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1. 11. 17
세상은 메커니즘이다. 뭐든 메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어릴 때는 메커니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서 A에서 B로, 곧 에서에서 으로으로의 법칙으로 기억해 두었다. 너무 길다. '에서으로'라고 하자.
사람들의 질문과 답변은 자세히 들어보면 죄다 동어반복이다. 왜 말에서 떨어졌니? 낙마해서 그런 거야? 음 그렇구나. 이런 식이다. 왜 교통사고가 났니? 차가 박아서 그런거야. 아하 그렇구나. 대부분 하나마나한 말을 하고 있다. 데이트를 할 때는 상대방이 한 말을 반복해주면 된다는 설도 있다. 그거 좋더라. 그거 좋지. 키가 크더라. 아 키가 크지. 뭔가 대화를 하는 거 같은데 대화가 아니다. 그냥 추임새를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그것도 귀찮아서 그냥 '그러게.'로 때운다고.
사람들은 '왜?' 하고 질문한다. 어원으로 보면 'because'는 꾸짖는다는 뜻이 있다. '왜냐하면'은 영어 번역투 문장이고 우리말로는 '꾸짖자면'이 된다. 꾸짖다는 '꾸+짖다'로 꾸의 반복이다. 질문question의 que-는 쿠오바디스Quovadis의 Quo-와 같은데 우리말로는 '까?'에 해당한다. '까?'를 반복하는게 꾸짖음이다. 한자로는 '고故?'에 해당한다.
그것이 무엇인고故? because는 by+que-인데 '바로+까?'라 하겠다. 까?의 어원은 call인데 원래는 부족민이 위험요소를 포착했을 때 동료에게 알리는 경고의 고함소리였다. 영어의 의문사에 많은 Wh-는 모두 까?que-의 변형이다. 왜 경고의 위험소리를 냈느냐다. 우리말 '왜'는 '까?'의 변형이다. 그 뜻은 왜 나를 호출했느냐다. When, Where, Why, How, Who, Whom, Whose, What에 반복되는 Wh-들 말이다.
원인이 결과를 호출한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부름과 응답으로 이해한다. 부름과 응답이 대칭된다. 원인을 추궁하는 것은 대칭을 추적하는 것이다. A와 B가 한 배를 타고 있다면 그 배가 호출부호다. 배의 이물에 앉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 배가 흔들려 그 요동이 고물에 전달된다. 고물에서 졸고 있던 사람이 깜짝놀라 '까?'를 외친다. 그런 거다. A와 B의 맞물려 돌아가는 메커니즘이다. 찾아야 할 에서으로는 톱니가 맞물려 있음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운 자석실험에서 자석이 쇠붙이에 붙는 이유라는게 자석이 쇠를 당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게 동어반복이다. 질문이 곧 답변이다. 붙는거나 당기는 거나 그게 그거지. 당기는 것은 떼려는 것인데 반대쪽에서 보면 붙이는 것이다. 단순히 말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학교에 간 이유가 뭐냐? 집에서 왔으니까 학교에 간 거지. 아 그렇구나. 집에서 왔으니까 학교로 간 것이구만. 말 되네. 이러고들 나자빠져 있는 것이었다.
모든 질문의 모든 답은 메커니즘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A에서 B로 가는 것이다. A와 B를 통일하는 C가 제시되어야 한다. 화살은 과녁으로 간다. 그 일방향성을 기억하려고 에서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 반대로는 못간다. 무엇이 다른가? 붙이다의 반대는 떼다이다. 쇠가 붙는다나 자석이 당긴다는 반대로 갈 수 있다. 쇠가 붙는게 자석이 당기는 것이다. 자석이 쇠를 꼬시는지 쇠가 자석을 짝사랑하는지 알게 뭐야?
메커니즘은 한 방향으로 간다. 자기장은 언제나 N극에서 S극으로 가며 그 역은 없다. 전기는 전자가 음극에서 양극으로 간다. 강물은 바다로 간다.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머리에서 꼬리로 가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시작에서 종결로 간다. 바람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날아간다. 이를 시각적으로 이미지화 해야 한다.
총을 쏘면 총알이 날아가고 공을 차면 공이 날아간다. 아기가 탄생하든 나무가 자라든 원리는 같다. 메커니즘의 일방향성이 작동한다. 하여간 파인만의 설명으로는 철 원자는 전자들이 한 방향으로 회전해서 자기장이 생기는 것이고 그 때문에 쇠가 자석에 붙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왜?'라고 질문하는 것이 과학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왜?'는 아기들이 엄마의 관심을 끌려고 할 때나 쓰는 말이다. 끝없는 '왜?'로 엄마를 지치게 만든다. 아기는 궁금한게 아니고 단순히 마이크를 넘기는 것이다. 엄마들은 왜 그랬니? 하고 아기를 추궁한다. 왜 그랬을까?
동기? 목적? 의도? 심술? 욕심? 그런거 없다. 아이는 사건의 에너지 흐름에 말려드는 것이다. 상호작용 속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엄마의 추궁하는 말은 왜 나를 불러냈니? 왜 일을 크게 만들어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만들었니? 나하고 한바탕 해보자는 거냐? 이런 의미가 된다.
왜는 호출이다. 안 불렀는데?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하는 말이다. 아기가 등을 돌리고 딴전을 피우면 엄마는 왜?로 제압하여 엄마를 쳐다보게 만든다. 굴복시키는 행동이다. 왜라는 추궁은 어린이에게 상처를 준다. 어린이가 원하는 것은 보호자의 개입이다. 엄마가 내편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야. 이 말을 듣고 싶어한다. 왜는 상대를 제압하고 몰아세우는 말이다. 네편은 없어. 항복해. 이렇게 받아들여진다. '왜?'는 '까?'의 변형이고 까의 반복은 꾸짖음이다. '까?'는 호출이고 호출은 도전이며 '왜?'는 도전자를 제압하는 말이다.
바람은 왜 부는 것일까? 이런 질문 좋지 않다. 바람은 누구를 호출했느냐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바람은 '에서에서 으로으로' 이행한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이다. '에서'에 해당하는 것은 언제, 누가, 어디서, 왜다. 바람은 어제에서 오늘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게서 네게로, 왜에서 어떤으로 분다.
배고픔은 호출이고 식사는 응답이다. 왜는 배고픔이고 어떤은 밥이다. 사건을 호출해야 하는데 사람을 호출하므로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이다.
구조론 (0) | 2021.11.19 |
---|---|
인질로 잡힌 국민 (0) | 2021.11.19 |
노무현과 이재명 (0) | 2021.11.18 |
손가락이 다섯인 이유 (0) | 2021.11.17 |
●● 의리냐 이념이냐 (0) | 2021.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