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21.03.19 12:29ㅣ최종 업데이트 21.03.19 12:29
▲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청와대에서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사진촬영을 한 후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이 지난 17일 이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방문 첫날 두 사람은 각각 정의용 외교부 장관, 서욱 국방부 장관과 회담을 했고, 이튿날은 양국 외교·국방 합동 회담(2+2회담)을 했다. 미국의 외교·국방 장관이 동시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2010년 7월 이후 11년 만이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미국 외교 안보 고위층의 첫 방문이기도 하다.
앞서 12일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일본·호주·인도 정상과 화상으로 정상회담을 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네 나라를 잇는 이른바 쿼드(Quad)의 첫 정상회담이었다. 그리고 사흘 후 블링컨 장관과 오스틴 장관이 일본(15-16일)과 한국(17-18일)을 잇달아 방문해 동맹국들과 첫 장관급 회담을 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쿼드로 요약되는 아시아 지역 외교 안보 정책의 첫 삽을 뜬 한 주였던 셈이다.
일반 국민에게 여전히 낯선 쿼드라는 용어가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일부 언론은 미국과의 원활한 동맹 관계를 위해서 한국이 적극 나서라는 주문까지 한다.
그런데 어디로 나서라는 건지는 분명치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쿼드는 처음부터 한국이 참여할 성질의 협의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쿼드의 시작
쿼드는 어원 그대로 미국·일본·호주·인도 네 나라의 안보 네트워크다. 한국이 나설 자리가 아닌 첫 번째 이유다. 물론 미국 정부에서 더 확대된 형태의 다자 회의, 이른바 '쿼드 플러스'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 정해진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앞서 기술한 대로 이제 막 쿼드의 첫 삽을 떴을 뿐이다. 물론 훗날 한국이 참여할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그것은 현재의 구성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단지 쿼드(넷이라는 뜻)라는 명칭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 방향성 때문이다.
쿼드는 4자 안보 회의(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2000년대 들어 등장했다. 조지 부시(G. W. Bush) 대통령 이후 오바마와 트럼프 정권을 거치는 동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는 큰 흐름이 감지된다. 정권 교체기마다 미세한 변화가 있었지만 다듬어지는 과정에서의 변화였을 뿐이다. 바이든 체제에 들어 그 구체적 실체가 나오고 있는데 그렇게 결실을 맺은 것이 이번 12일 열린 4개국 정상회담이다.
지도상에서 미국-일본-호주-인도를 선으로 연결해 놓고 들여다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나라가 중국이다. 쿼드 동맹은 중국의 해양 진출을 막으려는 미국·일본·호주·인도 네 동맹국들 간의 안보 라인이며 미국뿐 아니라 나머지 세 나라의 전략적 이해관계와도 직결된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쿼드는 중국의 팽창적 대외 정책이 야기한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이번 12일 쿼드 정상회담과 관련해 중국은 관영 언론을 통해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지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쿼드 탄생의 가장 큰 명분은 중국이 제공했다. 만약 의도하지 않았다면 심각한 외교적 패착이고, 의도했다면 중국은 새로운 냉전 시대를 담담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최근 20년 사이 미국의 정권이 세 번 바뀌었지만 동아시아 정책의 방향이 일관된 이유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중국의 대외정책과 지속적으로 같은 지점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러 가지 대외전략 가설 가운데 하나였던 쿼드의 전략적 가치는 그에 따라 점점 높아졌고 이제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굳어지고 있다.
미국-일본-호주-인도를 잇는 동맹체제 강화는 부시 대통령 당시 처음 추진됐다. 하지만 당시 호주의 대화 상대였던 존 하워드 총리가 물러나면서 이 구상은 소멸됐다. 물론 국가의 전략 수정이 지도자 교체 하나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대외 전략적 가치가 있고, 국내 정치에 유리한 면이 있다면 그 정책은 연속성을 띤다.
