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4.21 08:00
[MT리포트] 안전하지 않은 엔화?(上)
日경제 '막다른 골목'으로? 왜 이번엔 '나쁜 엔저'라고 하나일본 재무성은 20일 2021년 회계연도(2020년 4월~2021년 3월) 무역수지가 5조3748억엔(51조6115억원)이라는 큰 폭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7년 만에 최대폭이자 역대 4번째로 나쁜 적자의 배경으로 꼽히는 것은 엔화 약세.
이날 일본 외환시장에서 장중 1달러는 129.38엔에 거래됐다. 이는 20년여 만의 최저 수준이다. 반세기 만에 14일 연속 하락하며 기록적인 엔저 현상이 심화하는 것이다. 한때 '아베노믹스' 등 일본 정부의 경기 부양책의 일환으로 의도되기도 한 엔저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다르다.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나쁜 엔저'라는 지적에 정치권에서도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나홀로 금리인하'가 엔화 추락의 근본 원인이라는 건 다들 알지만, 일본은행이 금융완화 정책을 돌리기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2002년 1월의 135엔까지 환율이 오르는 것(엔화 약세)은 시간문제라는 말이 나오고, 내년 3월엔 150엔이라는 초유의 전망마저 나오는 이유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긴축정책으로 장기금리가 오르는 사이 일본 금리상승은 억제되면서 양국 간 금리 격차가 커지면서 엔 매도는 더욱 가속화했다.
예전 같으면 수출기업들이 엔저를 바탕으로(제품가 하락) 상품을 더 팔아 외화를 번 뒤 이를 엔화로 바꿔 엔화 가치를 떠받쳤겠지만, 이런 흐름도 약해졌다. 일본 제조업이 생산거점을 대거 해외로 옮긴 탓이다. 일본기업의 해외생산 비율은 2002년도 17.1%였지만, 2019년도는 23.4%로 확대됐다. 기업들은 벌어들인 돈을 해외에서 재투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엔저 상황을 일본 경제가 적극 활용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다이와증권이 주요 상장 20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달러 대비 1엔 가치 하락시 경상이익의 상승 효과는 2022년 현재 0.43%로 2009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엔화가 약해지면서 무역 적자뿐 아니라 경상수지(무역수지+서비스수지+제1차소득수지+제2차소득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그간 해외 자산의 배당·이자 소득이 무역 부진을 상쇄했는데 이것도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경상수지가 연간 적자로 돌아서면 이는 1980년 이후 42년 만이다.
일본 내 임금상승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가운데 원재료 수입가격이 오르며 서민 물가도 비명을 지르고 있다. 스즈키 준이치 일본 재무상은 지난 15일 기자회견에서 "임금 인상이 불충분한 상황에서 엔화 가치 하락은 '나쁜 엔저'"라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일본은행이 완화 노선을 수정하기는 만만찮다. 완화책에도 임금인상 및 이로 인한 내수 증가와 물가 상승이라는 선순환이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긴축으로 정책 기조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3년 0.9%였던 GDP(국내총생산) 잠재 성장률은 코로나 전인 2019년 0.4%로 하락했고 2021년에도 0.5% 늘어나는 데 그쳤다.
정부가 엔을 매수하며 환 개입에 나설 가능성도 낮다. 미국의 금리인상, 수출 기업들의 해외진출 등 구조적으로 엔 약세 압력이 강해 효과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못 대응했다간 오히려 막대한 국가부채로 인한 재정부담이 커질 수 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인 257%로 미국(133%)과 영국(108%)의 두 배가 넘는다. 기준 금리가 인상되면 국채발행 분에 대한 원리금 상환 부담이 막중해진다.
이날 일본은행은 지정한 이율로 국채를 무제한으로 매입하는 공개 시장 조작에 나섰다. 일본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0.25%까지 올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0.25%의 이율로 신발행 10년물 국채를 매입해 시중에 통화를 풀고 금리상승을 억제한다. 급속하게 엔화 환율 상승이 진행되고 있지만 변함없는 완화 기조에 방점을 둔 것이다.
