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한국만 보인다. 최근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놓고 나오는 말이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른바 '국뽕'(국수주의)을 덜어내고 봐도 국제무대에서 한국산 콘텐츠가 주목받는 건 흔한 일이 됐다. '오징어 게임'에 이어 '지옥'이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전 세계 드라마 1위에 올랐다.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는 '이방인'에서 '단골'이 된 지 오래고, BTS를 비롯해 K-팝 가수들이 빌보드차트에 오르내리는 일은 더는 '뉴스'가 되지 않는다. 플랫폼에 올라탄 웹툰은 세계 무대로 뻗어나가고 있다.
시계를 20여년 전으로 돌리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둘러싸고 문화 잠식 우려가 쏟아지던 시기다. 방송가에서는 일본 예능을 베낀 프로그램이 공공연한 인기를 끌었고, 일본 따라잡기가 국책 과제처럼 도처에서 진행됐다. 대통령이 직접 일본처럼 게임기를 못 만드냐고 다그치던 게 불과 12년 전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제조업 수출로 급성장했던 한국은 이제 플랫폼과 콘텐츠 양 날개를 달고 소프트파워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전세계 안방 집어삼킨 K-콘텐츠
지난 21일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 순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드라마 1위에 올랐다. 22일에도 2위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앞선 '오징어 게임'은 플랫폼에 올라탄 한국 콘텐츠의 저력을 보여준다. 플랫폼을 경유해 글로벌 시장에서 '자막'이라는 1인치 장벽을 허물자 공개 한 달 만에 전 세계에서 1억4000만 가구 이상의 시청을 기록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중 역대 최대 시청자 수다. 첫 4주간 시청 시간은 총 16억5045만 시간으로 집계된다.
한국의 콘텐츠 파워는 미디어 제국 미국의 안방을 집어삼키고 있다. 문화 자본 잠식을 우려하던 한국이 역으로 세계 시장을 잠식하는 모습도 감지된다.
CJ ENM은 지난 19일 영화 '라라랜드'를 제작한 미국 엔데버 콘텐트(Endeavor Content)를 인수했다고 밝혔다. 약 1조원이 투자된 이번 인수는 CJ가 문화 사업을 시작한 이래 최대 규모 인수합병(M&A)이다. 엔데버 콘텐트는 글로벌 스포츠&엔터테인먼트 그룹이 2017년 설립한 영화·방송을 제작·유통하는 스튜디오로, 세계 19개 국가에 거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각국 대표 방송 채널과 글로벌 OTT로 연결되는 폭넓은 유통망을 갖췄다.
CJ ENM은 이번 인수를 통해 엔데버 콘텐트를 글로벌 거점 삼아 K-콘텐츠 확산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CJ ENM 측은 "전 세계 대중문화 중심인 미국에 글로벌 제작 기지를 마련하고 기획·제작 역량은 물론 전 세계 콘텐츠 유통 네트워크까지 단숨에 확보하게 됨으로써 글로벌 톱 스튜디오로 발돋움할 수 있는 초격차 역량을 갖추게 됐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CJ ENM 강호성 대표는 "미국, 유럽을 거점으로 빠르게 성장 중인 엔데버 콘텐트의 기획·제작 역량과 CJ ENM의 K콘텐츠 제작 노하우, 성공 IP가 결합해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는 동서양 문화권을 포괄하는 초격차 글로벌 메이저 스튜디오로 도약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K-엔터테인먼트·웹툰, 글로벌 시장 휩쓸어
글로벌 문화의 중심에 있는 미국을 거점 삼는 K-콘텐츠 역전 현상이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앞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도 비슷한 인수가 진행됐다. 그룹 BTS를 키운 하이브는 지난 4월 미국 이타카 홀딩스 미디어 그룹 지분 100%를 10억달러(약 1조1870억원)에 인수하며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의 글로벌 아티스트들과 함께하게 됐다.
이후 하이브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기업'에 선정돼 구글, 테슬라, 애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난 7월 한·미·일 거점 중심으로 본사 구조를 정비한 하이브는 국가와 지역간 경계 없는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다.
'방구석 문화'였던 만화도 디지털 플랫폼을 발판 삼아 출판 업계의 불황을 딛고 '웹툰'이란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갔다. 이미 디지털 영역에서는 만화 왕국 일본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카카오의 해외 자회사인 카카오재팬이 운영하는 웹툰 플랫폼 '픽코마'는 6조원이 넘는 전 세계 1위 만화 시장 일본에서 지난해 서비스 개시 4년여 만에 비게임 앱 부문 매출 1위를 기록, 일본 만화 플랫폼 시장에서 점유율 65%를 차지하고 있다. 누적 거래액은 5년 만에 10억달러(약 1조1870억원)를 넘어섰다.
네이버는 '코믹스'의 본고장 북미 시장 공략에 힘을 쏟고 있다. 네이버는 지난 5월 6848억원을 들여 북미 최대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인수했다. 양사 합산 1억6000만명 이상의 이용자를 기반으로 네이버웹툰의 기술력과 사업 노하우를 더해 콘텐츠 사업을 확장한다는 방침이다. 이어 6월에는 자사 웹툰스튜디오와 왓패드스튜디오를 통합한 '왓패드 웹툰 스튜디오'를 설립해 지식재산권(IP)을 바탕으로 한 영상화 사업에 나섰다.
22일에는 왓패드 웹툰 스튜디오 산하 그래픽노블 브랜드 '언스크롤드'를 선보이며, 미국 출판 시장에도 출사표를 던졌다. 네이버웹툰은 현재 미국에서만 1400만명의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를 기록하고 있다.
카카오 역시 북미 시장 진출을 위해 지난 5월 북미 지역 웹툰 플랫폼 '타파스'와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를 1조1000억원을 들여 인수했다.
K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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