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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리냐 이념이냐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21. 11. 1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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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냐 이념이냐

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1. 11. 15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면 깐부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의리다. 20세기는 이념의 시대였다. 21세기는 의리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이념은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가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리는 커다란 사건의 에너지 흐름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이념이 빵을 주는 것이라면 의리는 빵 굽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념은 지도자의 덕목이고 의리는 민중의 덕목이다. 이념이 좋아도 지도자가 어리석으면 낭패다. 의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 총도 없는데 싸우자고 외치는게 이념이다. 말없이 총을 한 자루씩 나눠주는게 의리다. 말을 못 해서 지는게 아니고 총이 없어서 지는 것이다. 

    수영을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에 빠뜨리는 것이다. 나는 개구리헤엄이나 개헤엄을 배우기 전에 잠수를 먼저 배웠다. 물속에서 30초를 버티는 훈련을 하면 물이 무섭지 않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다. 

    물에 빠진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는다. 우리는 서로 붙잡을 수 있게 곁을 내줘야 한다. 그것이 의리다.
    사상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보다 소작제가 낫고 소작제보다 자영농이 낫다. 그런데도 노예제를 했던 이유는 생산력이 낮았기 때문이다. 고대의 농사기술은 단순해서 가을에 보리를 파종하고 겨우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할 일이 없다. 겨울에는 병충해가 없으므로 보리는 그냥 놔둬도 알아서 자란다. 그 시대의 농사기술로는 가족노동 중심의 소작농이 불가능하다. 관건은 철제 농기구다. 농기구는 대장간을 소유한 귀족의 것이다. 귀족은 아침에 농기구를 나눠주고 저녁에 회수한다. 

    농기구는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로 전쟁하고 철제품은 농기구로만 쓰던 시대에 소작제는 불가능했다. 농사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함에 따라 가족노동 중심의 소작제로 바뀌었다. 대장간이 마을마다 들어선 것이다.
    봉건제는 국가의 동원력이 낮아서 대중을 정치에 동원할 수단이 없으므로 권력을 나눠가진다. 왕은 귀족에게, 귀족은 기사에게, 기사는 농민에게 권력의 일부를 나눠주고 다단계 수법으로 동원한다. 미디어와 교통통신의 발달로 국가의 동원력이 증대된게 절대왕정의 대두다. 

    중국은 평지가 넓어 인원을 동원하기 쉬우므로 절대권력이 이르게 등장한다. 일본은 섬으로 나눠져 있어서 봉건제가 오래 간다. 조선은 중국의 침략 때문에 이르게 왕정이 자라잡았다. 동원력 한계로 권력을 나눈 것이 봉건제라면 반대로 동원력이 증대하자 권력을 합친게 제국주의다.


    고대 노예제 사회는 수레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거리가 기준이 되므로 국가는 도시 위주로 작동했다. 사람들은 성안에 살았고 성 밖에 사는 야인들은 보는 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잡아갔다. 중세 농노제 사회는 말과 등자가 보급되어 기사계급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사방 백 킬로에 달하였다. 

    농토를 점유하는 봉건제가 작동한 것이다. 산업화가 일어나자 부르주아 계급의 발언권이 커진 것이 민주주의다. 미디어의 발달로 대중이 권력에 맞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주의 주장이 난무하고 온갖 사상과 이념이 제안되지만 대략 개소리고 당시의 시대상이 그러했던 것이다. 

    통제가능성과 통제기술의 문제다. 사상과 이념은 그 시대의 생산력 이상을 앞질러 갈 수 없다. 사회가 먼저 변하고 뒤늦게 철학자가 변화를 해설하는게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이다. 의리가 진짜다.


    의리는 이래라저래라 지시하지 않는다. 아닌 것을 배척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패스를 연결하다 보면 골은 터지게 되어 있다. 사람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고 상호작용을 늘리다 보면 문제는 언제가 해결된다. 의리는 차별의 반대어다. 21세기에 모든 문제는 결국 차별의 문제다. 

    피부색이든, 지역색이든, 성차별이든, 소수자차별이든 차별의 표지가 문제가 된다. 일체의 차별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의리다. 당신이 물에 빠졌는데 흑인이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지 않겠는가? 허다한 이론이 필요없다. 이념도 사상도 필요없다. 내밀어진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사회를 그런 구조로 디자인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서로가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한다. 피부색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로 가르칠게 아니라 사람을 섞어놔야 한다. 피부색이 다르면 얼굴표정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눈이 찢어진 동양인들이 무뚝뚝하며 화가 나 있다고 여긴다. 일본인 특유의 간드러진 미소는 조금 인정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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