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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이긴 미국 와인들의 반란, '파리의 심판'

●피치, 중국어로

by 21세기 나의조국 2019. 1. 2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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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이긴 미국 와인들의 반란, '파리의 심판'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등록 2019.01.25 10:30수정 2019.01.25 10:30 

 
                       

나는 연암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시애틀의 추억에 잠겨 있었다. 내 추억담이 끝나고 우리는 잠시 말 없이 각자의 와인잔만 비우고 있었다. 밖에서는 비가 그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듯 창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가 다시 물었다.

"미국에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보다 와인을 많이 만드나?"
"미국 와인은 그 나라만큼이나 꽤 흥미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죠. 미국의 서부 지역은 따뜻하고 일조량이 높은 데다 여러가지로 와인용 포도 재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불과 40~50년 전만해도 유럽사람들에게 미국산 와인은 와인이 아니라 포도 주스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들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계기로 미국 와인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와인 시장 자체도 크게 흔들렸죠."
"흥미로운 사건?"

"예. 이른바 '파리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1976년 5월의 프랑스 와인 대 미국 와인 시음회가 바로 그 사건이죠.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작은 와인 가게를 운영 중이던 영국인 와인 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에(Steven Spurrier)가 프랑스의 저명한 와인 전문가들을 설득해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비교 시음회를 가졌어요. 사실 프랑스의 와인 전문가들은 포도 주스 같은 미국 와인과 정통 프랑스 와인이 비교가 되겠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 때까지 그 누구도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을 비교할 생각조차 안 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미국 와인을 망신 주자는 심리에서였는지 어쨌든 시음회에 응하긴 했습니다.


시음 방식은 소위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이라는 것으로 와인의 라벨이나 이름은 일체 비밀로 하고, 오로지 번호만 매겨진 와인들을 시음해서 순수하게 맛과 향기만 점수로 평가하는 방식이었죠. 시음회를 제안한 스티븐 스퍼리에 본인을 포함한 11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9명이 프랑스인이었고 시음 순서를 제비뽑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선입견대로라면 당연히 프랑스 와인이 압도적으로 미국와인을 누를 거라고 예상됐어요.

그렇게 웃으면서 시작한 시음회였는데 오전의 화이트와인 평가 점수를 집계해보니… 세상에나,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와인이 프랑스와인이 아닌 미국 캘리포니아의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1973년 빈티지였던 거에요. 심지어 모두 10병의 화이트 와인 중에서 미국 와인이 1위, 3위, 4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자 심사위원들은 모두 당황했죠.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화이트 와인 부문 1위를 차지한 미국의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1973 빈티지. 파리의 심판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소장 중이다. ⓒ Radka Beach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웃자고 시작한 게임에 완전 목숨 걸게 생긴 거죠.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이 너무 방심해서 제대로 평가를 못 했을 거라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오후의 레드와인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결과는 또다시 미국의 스태그스 립 와인 셀러스(Stag's Leap Wine Cellars) 1973년 빈티지가 1등을 차지했어요. 그나마 2등부터 4등까지는 프랑스 와인들이 차지하긴 했지만, 그 유명한 샤토 무통 로쉴드를 듣도 보도 못했던 미국의 무명 와인이 이겼다는 사실은 와인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한편, 미국의 와인업계에는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무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거죠.

심사위원들이 모두 경악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자리에 유일한 언론 관계자로 참석했던 조지 M. 테이버 기자가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음회에 대한 기사를 써서 미국 타임지에 실었고, 그 제목처럼 이 시음회는 역사적인 사건이 돼버렸어요.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심사위원 중 누군가는 자신의 채점지를 빼돌리려는 시도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연암은 얘기를 듣더니 '탁'하고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멋지군, 멋져!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던 친구들이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하하하, 미국인들이 정말 멋지게 한 방 날린 셈이군!"

난 그의 심경의 한 자락이 읽히는 듯했다.

"형님도 열하 가시는 길에 유학의 종주국이라며 잘난 척하던 중국인들에게 글과 필체로 한 방 날리셨잖아요. 그때 심정 생각나서 더 통쾌하신거죠?"
"하하하, 맞네, 맞아. 나도 모르게 그 시절 생각이 나는군!"


