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어두운 길을 가고 있는 상담객
나 호호당의 짧지 않았던 삶 전체를 되돌아볼 때 가장 외로웠을 때는 1995년이었다.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사람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말이다. 벌써 25년 전의 일이니 이젠 그저 아득하다.
며칠 전 한 상담객이 다녀갔다. 그 이의 운세 흐름이 바로 나 호호당의 25년 전과 같았다. 지금 당신의 상황은 가도 가도 정처를 알 수 없는 외롭고 스산한 어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 얘기해주니 그 분은 순간 울컥하면서 참지 못하고 그만 눈시울을 적셨다. 티슈 한 장을 빼서 드렸다, 그냥 좀 우는 것도 괜찮다고 위로도 해주었다.
겉으론 아무 문제가 없고 그냥 멀쩡한 분이었다. 현재 40대 중반의 나이에 직업도 상위 클라스에 속하는 양반이 속으론 어둡고 스산한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분의 운세 흐름은 우리가 해마다 1월 20일 경에 겪는 大寒(대한)과도 같았다. 대한은 한 해를 통해 땅이 가장 차갑게 식어있는 때, 기온 역시 가장 추운 때.
대한의 때에 대해
대한 무렵에 교외로 나가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어디에도 생동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땅은 얼어서 생경할 정도로 굳고 단단하다. 그 위로 눈이라도 내리면 어디에도 한 점의 生氣(생기)마저 없다. 먼 산을 보면 쌓인 눈 사이로 갈색의 낙엽과 앙상한 가지들로 인해 회갈색만 눈에 들어온다. 해가 나오는 낮 시간은 아주 짧아서 금방 서산으로 해가 넘어간다. 먹이를 찾아 차디 찬 허공을 맴돌던 새들도 금방 둥지로 돌아간다. 구름도 많지 않다, 공기가 건조하기 때문이다. 구름엔 잠시 붉은 놀이 서리다가 어느새 회갈색으로 변하고 그리곤 짙은 어둠이 내린다. 그러면 길고 긴 밤이 찾아온다.
나 호호당은 사람의 운세 순환을 계절의 변화, 좀 더 자세하게는 24절기의 변화로 설명한다. 이는 비유가 아니다. 액면 그대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분의 현재 상황은 바로 1월 20일 경의 대한이기에 겉으론 멀쩡해도 실은 차가운 대한의 길을 밟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동병상린이란 말처럼 나 호호당의 1995년, 그러니까 25년 전의 상황도 바로 대한의 운이었기에 그토록 외롭고 쓸쓸했던 것이고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기에 그 분의 심정과 상황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분의 경우 워낙 성실하고 자기 관리에 빈틈이 없는 분이라 그저 심정만 힘들 뿐인 것이고 사람에 따라 즉 타고난 팔자와 성정에 따라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내면의 심정은 별반 차이가 없다.
대한의 본질적 의미
대한의 운이 어떤 것인가를 본질적인 차원에서 얘기하면 그것은 놀랍게도 ‘무덤 속의 고독’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사람이야 죽으면 이미 의식이 없으니 무덤 속에 들어간 들 고독할 까닭도 없다 싶겠지만 그거야 감히 누가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으리! 대한의 운은 운명적으로 죽음의 상태인 것이고 무덤 속에 홀로 들어앉아 고요하고 외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되겠다. 그렇기에 대한의 운이란 전혀 밟아본 적 없는 저승의 길을 혼자서 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겉으로야 멀쩡하게 하던 일 하고 있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는 있어도 내면의 영혼은 홀로 저승의 어둡고 추운 길을 더듬어가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우리가 겪는 겨울은 그 본질에 있어 죽음이다. 한해살이들은 겨울로서 죽고 여러해살이들은 假死(가사)의 시간을 보내거나 겨울잠을 잔다. 우리 인간 역시도 수 십 년을 살지만 겨울이 되면 의식은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일종의 假死(가사)상태로 들어간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들 역시 해마다 겨울이면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을 체험한다. 죽음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나 호호당에게 물어온다면 그건 겨울, 겨울 중에서도 늦겨울을 상상해보라고 답해준다. 잿빛의 계절 겨울 말이다.
운명학의 본질
사람들은 운명학이라 하면 길흉사를 예측하고 하는 일이 언제면 잘 될 것이냐 잘 풀릴 것이냐, 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니면 경계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 또 결혼은 몇 살쯤에 하는 것이 좋을지, 이사 방향은 어느 쪽이 좋겠느냐 등등 지극히 이해타산에 관한 것을 미리 알아보는 일 정도로 여긴다.