호주의 정권 교체로 쿼드 동맹 구상이 폐기됐다는 것은 당시 중국의 안보 위협이 경제 협력 관계를 위협할 만큼 심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00년대 초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저가 임금과 무한한 인력 자원을 바탕으로 모든 산업 국가들의 공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존재였다.
클린턴 정권의 매개 역할에 힘입어 2001년에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중국은 국제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 상황에서 중국은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라기보다 매력적인 경제 협력 대상으로 더 크게 부각됐다. 호주의 쿼드 이탈은 그런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중국의 무역 총액은 5천 억 달러에서 2조 9700억 달러로 무려 여섯 배나 증가했다. 이렇게 10년간 경제 규모가 수직 상승한 끝에 2011년에는 국내 총생산(GDP) 기준 일본을 앞지르며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아베의 큰 그림
그 당시 일본은 끝없는 경기 침체, 인구 감소, 재정 적자 등 제자리걸음만 하다 2009년 자민당 장기 집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도 지지부진 했고 결국 3년 만에 다시 자민당의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을 하게 된다.
2011년 경제 분야에서 중국에 추월을 당한 일본은 이듬해인 2012년 9월 20일 그들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중국 해군 호위함 2척이 나타난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른바 센카쿠 열도 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충격은 배가되고 이때부터 중국을 미래의 일본을 위협하는 가상의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안보 전략이 필요해졌다.
2013년 2월 아베 총리는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일본이 돌아왔다(Japan is back)'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다. 이 강연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또는 인도·태평양에서 규칙의 증진자이며 글로벌 공공재의 수호자이자 미국·한국·호주 등 동질 국가들의 긴밀한 협력자로서 역할을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 연설이 일본이 공식적으로 인도·태평양을 언급한 첫 사례에 해당한다.
역시 2015년 12월 인도를 방문한 아베 총리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일·인도 비전 2025'를 발표하는데 이 발표문의 부제가 '인도·태평양 지역과 세계의 평화 번영을 위한 협동'이었다. 아베 총리는 중국의 위협에 맞설 장기 전략으로 동쪽으로는 전통적 맹방인 미국을 견인하고, 서쪽으로는 인도와 손을 잡음으로써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거대한 대중국 방어 시스템을 구상하고 천천히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일본의 적극적 구애를 받은 인도는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중국과 해결되지 않는 국경 분쟁을 겪고 있는 인도는 1962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경험이 있다. 심지어 당시에 비하면 지금 양측의 군사력 차이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더 벌어졌다.
게다가 2014년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발표한 일대일로(一帶一路) 계획은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잇는 거대한 경제 협력체로, 인도는 이 계획에서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할 위험이 커졌다. 심지어 인도양의 지배권을 눈 뜨고 앉아 통째로 중국에 넘겨주게 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일본의 거대한 외교·안보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아베 총리는 이즈음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라는 구체적 명칭을 고안해 전면에 내걸게 된다. 역시 미국-일본-호주-인도를 마름모꼴로 잇는 모양을 상징한다.
흔히 일본의 전통적 외교 전략은 반응형이라고 한다. 먼저 나서기보다 오는 행위에 반응한다는 의미인데, 경제력 수준에 비해 대미 외교에 절대적으로 치중하는 전략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아베 총리 시대의 일본 외교는 분명 수동적 반응형 외교를 넘어선 측면이 있다. 흔히 이를 반응형에 상대하는 말로 전략형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일본의 다른 총리들에 비해 안정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장기적이고 일관적인 대외전략을 세울 수 있는 힘이 된 측면이 있다.
2016년 아베 총리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다시 '자유와 개방의 인도·태평양 전략'(Free and Open Indo-Pacific Strategy)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선보인다. 그해 8월 케냐에서 열린 6차 아프리카 개발회의(TiCAD VI)에 참석한 아베 총리는 '태평양에서 인도양까지의 해양 공간을 글로벌 공공재로 발전시키겠다'라고 발표한다.
