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초 110엔대 초반에 머물던 엔/달러 환율이 2주 만에 120엔 중반으로 가파르게 올랐다. 엔화의 가치가 뚝 떨어졌단 얘기다. 때로는 달러보다 더 안전한 통화로 평가받던 엔화가 왜 갑자기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1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ECOS에 따르면 엔/달러 환율은 이날 전일대비 0.15엔 하락한 121.81엔을 기록했다. 지난해 3월부터 110엔대 초반에 머물던 것과 비교하면 급격한 상승세다. 지난달 10일 달러당 115.85엔에 머물던 엔화 환율은 2주 사이 급등해 지난달 28일에는 달러당 124.02엔을 기록했다. 2015년 8월 이후 6년7개월 만에 최고치다. 엔/달러 환율 상승은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뜻한다.
달러 대비 엔화가치 하락 수준을 주요국 통화와 비교해 보면 세배 이상이다. 키움증권에 따르면 지난달 달러대비 엔화 가치 하락률은 7.7%를 기록했다. 위안화(-1.2%), 스위스프랑(-1.9%), 원화(-2.1%), 유로화(-2.1%), 파운드화(-2.5%)에 비해서도 매우 크다.
이같은 움직임은 그간 안전자산으로 취급받던 엔화의 위치를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엔화는 국내총생산(GDP) 세계 3위(2021년 10월 기준 약 5조1000억달러)에 달하는 경제력과 세계 최대 규모의 대외순자산을 기반으로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돼 왔다. 엔화는 때때로 달러가치가 하락할 때도 강세를 보였었다.
전문가들은 최근 엔저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통화긴축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통화완화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미 연준 주요 인사들은 최근 정책금리 인상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전미실물경제협회(NABE) 연설에서 "노동시장은 매우 강력하고 인플레이션(물가의 지속상승)은 너무 높다"며 "한번 혹은 여러 번의 회의에서 0.25%포인트 이상의 금리인상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정책금리를 0.25%포인트 올린 이후 추가적인 금리인상을 시사한 발언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부터 선제적으로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해 3차례(지난해 8월, 11월, 올해 1월)에 걸쳐 금리를 올렸다. 한은 기준금리는 1.25%로 코로나19(COVID-19) 팬데믹(대유행) 직전의 금리까지 올라왔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10일 통화정책 회의에서 정책금리를 올리지는 않았으나 자산매입프로그램 종료시기를 오는 3분기로 앞당기는 등 긴축 행보를 보였다.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반면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18일 정책금리를 -0.1%로 동결하고 10년 만기 국채금리 목표치를 0% 내외로 유지한다고 밝혔다. ETF(상장지수펀드) 연간 매입 상한선도 12조엔(약 119조원)으로 유지한다고 했다. 주요국 중 거의 유일하게 양적완화 정책을 고수하는 것이다.
일본의 이같은 행보는 미일간 금리차를 벌려 엔화가치를 떨어트리는 원인이 된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자율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는 게 수익율이 높기 때문이다. 또 미일 금리차로 나타난 최근 엔화 약세는 기존에 일본 금융시장에 들어와 있던 자금마저 유출시킬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오를 때는 엔화 자산보다는 달러 자산에 투자하는게 수익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보면 일본은행의 정책기조가 한동안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 2월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대비 7.9%를 기록했다. 독일(5.1%)과 한국(3.7%), 프랑스(3.6%) 등도 매우 높았다. 영국은 지난 1월 물가상승률이 4.8%를 기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로 천연가스 등 원자재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지난 2월 0.9%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지난 1월에는 0.5%였다. 물가 목표인 2%보다 절반이하 수준이다. 세계경제가 인플레이션에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은 여전히 저물가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무역수지 적자도 엔화 약세에 한 몫 거들고 있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 무역수지는 지난 2월 6697억엔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1월 적자폭은 2조1994억엔이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숨고르기를 할 수 있지만 달러당 135엔까지도 열어 놓고 있다"며 "미국 채권금리 오름세가 강해지면 (엔/달러 환율이) 좀 더 오를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엔저로 한국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엔화약세가 계속되면 달러 기준으로 일본 상품이 저렴해지는 효과가 나타나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철강과 자동차 등 한국이 일본과 경합하는 산업에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으나 수출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 분석했다.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이미 줄어든데다 생산처도 해외로 분산됐기 때문이다.
김 연구원은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수출이 불리해질 수 있는 부분은 있다"면서도 "예전보다는 환율과 수출간 상관관계가 약화됐고 한국의 비가격적 경쟁력이 강화됐으며 경합도 높은 산업들의 해외생산기지가 많아져 완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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