나는 셀러 깊숙이 고이 모셔놨던 샤토 몬텔레나 2013년 빈티지 한 병을 꺼내 열고 새로운 와인잔에 두 잔을 따랐다. 권위에 굴하지 않고, 도전 정신과 열정으로 충만했던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들을 위해, 그리고 그와 같은 정신을 가진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 건배를 했다. 볏짚 색깔의 와인에서는 상큼한 청사과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입안을 꽉 채우는 듯한 풍부한 산미가 일품이었다.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레드 와인 부문 1위를 차지한 미국의 스태그스 립 와인 셀라스(Stag's Leap Wine Cellars) 1973 빈티지. 스태그스 립은 보르도의 명품 와인인 샤토 무통 로쉴드 1970 빈티지를 1.5점 차이로 누르고 1위를 차지해 프랑스 와인 업계에 악몽이 되었다. ⓒ Bob McClenahan


그때 '딸랑'하는 풍경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리더니 몇 명의 손님이 왁자지껄하게 들어섰다. 일어서서 손님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연암이 내 표정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우리 둘이서만 마시기 적적할 것 같아서 친구 몇 명 불렀네. 몇 명은 아마 구면이지?"

긴 붉은 색 가운을 걸친 이탈리아인이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부오나 세라(Buona sera, 이탈리아어의 저녁 인사)!'라고 아는 척을 했고, 그 뒤에는 온통 검은 색으로 차려 입고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의 창백한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 들어왔다. 단테와 마키아벨리였다(노블칼럼 9화, 10화 참조).

다시 그 뒤로는 중세의 이슬람식 코트인 주바(jubba)를 걸치고 높다란 터번을 쓴 풍채 좋은 아랍 상인이 문을 들어서며 또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또 다시 자기 집이 아닌 걸 알고 화를 내다가, 이내 체념한 듯 '앗쌀라무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를)'이라는 아랍어 인사를 하며 한 쪽 자리에 앉았다. '뱃사람' 신밧드였다(노블칼럼 22화 참조).

이어서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우리 가게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목까지 올라오는 헐렁하고 낡은 터틀넥 스웨터에 마찬가지로 낡은 카키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에는 군데군데 반점이 있었고, 하얗게 센 머리와 얼굴의 반 이상을 역시 하얗게 센 수염이 덮고 있었지만 우뚝한 콧날과 깊은 눈매는 젊은 시절에 상당한 미남이었음을 짐작게 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여럿 새겨져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마다 그가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들이 고목의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는 듯했다. 연암이 그를 내 앞자리로 안내했다.

"이 친구는 아마 처음이지? 어차피 곧 만날 사이이기도 했고,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도 자네가 워낙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오지랖 좀 떨었네. 이 봐, 어니(어니스트의 애칭), 자네가 오래 살았던 그 뭐라더라, 쿠바였던가? 그 나라에서는 자네를 '파파'라고 부른다며? 여기 이 술집 주인장도 이 동네에서는 '파파'라고 부른다는구먼. 하하하, 자네들은 별명도 똑같으니 나름 얘기가 잘 통할 게야."

어니스트, 아니 쿠바인들이 사랑과 존경을 담아 불렀던 '파파' 헤밍웨이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연암의 장황한 소개에 빙그레 웃으며 별말 없이 내게 큼직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그의 책을 몽땅 가져다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앞치마에 손을 닦은 후 정중하게 악수를 나눴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단테가 질투 섞인 농을 던졌다.

"이보시오, 주인장. 지난 번에는 내 책의 팬이라고 하더니 지금 에르네스토(헤밍웨이의 영어 이름인 어니스트 Ernest 를 이탈리아식으로 읽은 이름)와 악수 나누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나에 대한 애정은 저 친구에 대한 애정보다 크게 못 미치는 것 같소만? 하하하."

나는 마치 짝사랑을 들킨 소녀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함을 감추려고 급하게 안주를 더 내오고 각자의 잔에 와인을 더 따랐다. 손님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건배를 했고, 나는 주방에서 서둘러 빨리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안주를 만들어 내왔다.

신밧드의 앞에는 말린 대추야자 그릇을 올렸고, 단테와 마키아벨리에게는 빠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와 올리브를, 헤밍웨이 앞에는 급한 대로 우선 오후에 해동시켜 놓은 참치회를 겉면만 살짝 구워서 썰고 올리브유와 소금을 살짝 뿌려 함께 냈다. 다행히 모두의 잔에 따른 샤토 몬텔레나와 두루 잘 어울릴 법한 안주들이었다.

손님들은 나와 '1001 M.U.N'의 번창을 빌며 건배를 했고, 나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채로 그들과 건배를 하고 와인을 마셨다. 조용했던 가게 안에 이탈리아어, 영어, 아랍어가 온통 뒤섞이며 울려서 UN 총회장을 방불케 했다.

