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인 입력 2017.08.31. 07:39
지난 일요일이었다. 캔자스시티 외곽 지역에서 작은 사건이 생겼다. 패스트푸드점 ‘버거*’ 앞에서 음주운전자 한 명이 체포된 것이다. 아직 어둡기도 전인 저녁 7시 30분 쯤의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경찰의 신원 조회 결과였다. 그의 이름은 대니 더피, 로열스의 주목받는 좌완 투수였다.
그는 당시 클리블랜드에 원정 중인 팀을 이탈한 상태였다. 팔꿈치 통증 때문에 정밀 검진을 받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캔자스시티로 돌아왔다가 사고를 친 것이다.
평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외였다. 그는 그라운드 안에서도 인기가 많은 플레이어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은 일들을 솔선하며 미담을 쌓은 인물이다. 어린이 병원이나 동물 보호소를 위해 선뜻 거액을 쾌척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팬들과 구단의 충격이 컸다. 로열스와는 올 초 5년간 6,500만 달러의 거액 연장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데이튼 무어 단장은 짤막한 코멘트를 발표했다. “사건에 대한 추가 정보를 수집중이라 자세한 언급은 곤란하다. 우리는 더피가 팀을 위해 책임감을 가졌던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도 그런 의식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음주운전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은 법적 판단이 필요한 문제이다. (구단은) 더 이상의 추가 멘트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당사자도 기자들 앞에 섰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하다. 어린 팬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노출됐다. 하지만 우리 도시를 위한 행동에는 변함없을 것이다. 약속드린다.”
다음 달 법정에 서게 된 그를 향해 위트 넘친 댓글이 하나 달렸다. ‘그 분야의 달인이 도미니카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은 사이 신진 세력이 도전장을 던졌군.’
역시 다르다. <…구라다>는 그들의 신선한 발상에 찬사를 보낸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었다.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섬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이었다. 나라 전체가 야구나 다름없는 곳이다. 겨울에도 그 열기가 식지 않는다. 이른바 윈터 리그, 그곳이 출구 전략의 첫번째 터닝 포인트로 등장했다.
아길라스 시바에냐스라는 구단이었다. 오피셜이 떴다. 3명의 선수와 계약에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명은 20대 초반의 유망주들이다. 나머지 한 명은 다르다. 나이가 꽉 찬 서른이다. 빅리그 경력도 제법 있다. 특별한 일 없으면 겨울 리그를 뛸 필요없는 스펙이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일’이 있었다.
아길라스라는 팀은 대충 별 볼일 없는 팀인가? 아니다.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면 만만치 않다. 예전에 추신수가 클리블랜드에서 뛰던 시절 사령탑을 맡았던 매니 액타가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미겔 테하다는 부감독이라는 직책에 이름을 올렸다. 80년된 팀으로 리그 우승만 20회를 차지했다.
파이어리츠의 닐 헌팅턴 단장이 그곳을 택한 이유는 뻔하다. 실전, 그러니까 살아있는 투수들의 공을 쳐보라는 뜻이다.
아마 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단이 피칭 머신까지 구입해서 한국으로 공수해줬다고 한다. 나름대로 훈련 프로그램을 수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하는 게 오죽했겠나. 수비도, 베이스러닝도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종합적인 보강 계획이 필요했을 것이다.
도미니카 리그는 그에게 맞춤형이다. 정규 시즌은 20게임 미만이다. 플레이오프 올라가면 몇 경기를 더 하게 된다. 교육 리그와 느낌도 비슷하다. 어린 선수들과 어울리다보면 느끼는 바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과는 비자면제 협정이 체결된 곳이다. 무비자로 90일동안 단기 체류가 가능하다.
사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까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관적인 시각이 우세했다. 헌팅턴 단장조차 “미국 취업비자를 발급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8월 초의 발언이었다.
당연한 예상이다. 한국에서의 범죄 사실 때문에 이미 비자 발급이 거부된 전력이 있다. 이런 경우 다시 신청해서 이뤄지기는 더욱 힘들다. 하지만 중요한 변수 하나를 감안해야 한다. 바로 ‘시간’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이민법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강 이렇다.
유죄 판결을 받고 집행유예 기간 중이다. 이 상태에서 취업비자를 받는 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답변이었다. 다만,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이 고려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일단 음주 운전은 미국에서도 간단치 않은 범죄로 간주한다. 3차례나 적발됐다는 것도 중대한 위법 행위로 취급될 것이다. 또 세간의 주목을 받는 케이스라는 점도 불리한 요인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긍정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위에서 얘기한 ‘시간’이라는 변수다.
아시다시피 법원에서 받은 집행유예기간은 2년이다. 내년 봄이면 그 절반을 넘기는 시점이 된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정상 참작’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유죄 판결을 받은 지 얼마 안되는 상황에서는 선뜻 비자 발급을 결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상당한 기간이 지나고, 별 일이 없었다면 재고해 볼만한 여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물론 몇가지 보완 요소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첫째가 재발 방지를 위한 신뢰감이다. 그의 경우는 음주관련 치료 프로그램에 대한 이수 계획일 것이다. 미국에는 전문적인 시설이나 시스템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길게는 몇 개월씩 걸리기도 한다.
두번째는 ‘착한 일’이다. 커뮤니티를 위한 성실한 봉사 활동은 반성하는 자세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에 그런 기사가 있었다. 그가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유소년 선수를 대상으로 야구를 가르치며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이 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어디일까? 당사자야 자업자득이라 치자. 어차피 뿌린대로 거두는 것 아닌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프로 선수로서 책임을 저버린데 대한 비난과 비판은 오랜 시간동안 따라다닐 것이다. 팬들이 무슨 죄인가. 새벽 잠 설치며, 마음 졸이고 응원하던 기대와 신뢰는 무참하게 내쳐졌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실효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파이어리츠 구단이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아시아 출신 내야수에 대해 나름대로 리스크를 안고 투자를 결행했다. 데뷔시킨 뒤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가능성은 확인했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풀 시즌을 활용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이제 막 적응기를 끝내고, 가속 페달을 밟으려던 3년차에 당한 기가 막힌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두 손 털고 일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대체 자원을 구하는 게 훨씬 속 편한 일이라고 여겼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사방으로 해결책을 찾아다녔다. 물론 판단은 냉정한 손익 계산 속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거기에 온정이나 의리 같은 감성을 대입하는 것은 너무 아마추어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안쓰럽다. 적절한 감정인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필요한 모든 절차와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자세를 보면 그 말이 생각난다. ‘팀(Team)’이라는 단어다.
아무쪼록 그도 느꼈으면 좋겠다.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아프게 그래야 한다. 설사 도미니카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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