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거울 속의 나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다고 잠이 많은 것은 아니고 늦게 자기에 늦게 일어난다. 밤 시간을 지키는 올빼미인 셈이다. 부스스한 얼굴로 샤워를 하러 갔다가 거울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저렇게 늙었나 싶어서.
양치질하면서 생각해보곤 한다. 놀라는 까닭? 평소 생각하는 내 스스로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몇 년, 적어도 10년은 젊었을 때의 모습일 것으로 으레 여기고 있던 탓일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재의 모습과 조우하면 놀라게 되는 것이다. 저 작자가 누구지?
나이 50을 넘길 무렵 제법 충격이었던 생각이 난다. 내가 쉰 이라니,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그 무렵 해가 바뀔 때마다 내 나이를 잘 세기 어려웠다. 그냥 오십 초반이란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50 중반을 넘기면서 다시 정확하게 내 나이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60을 넘길 때도 약간은 그랬었지만 금방 적응이 되었다. 뭐 어쩌겠나 하고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독자들도 나이가 50을 넘기고 또 60을 넘길 무렵이 되면 대강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이미 50 이후라면 지금 내 말에 꽤나 동감할 것 같다.)
사람은 살아온 과거의 총합이라서
지금까지의 얘기는 오늘의 주제를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의 제시였다. 오늘의 얘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판단할 때 현재의 상황도 물론 감안하지만 그보다는 과거의 자신이 겪었거나 처했던 상황 그리고 경험 등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인식하고 판단할 때 현재의 내 모습과 상황에 대한 인식보다도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의 총합에 바탕을 두는 까닭이다.
나 호호당이 이처럼 다소 이상한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간의 오랜 상담을 통해 얻게 된 생각을 얘기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늘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많이 다를 때가 많다. 스스로는 내가 나이기에 무얼 그리 변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세월 따라 끊임없이 변해간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몸의 화학적 성분 즉 호르몬 분비도 변해가며 그에 따라 입맛이나 취향도 조금씩 그치지 않고 변해간다.
이제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선택에 직면하면 사람은 성공했던 경험에 근거를 둔다.
현재 어떤 이가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모험의 길이고 다른 선택은 다소 안전하고 보수적인 길이라 하자. 이럴 때 대개의 경우 사람은 과거 자신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판단을 내린다.
예전에 힘든 모험의 선택을 하고 나서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면 그 사람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과감한 모험을 택할 확률이 높다. 반대로 모험을 했다가 처절하게 실패한 사람이라면 지금의 선택은 안전책을 택할 확률이 높아진다.
기본적이란 미래의 일이란 제 아무리 심사숙고를 한다 해도 확실한 미래를 그려내기란 어려운 법, 그렇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지금의 상황 역시 고려하긴 하지만 과거의 선택 특히 성공했던 선택을 토대로 지금의 판단을 내리게 된다.
모험적인 선택을 했건 안전한 길을 택했건 상관이 없이 그게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면 사람은 앞으로의 선택에 있어서도 그 쪽을 택할 확률이 높다는 얘기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사례
구체적인 실례를 하나 들어본다.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랬었다.
1894년의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자신감이 생긴 일본은 10년 뒤인 1904년의 러일 전쟁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감히 당시로선 세계적 열강이자 강국인 러시아와 맞서 싸워서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군사적 모험으로 재미를 보았기에 그 뒤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군사만능주의가 된 것이다.
그러자 세월이 흘러 또 다시 일본은 만주를 병합하고 중국을 상대로 전쟁에 나섰으며 그러다가 스텝이 꼬이면서 결국 강대국 미국과도 전쟁을 하게 되었다. 미국이 강대국이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일본이었으나 과거 강대국 러시아를 이겼던 경험이 일본으로 하여금 또 다시 모험의 길에 나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은 과거의 경험, 즉 군사적 모험주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돌아온 건 처절한 패배였다.
학자들이 제시하는 경로의존성이란 것
과거의 성공적인 경험이 장차의 일에 있어 영향을 미치는 것, 이를 일부 학자들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뜻한다.
사회나 기업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사람들에서도 경로의존성이 나타난다.
과거에 통했던 방식대로 이어가는 것이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기에 사람이 어떤 선택에 직면할 경우 과거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해도 과거에 통했던 방식을 다소 무리가 따를지라도 그 쪽을 택한다.
경로의존성,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업이나 국가 사회 개인 등에 이르기까지 그런 잘못을 범하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 선택 당시에도 미래를 알 수 없었고 지금 선택을 내리는 순간에도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소 무리해서라도 성공했던 방식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역시 절대 그렇지가 않다. 과거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때론 내가 선택하고픈 사례를 들어 교훈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담에서의 사례
나 호호당은 그간 상담해오는 과정에서 많은 사례를 체험했다. 누구인지는 말하기 그렇지만 어떤 준 재벌급 회장님이 과감하게 어떤 기업을 인수했다. 실패할 경우 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용단이었다.
당시 그 분과 가까운 지인의 소개로 향후의 일에 대해 자문을 해주게 되었는데 만나보니 이미 결정은 내려진 상태였다. 이에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그 회장님께서 굳이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사주를 통해 그 분의 운세가 이제 막다른 길에 들어서 있음을 알고 대단히 완곡한 어조로 다소 어려우실 것이란 답을 드렸더니 그 분은 자신은 평생 어려운 일만 해왔고 늘 모험의 길을 택해왔기에 이번 인수 건도 결국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것이란 얘기를 하시는 것이었다.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못하고 잘 되시기만을 빈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그룹은 파산했다.
이런 실례가 내겐 한 번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서 세 차례나 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결정에 있어서도 많은 경험을 했다. 미래는 모르는 법이니 내가 무슨 권위 있는 신탁자라고 이래라 저래라 하겠는가. 그저 자문해줄 뿐이지.
모험으로 일어난 자 모험으로 쓰러진다. 보신책으로만 일관하던 자는 나중에 보신책 때문에 낭패를 당한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 경험의 산물이기에 경로의존성은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를 달리 표현해보자. 가령 독자가 이제 50대의 사람이라면 먹는 양도 그 사이에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30대의 젊은 시절 짜장면 곱빼기에 만두 한 접시를 먹었다고 해서 나이든 지금의 당신이 그렇게 먹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단순한 사실은 잘 알면서도 자신의 더 중요한 일에 대해선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운의 작용이란 것
운이란 움직인다는 것이니 변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운이란 대단히 공평해서 한 동안 일이 잘 풀렸다면 언젠가는 일이 지지부진해지기도 한다. 그게 바로 운이다.
그런데 운의 작용엔 엄밀한 규율과 법칙이 있다. 60을 하나의 순환주기로 하기에 가령 30년 전에 대성공을 했다면 30년이 흐른 지금엔 대실패를 맛볼 수도 있는 것이 운이다.
하지만 60 순환주기는 60년도 있지만 그 안에 60개월의 주기도 있어서 장기 흐름은 상승인데 단기 흐름은 하강일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운의 작용이 대단히 규칙적이란 것을 감지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헷갈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는 마치 증시가 내려가면서도 수시로 反騰(반등)하며 장기 추세가 오르는 중이어도 수시로 反落(반락)하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란 쉽지가 않다. 저마다의 偏向(편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경로의존성을 지적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것 역시 모든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니 어제로서 호호당의 수채화 전시회가 끝이 났다. 현재 시각이 새벽 2시 49분이니 어제인 셈이다. 정직성 작가가 이끌어준 덕분이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찾아 오셨고 또 그림도 적지 않게 사주셨다. 이 글을 통해 그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출처: https://hohodang.tistory.com/ [희희락락호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