헤밍웨이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안경을 꺼내 쓰고는 벽 쪽의 책장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책들을 발견하고 기쁜 듯 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을 보면서 난 어디서 압상트(아니스, 쑥, 회향과 몇 가지 허브를 첨가하여 만드는 녹색의 증류주. 헤밍웨이와 고흐, 로트렉 같은 예술가들이 특히 사랑한 술로 유명하다)라도 구해와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다.
 

헤밍웨이, 로트렉, 고흐 등의 예술가 등이 사랑한 증류주 압상트(Absinthe). 스위스에서 유래된 압상트는 아니스, 쑥, 회향에 몇 가지 허브를 더 첨가해서 만드는 독한 증류주로 물에 타면 흰색으로 변하며, 환각 성분이 있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헤밍웨이의 많은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기도 하다. ⓒ Carla Romero


헤밍웨이가 자신의 책 한 권을 뽑아서 뒤적이며 보더니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건 '무기여 잘 있거라' 구려. 재미있던가요?"
"그럼요. 선생께서 쓰신 책인 거의 빠지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오호, 독서광이라더니 정말인가 보군요. 어떤 책이 가장 재미있었나요?"
"그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역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습니다."
"왜죠?"
"전 어려서부터 책에 나오는 음식이나 술,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시대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그 세 가지를 가장 잘 만족시켜줬던 책이니까요."


내 대답을 듣고는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헤밍웨이를 보며 연암이 말을 거들었다.

"거보게, 내가 자네 마음에도 들 거라 했었지?"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보며 한 마디 했다.

"원래 한 명을 더 불렀는데, 그 친구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오겠다더군. 무슨 다회(차 마시는 모임)가 있다나?"

이 정도 모임에 더 초대했던 손님이 있다니, 나는 기대에 차 물었다.

"누구신데요?"
"아, 아마 자네도 잘 알 걸세. 여기 이 '어니'와 비슷한 연배인데, 린위탕(임어당. 중국의 작가이자 비평가로 국내에서는 '생활의 발견'이라는 수필집으로 유명하다)이라고, 중국인이지."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고, 연암은 내 표정을 보고는 또 껄껄대며 웃었다. 그 옆에서는 단테와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의 정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고, 신밧드는 여덟 번째 모험 이야기의 소재로라도 삼으려는 듯 열심히 눈을 굴리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 모두에게 어떤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나는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그때 저 멀리서 은은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1001 M.U.N 의 밤은 계속됩니다)


*연재를 마치며

갑장이자 좋은 술친구이기도 한 오마이뉴스의 이한기 기자로부터 저자가 평소 술자리에서 떠드는 온갖 잡설을 말로만 하지 말고 글로 한 번 써보라는 제의를 받은 게 2018년 봄 무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농이겠거니 하고 웃고 말았는데, 만날 때마다 거듭 제안을 하니 고민이 되기 시작했고, 정말 한 번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공식 칼럼 같은 걸 써본 적이 없어 망설이던 저자에게 이한기 기자는 백지 수표라도 주듯 어떤 형식, 어떤 내용이든 상관 없으니 하고 싶은 얘기를 자유롭게 써보라고 했고, 그 말에 힘을 얻어 드디어 국내 최초로 소설 형식을 빌린 칼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인 칼럼 형식이 아닌 소설의 형식을 빌린 건 그렇잖아도 일반인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와인이라는 술을 더 어렵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고, 소설 읽듯 편하게 읽어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와인을 접할 수 있게 되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상상력을 펼치고 나니 욕심이 생겨 워낙 좋아했던 고인들과 그들의 작품까지 끌어 들이게 됐고, 그렇게 현실과 환상이 만나는 공간, 주점 '1001 M.U.N'이 만들어졌습니다. 원래 처음 쓸 때부터 6개월 정도의 시간으로 쓰기로 약속했었던 터라 이제 주어진 시간이 다 됐습니다만, 칼럼 제목처럼 천 하룻밤 동안의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지 못하는 점은 꽤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다른 공간에서 못다 한 남은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기를 고대하며, 오마이뉴스의 편집국 제위, 특히 이한기 기자와 최은경 기자, 박정훈 기자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매번 부족한 글솜씨로 쥐어짜듯 써 내려간 글을 읽고 제안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애독자 여러분들께도 깊이 감사 드립니다. 소소한 칼럼이었지만 마무리만큼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한 구절로 지을까 합니다. 끝으로, 주인장이 들은 종소리는 어떤 종소리였을까요? 감사합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간다
가버린 세월도
우리의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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