아베가 남긴 '엔저 고집'…日 '잃어버린 40년' 부르나
최근의 엔저가 주목받는 이유는 일본 경제 위기 때마다 만능키로 쓰였던 '엔화 약세' 카드가 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우크라이나 사태 등을 고려하지 않은 일본은행(BOJ)의 '엔저' 고집으로 경제회복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거란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일본은 1990년 버블(거품) 경제 붕괴 이후 디플레이션(물가하락)의 늪에서 빠져나오고자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끊임없이 펼쳐왔다. 시장 내 엔화 유통규모를 늘러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춰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유발시키면, 경제가 되살아난다는 논리였다.
일본은 2000년 이후부터 경기둔화 위기를 엔화 약세로 극복해왔고, 그때마다 일본은행(BOJ)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깊게 관여했다. 20일 일본 도쿄외환시장에서 달러·엔 환율은 장중 한 때 129.38엔까지 치솟으며 엔화 가치가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한 것도, 전 세계의 금융긴축 전환 바람에도 금융완화를 유지하겠다는 구로다 총재의 작품으로 '구로다 엔저 3.0'으로 불린다.
구로다 총재가 일본 외환정책에 관여하기 시작한 1999년부터 지금까지 세 차례의 엔저 시기가 있었다.
1차 엔저 시기는 닷컴 버블 붕괴로 인한 금융위기 충격이 절정에 달했던 2002년이다. 당시 일본은 엔화 강세 속 부실채권 처리, 디플레이션 탈피 등에 직면했지만, 재정·금융 정책에 의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엔저가 유력한 처방전으로 부상했고, 이를 당시 재무성 재무관으로 환율정책을 책임지던 구로다가 주도했다.
그는 엔화 약세를 위해 14조엔 투입 등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했다. 그 결과 100~115엔 정도였던 달러·엔 환율은 120엔을 넘어섰고, 135엔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당시 환율이 130엔대를 웃돌며 위험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구로다가 "더이상의 엔화 약세는 없다"며 환율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2차 엔저 시기는 2015년이다. 당시 구로다 총재는 아베 신조 2차 내각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 기조 아래 엔화 약세를 적극 유도했고, 달러·엔 환율은 125엔 후반대까지 올랐다.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대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 중소기업과 가계에도 혜택이 돌아가는 낙수효과로 경기를 활성화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때도 효과는 미미했다. 다만 당시 저유가(WTI 30달러대) 국면 탓에 수입물가 상승 우려 등의 '나쁜 엔저론'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지난 20년간 엔화 약세는 경제에 도움되는 '좋은 엔저'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구로다 엔저 3.0'인 현재는 '나쁜 엔저'로 일본 경기회복에 악재가 될 거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과거와 현재의 경제상황이 다르고, 정부의 장기간 개입으로 엔화 환율이 제기능을 잃었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국제유가는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배럴당 100달러의 고유가에 직면해 있다. 또 팬데믹 이후 수급 불균형으로 전 세계적으로 물가상승 압박이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엔저는 수입물가를 추가로 끌어올려 기업과 가계에 부담을 준다.
실제 고유가와 엔저는 무역 지표를 흔들어놨다. 이날 발표된 2021년 회계연도(2020년 4월~2021년 3월) 무역수지 집계에 따르면 2년 만의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원유 수입액은 거의 배(97.6%)로 뛰었는데, 이번 지표에 전쟁발 고유가 상황이 한 달밖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수입액은 더 늘어 무역적자 규모도 확대될 전망이다.
일본 주요기업은 이미 수입 물가상승을 반영한 가격인상을 예고했다. 도쿄전력홀딩스의 전기요금은 오는 5월 전년 동월 대비 25%, 도쿄가스는 24% 오른다. 패밀리마트, 세븐일레븐 등 편의점 도시락 가격도 최대 15% 인상될 예정이다.
토요타 같은 일본 수출 대기업이 엔저 효과로 번 달러 수익을 엔화로 환산해 실적개선을 이루고 이를 국내 투자로 환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내수 소비가 어느 정도 유지돼야 하는데 소비력이 무너져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