해양에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려는 표현인데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수사(레토릭)다. 이 발표에서 아베 총리는 중국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 해양에서의 항행의 자유, 법의 지배 등을 강조하면서 해양 민주주의를 설파했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일본으로서는 큰 도전이자 기회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오바마 대통령과 달리 제한적 외교를 구사하면서 고립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아베 총리로서는 어쩌면 본인 임기 중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자신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견인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해외 안보 비용을 절감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베 총리는 아시아에서 미국 역할의 상당 부분을 일본이 수행하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한다. 물론 이 전략은 오바마 대통령 당시에도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자위대를 활용해 아시아에서 미군 역할의 상당 부분을 맡기고 싶어 한다. 문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한국이 제국주의 전쟁의 피해자임을 인정하라고 일본에 요구하지만, 무대 뒤에서는 틈만 나면 일본을 수용하라고 한국을 압박한다.
어쨌든 일본의 적극적 인도·태평양 역할론은 미국에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정치·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아시아 진출을 일본이 길을 닦고 문을 활짝 열고 기다려 주니 미국으로서는 그 이상이 있을 수 없다. 일본과의 동맹 관계는 더 굳건해지고 중국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린 셈이다.
2018년 5월 트럼프 정부는 태평양 지역을 관할하는 해군 사령부를 기존의 태평양사령부(TACOM)에서 인도·태평양사령부(INDOPACOM)로 개칭했다. 이에 대해 당시 제임스 메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은 '인도양과 태평양의 연결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사령부의 명칭을 변경한다'라고 개칭의 이유를 밝혔다.
바이든 정부의 목적
올해 1월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대중국 정책의 상당 부분을 트럼프 행정부의 연속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의미 있는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첫 쿼드 정상회담을 하는 등 일본의 구상을 적극 받아들인 바이든 대통령은 아베 전 총리가 역설한 자유와 개방의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대신 안보와 번영의 인도·태평양(Secure and Prosperous Indo-Pacific)을 선호하고 있다.
'자유와 개방'과 '안보와 번영' 사이의 차이는 뭘까? 아베 전 총리가 제안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수용한 '자유와 개방'은 다소 추상적이다. 자유와 개방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뭘까? 뭔가 좋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뭘까? 구체적 답을 찾기에는 상당히 범위가 넓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반면 안보와 번영은 더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다. 안보는 당장 내 목숨을 지킬 수 있을 것 같고, 번영은 당장 내 주머니를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저속하고 원초적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늘 그 두 가지가 문제였다. 특히 강력하게 통제하고 제재할 강제 수단이 없는 국제사회에서는 더더욱 목숨과 돈을 지키는 문제가 어렵다.
그것은 분명히 쿼드를 미국의 아시아 정책으로 실행하겠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와 개방' 대신 '안보와 번영'을 전면에 내건 것은 동남아시아의 아세안(ASEAN) 국가들을 염두에 둔 조치다. 아세안 국가 가운데 일부는 '자유와 개방'에 거부 반응을 보일 국가들이 있다. 반면 안보와 번영은 중국을 상대로 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영원한 딜레마다. 중국에 안보를 위협받는 반면 경제를 위해서는 중국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 바이든 대통령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견인하기 위해 '안보와 번영'을 내건 것이다.
쿼드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려면 아세안 국가들의 협조는 필수적이다. 장기적으로는 그래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하는 안보 협의체를 구성하려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다. 그것이 앞서 언급한 '쿼드 플러스'의 모습이다.
한국은?
그렇다면 한국은? 다이아몬드 구상을 거쳐 쿼드로 구체화해 미국을 견인한 일본은 애초에 한국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에 한국은 빠져있었다. 미국은 쿼드를 가지고 한국을 시험하고 있고, 일본은 '말리는 시누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주장한 것인데,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역학관계로 생각하면 미국의 중국에 대한 감정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감정 또한 그것이다.
그들의 의도인지 무의식적 태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도록 미국을 끌어들이면서 한국에 대해 똑같은 심리를 투사하고 있다. 만약 미국과 일본이 언젠가 '쿼드 플러스' 운용에 한국을 끌어들이려 한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새 협의체의 존재 이유와 근거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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