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문희철 입력 2021. 04. 15. 05:01 수정 2021. 04. 15. 11:13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정문. [중앙포토]
지난해 KAIST가 모금한 기부금은 총 1474억원을 국내 대학 중 가장 가장 많다. 흥미로운 대목은 기부자 가운데 99.9%(금액 기준)는 KAIST 동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외부인이 KAIST에 고액을 기부하는 배경은 KAIST가 배출한 인력이 국부를 창출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KAIST에 350억원을 기부한 김병호 서전농원 회장 부부는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삼성전자로 KAIST가 우수 학생들을 가장 많이 보낸다”며 기부 이유를 설명했다.
KAIST 발전 기금 약정금액. 그래픽 박경민 기자
KAIST는 기부자가 지정한 사용처에만 기부금을 사용한다는 투명한 원칙도 일조했다. 기부자가 지정한 목적 이외의 곳에 기부금을 사용한다면, 기부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총 515억원을 KAIST에 기부한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은 2001년 바이오기술과 정보기술 융합에 써달라며 기부했다. 이 돈으로 KAIST는 바이오및뇌공학과를 설립하고 정문술빌딩을 세웠다. [사진 KAIST]
2001년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기부한 돈(300억원)으로 KAIST는 바이오및뇌공학과 빌딩(정문술빌딩)과 시설·장비 구입에 160억원을 사용했다. 남은 돈으로 기부자가 지정한 용처 이외의 학문(전산학과)에 지원하려고 하자, 당시 정 전 회장은 “단 1원이라도 가져가면 전액 회수한다”고 통보했다. 이후 기부금은 용처대로만 사용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
정문술 회장, “기부금 회수” 경고하기도
고(故) 류근철 KAIST 인재우주인건강연구센터 소장의 이름을 딴 체육관인 류근철스포츠컴플렉스. KAIST는 건설비용의 50% 이상을 사용한 건물에 원칙적으로 기부자의 이름을 붙인다. [사진 KAIST]
이런 풍토는 KAIST에 기부자를 예우하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7인으로 구성된 KAIST 발전재단 교직원들은 기부자를 ‘전담 마크’한다. 요즘엔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면 접촉이 어렵지만, 2018년까지만 해도 100억원 이상을 기부한 고액기부자와 최소 매달 1차례 연락했다. 지난 2017년 11월 24일 경기도 용인의 한 시니어타운에서 KAIST 학생들이 노래와 연주 등으로 공연을 했다. 대전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용인 시니어타운에 가서 공연을 한 건, KAIST에 고액을 기부한 사람들이 이곳에 다수 모여 살기 때문이었다.
생일이면 KAIST 직원·학생들이 대형 떡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기부자를 찾아간다. 이웃과 나누라고 일부러 대형 떡을 주문한다. 지난 13일 200억원을 KAIST에 기부한 장성환 삼성브러쉬 회장도 이웃인 김병호 회장 부부의 떡케이크를 나눠먹은 적이 있다.
기부자에게 특별히 축하할 일이 생기면 KAIST 총장이 직접 동행한다. 기부자 본인이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1년에 3번 이상 KAIST 총장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KAIST 발전재단의 설명이다.
이광형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 취임식이 열린 KAIST 대강당. 뒤편으로 취임식에 초청받은 고액 기부자들이 않아있는 VIP석이 보인다. [사진 김성태 프리랜서]
생일 케익, 기부자 이름 딴 건물
KAIST는 1억원 이상 기부하면 교내 주요 행사에 초청한다. 학교에서 수학했든 하지 않았든 고액 기부자는 ‘동문’이라고 생각해서다. 지난 8일 열린 이광형 제17대 KAIST 총장 취임식에도 장성환 삼성브러쉬 회장과 정문술 전 회장,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단상 위 VIP석에서 취임을 지켜봤다.
건물이나 기금 명칭을 정할 때 고액 기부자의 이름을 따는 건 익숙한 풍경이 됐다. 건설비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면 원칙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류근철스포츠컴플렉스, 정문술빌딩, 김병호·김삼열정보기술(IT)융합빌딩, 조천식녹색교통대학원, 박병준·홍정희KI빌딩 등이다.
기부자 이름을 붙인 건물이 학교 곳곳에 있으기 때문에 KAIST 학생들도 수학하며 자연스럽게 기부자의 이름과 친숙해진다. 실제로 김병호·김삼열씨 부부가 지난 2019년 학위수여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붙은 건물 로비에서 자신들의 흉상을 구경하자, KAIST 학생들이 몰려와 사진 촬영을 요청하기도 했다. 유지영 KAIST 장학재단 기금조성팀장은 “본인이 기부한 건물에서 학업 하는 학생들이 기부자를 알아보고 환대하자 뿌듯해하시더라”고 기억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전 본원 박병준KI빌딩 입구. 정문에 기부자 박병준 재미사업가의 영문 이름이 적혀 있다. 박병준 씨는 2007년 KAIST에 100억원을 기부했다. [사진 KAIST]
기부자를 '제2의 부모' 모시듯
고액 기부자가 별세하면 교직원이 직접 장례를 챙긴다. 고(故) 류근철 전 KAIST 인재및우주인건강연구센터장과 고 오이원 여사가 별세했을 때 카이스트가 장례 절차를 주관하고 학내에 분향소를 마련하는 등 ‘카이스트장’을 치렀다. 고 조천식 전 은행감독원 부원장이 돌아가셨을 때도 KAIST 교직원이 병원에 상주하며 장례식을 거들었다. 고액기부자를 위해서 KAIST는 지금도 매년 기일마다 추모식을 연다.
이밖에도 고액 기부자를 예우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기념일마다 총장 명의 서한을 보내고 명절이면 선물을 발송한다. KAIST 로고가 새겨진 물병·가습기나 건강검진권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의외로 KAIST 교내신문(‘카이스트신문“)이라고 한다. 박희경 KAIST 발전재단 상임이사는 “기부자들이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기부한 이후, KAIST를 마치 ‘제2의 자녀’처럼 생각하시면서 교내 신문에 실린 학교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며 “KAIST가 ‘제2의 부모’ 모시듯이 생신이나 기일 등 애·경사를 챙기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2030 기부자에 "리스펙트!" 반응
기부자들과 사회 사이의 ‘기부 케미’도 형성되고 있다. “돈 좀 벌었으니 기부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실제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의 기부 소식에 2030 세대는 “카카오 주식 한 주라도 더 사야겠다”“리스펙트!” 등의 반응을 보였다.
양용희 서울신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한국비영리학회장)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자신의 재산의 반씩 기부한다는 게 쉽지 않다. 누군가는 쇼맨십, 보여주기식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공언을 잘 지키는지 사람들이 지켜보면서 책임을 물을 것이기 때문에 절대 쉬운 결정 아녔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돈 있는 사람만 기부하는 시대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시대였다”며 “부자들의 기부 자체에 대해 건강하게 생각하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문희철·김지혜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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