물론 운명학은 그런 궁금증에 대해 답을 해준다. 하지만 진짜 운명학의 본질은 그 사람이 어떤 개성과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계절의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는데 있다. 맞이하는 운명의 계절에 따라 상황과 심정이 따라갈 것이니 그 결과로서의 인간사이다.
1월 20일 경의 대한은 생산하는 때가 아니다. 만물이 죽은 듯이 쉬고 있다. 그러니 대한의 운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어떤 성과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생산이 있을 리 없고 성과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 바람에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저 사람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생산성이 약해졌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사직을 강요당할 수도 있겠다.
대한의 운을 맞이한 고3 수험생이라면 어떨까?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으로 진학할 까닭이 없다. 겉으로야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척을 할 뿐 영혼은 다른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거나 몽상에 젖어 있어서 그렇다.
그렇기에 그런 학생 또는 그 학부모가 찾아와서 입시에 대해 물어볼 것 같으면 현실적인 말투, 즉 집중이 되지 않아서 학업의 성과가 좋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좋은 대학 진학은 어려울 것이라고 눈치를 봐가면서 苦言(고언)을 해주게 된다.
그러면 학부모 쪽에서 우리 아이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대단히 의욕적이었는데 이상하게 점차 의욕이 저하되고 성적도 부진하다는 말을 한다. 당연하다, 대한은 생산의 계절이 아닌 까닭이다.
기업의 경우도 대한의 운이 되면 경영진부터 타성에 빠져있고 그 결과 실적은 답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점차 뒤처지게 된다. 물론 국가 또한 그렇다.
세월 따라 운명의 계절도 변화해간다.
오늘의 글은 대한을 예로 들어서 운명의 흐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본질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1월 20일 경의 大寒(대한)이 있으니 그 반대편, 즉 6개월 뒤인 7월 24일 경의 大暑(대서)는 열에너지가 펄펄 끓어오르는 때이다. 에너지가 넘쳐나기에 일시적인 좌절을 당해도 그건 시련일 뿐 실패로 귀결되지 않는다. 엎어졌다가 해도 금방 다시 일어나서 목표한 바에 도전해간다. 그리고 성취해간다.
앞에서 소개했던 그 분 역시 30년 전엔 그랬을 것이다. 십대 무렵에 말이다. 그 무렵이 에너지 넘치는 대서였을 것이니.
어떤 이는 중년의 나이에 대서 운을 맞이하여 약진한다. 반면 어떤 이는 중년에 대한의 시들한 길을 밟고 있다. (나 호호당 역시 마흔 살 무렵에 대한의 길을 밟았었다.)
운명의 계절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고 풍요로울 수 있으니
그런데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 호호당이 운명학을 수십년간 연구해온 결과 진정으로 해주고픈 말이 하나 있어서 얘기해드리고자 한다.
일 년 사계절 중에 어느 계절도 나쁜 계절은 없다는 말이다. 겨울이 있기에 봄볕이 반가운 법이고 여름이 있어서 만물이 치열하게 다투면서 힘자랑을 한다. 그리고 가을이 있어서 더위가 가시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이에 가을이 지나면 쉬어야 나중에 또 생산에 나설 것이니 겨울 또한 반갑다.
인생살이 역시도 그렇다. 성공이 있겠지만 좌절도 있어야 할 것이며 좌절을 통해 사람은 더욱 성숙해지고 인격도 깊어진다. 좌절해본 사람만이 남의 좌절과 그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또 성취해본 사람만이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성취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의 과정은 전체가 하나의 고리를 이루면서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얘기이다. 좌절 없는 삶, 있지도 않겠지만 만약 그렇다 한다면 그건 사람을 업신여기게 되어 외면으로야 겸손한 척 해도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거나 또는 자만의 결과 인격 파탄의 길로 들어서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60년을 통해 맛을 보는 사계절 24절기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 계절의 순서가 달리 찾아들 뿐이다. 한 해가 계절의 변화를 통해 아름답듯이 삶 또한 운명의 계절이 있어서 변화해가기에 아름답고 풍요로울 수 있다는 얘기이다.
사는 건 고생이지만 그 보상 또한 충분히 주어진다는 것이 오늘의 얘기였다.
출처: https://hohodang.tistory.com/category/호호당 김태규의 음양오행 [희희락락호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