최근 코스피처럼 급락하고 있지만, 그 어떤 이슈에도 윤 대통령이 사과를 하거나 유감을 표한 적은 거의 보지 못했다.
국민은 사과를 바라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조사와 수사를 이야기한다. 또 국민이 영상을 보고 들었다고 하고 있음에도 그와 그를 보좌하는 이들은 그 영상의 배포자를 조사하고 음성의 과학적 분석 결과로 증명하라고 한다. 국민과 언론 그리고 야당을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피고인의 변호사와 싸우는 검사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는 듯하다.
모두가 보고 들은 자신의 실수도 인정하지 않는 리더에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XX'의 저열함과 '바이든'이 '날리면'이 되는 쪽팔림을 넘어, 자신의 언행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그 비겁함이 "You're from Korea"의 뉘앙스를 미묘하게 부정적으로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사람은 모두 실수를 한다. 대통령도 사람이니 당연히 실수를 할 수 있다. 실수를 했으면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 된다. 그것이 가장 상수(上數)다. 실수를 하고 사과를 안 하는 것은 뻔뻔함이고, 그 실수를 인정조차 안 하는 것은 비겁함이며, 그 실수가 진정 실수인지 밝혀보라고 되려 화를 내는 것은 최악의 악수(惡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