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고택은 몇 해 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전체를 예약해 하룻밤 머물 수 있다. 고택은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 주인처럼 안채에서 자고 싶지만, 내가 탐내는 방은 마당을 내려다보는 사랑채다. 사랑채가 화려하고 위엄 있어 그곳에서 자고 싶었다.
충효절의, 그리고 솔송주
▲ 충효절의가 걸린 일두 고택의 사랑채 정면 ⓒ 막걸리학교
그 위엄은 사랑채의 벽면에 쓰인 忠孝節義(충효절의)라는 문짝 만하게 붙은 글자에서 나온다. 나라 안의 살림집에 이만큼이나 큰 글씨를 붙여둔 곳이 있을까? 서원이나 향교를 뒤져도 없을 것이다. 그 글자가 너무 커서 무겁고 무섭기도 하다. 이 집에 누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충효절의라는 네 글자를 이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이 집의 주인은 일두 선생의 18대 후손이다. 우리는 집을 통째로 빌리기 위해서 스무 명이 넘게 갔고, 일두 정여창 선생의 16대손인 정천상 대표로부터 안내를 받았다.
정천상 대표는 그의 아내와 함께 솔송주를 빚고 있다. 집안에서 전해오는 술 이름은 송순주(松荀酒)였다. 봄날 소나무 순이 연초록으로 올라오면 그 마디를 끊어서 술밥에 함께 넣고 쪄서 술을 빚는다. 1996년에 양조장 면허를 낼 무렵에 송순주라는 이름으로 앞서 등록한 곳이 있어서, 솔송주라 등록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집안에 또 다른 술로 과하주(過夏酒)가 있었다. 과하주는 약주에 소주를 타서 빚는데, 여름에도 상하지 않아 놓지 않고 빚었다고 한다.
솔송주를 빚는 일은 정씨 집안의 며느리인 박흥선씨가 도맡아 한다. 경남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도, 농림부 명인도 모두 박흥선씨의 몫이다. 정천상씨는 문중 일도 관여해 일두 선생기념사업회 회장도 하고 남계서원의 원장도 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두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개평마을이 있고, 정 대표가 그곳에 살기 때문이다. 개평마을에는 100여 가구가 있는데, 풍천 노씨와 하동 정씨가 살고 있고, 60여 동의 한옥이 있다.
일두 고택 솟을대문 위에는 나라에서 내린 효자 충신 정려패가 5개나 걸려 있다. 충효의 정신을 얼마나 굳건하게 지키는 집안인가를 보여주는 훈장과 같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사랑채에 쓰인 큰 글씨가 눈에 띈다. 마당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석가산이 있고, 그 안에 휜 소나무와 큰 전나무가 있다. 이 나무만으로도 이 집의 당당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 사랑채에서 내려다 본 일두 고택의 마당 ⓒ 막걸리학교
고택은 지어진 지 200여 년이 됐다고 하니, 우리가 머물 하룻밤은 석가산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만큼이나 찰라다. 방 배치를 하고 나니, 사랑채는 내 처지가 되지 못했다. 화장실이 가장 잘 갖춰진 곳이 사랑채여서, 함께 방문한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남자들이 안채를 차지했고, 그중에서 가장 작은 방이 내 몫이 됐다. 둘이 들면 가득 차는 방이었다.
그런데 이 방이 일두 고택에서 가장 기가 좋은 방이라고 정 대표가 귓속말을 해준다. 집안의 후손을 얻는 태실이라며, 종손 며느리에게만 내주는 귀한 방이라고 했다. 마당 쪽으로 아궁이가 있어 불을 지피기에도 좋은 방이다. 어둠이 내리니, 남쪽 밤하늘에 오리온자리가 나타났다.
집안을 이어갈 아이도 낳고 아이도 길렀을 태실 방에 들어와,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벌레(일두, 一蠹)로 불렀던 사람을 생각한다. 아마도 그 벌레는 책에서 빠져나온 책벌레일 것이다. 일두 선생은 동방 5현에 들고, 동국 18현에 드는 현자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술을 좋아하는 한 마리 벌레가 되다
요사이 나는 책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바빠진다. 나이 들수록 판단이 빨라지고, 책을 보는 인내력도 떨어진다. 책을 보기보다, 두 다리로 들판을 걷고 싶어진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며 떠돌지만, 내가 가닿을 수 없는 또 다른 생이 책에 있는 줄은 안다. 500년 전에 살았던 일두를 만나려면 책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채 마루에서는 솔송주 술판이 벌어져 웃음소리가 나고 소란스럽다. 그 소리가 멀어지더니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술자리에 합류하려고 이부자리도 펴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집안은 고요하고 잠잠하다. 문을 열고 일두 고택의 안채 마당에 서니,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초저녁에 받았던 술상 같은 오리온자리는 중천으로 떠올라있다. 유난히 별들이 가깝다. 마치 천정에 별이 떠 있고, 우주가 나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바람이 차서 목이 절로 움츠러든다. 일두 고택 지붕 선 안으로 들어온 하늘을 보고 있자니, 내가 마치 우물 속에 들어온 술 취한 한 마리 벌레 같다.
일두 선생은 술을 잘 마셨다. 1570년 유희춘이 지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술에 관한 그의 행적이 나와 있는데, 중년에 소주(燒酒)를 마시고 취해 광야에 쓰러져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아들 걱정을 하며 굶고 있었다.
이때부터 일두는 제사 뒤의 음복말고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 임금이 그에게 술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는 땅에 엎드려 이르기를 "신의 어머니가 살았을 때 술 마시는 것을 꾸짖으셨는데, 그때 신은 술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성종은 감탄하며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세자 연산군의 스승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 함경도 종성에서 병으로 1504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해 벌어진 갑자사화로 무덤이 파헤쳐지고 부관참시되는 화를 입었다. 중종 반정으로 복관돼 1517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고, 1610년에는 동방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유학의 역사와 함께하게 됐다.
일두 고택의 따뜻한 태실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개평마을 입구에 있는 솔송주 양조장을 찾아갔다. 박흥선 명인에게 솔송주 빚는 법을 들을 수 있었다. 행여 돌아가 술을 빚을 수 있을까 싶어, 명인이 말해준 술 제조법을 꼼꼼하게 적어본다.
누룩, 솔잎, 송순... 솔송주 담그는 법
▲ 송순이 들어간 솔송주의 술덧 ⓒ 막걸리학교
술의 재료는 찹쌀, 밀누룩, 솔잎, 송순, 엿기름이다. 먼저 찹쌀 2kg을 물에 불린 뒤에 물그름하게 죽을 쑨다. 물이 10ℓ는 들어갔을 것이다. 죽을 식혀 누룩 400g과 섞어 항아리에 담아 밑술을 완성한다. 3~4일이 지난 뒤에 찹쌀 8kg으로 고두밥을 찐다.
고두밥과 밑술을 섞을 때 그늘에 말린 솔잎과 송순을 함께 넣는다. 예전에는 솔잎과 송순을 넣어 고두밥을 쪘는데, 요즘에는 솥에 솔잎과 송순만을 넣어 숨죽이는 정도로 찐 뒤에 나중에 고두밥과 섞는다. 솔향이 너무 진하면 역겨운 느낌이 들기 때문에, 솔향을 줄이려는 방편이다.
또 덧술할 때에는 누룩 1.5kg과 엿기름 약간 그리고 물을 함께 넣어 비빈다. 물을 전혀 넣지 않고도 덧술할 수 있는데, 이때는 덧술하고 나서 3-4일 뒤에 묽게 죽을 쑤어 넣어준다. 술은 15일쯤 지나서 대오리로 만든 용수를 박아 떠낸다. 용수에서 떠낸 술은 특별히 얇은 한지로 재차 여과하여 맑은 술을 얻는다. 떠낸 술을 얼마간 두었다가 마시면 맛이 더없이 좋다고 한다.
현재 솔송주 양조장에서는 전통 방식을 재해석해 솔송주 약주 13%, 리큐르 담솔 40% 두 종류를 주력 상품으로 내고 있다. 생산 규모가 커지면서 항아리 대신 스테인리스 발효통을 사용하고, 옹기로 된 소줏고리가 아니라 스테인리스 증류기를 사용하고 있다.
술 빚는 법도 좀 더 간결하게 해 찹쌀죽 대신에 고두밥을 지어서 빚고 있다. 솔송주 술맛은 솔잎에서 오는 향기가 매끄럽고 은은하게 배어있다. 솔송주는 외국의 진(Gin) 계통의 술과도 비교하여 즐길 만하다. 소나무를 재료로 한 옛술들이 많은 편인데, 솔송주는 현재 생산되고 있는 소나무 술 중에서 가장 대중성을 확보한 제품으로 꼽힌다.
일두 선생이 자신을 일컬어 한 마리 벌레라 했으니, 집안에 머물러있던 솔송주는 그보다 더 작은 존재일 것이다. 솔송주를 즐기고 있는 우리는, 술을 끊고 큰 사람이 된 일두 선생의 정신에서 한참 엇나가 있지만, 그 술로 하여 고택을 찾아 옛일을 떠올리니 일두 선생도 우리를 너그러이 헤아려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