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만 기자 입력 2017.08.01. 09:31 수정 2017.08.01. 14:08
시사저널은 제1446호 기사(BBK 소액주주들 “우리 목소리는 ‘소거’ 당했다”)를 통해 BBK 사건을 되돌아봤다. 2001년 옵셔널벤처스가 상장폐지 당하는 과정에서 실제 피해를 입은 소액주주들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살펴보고, 현재 남아 있는 과제에 대해 짚었다.
BBK 사건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실소유주 의혹을 둘러싸고 2007년 대선 정국의 판을 뒤흔들면서 여러 파생 사건들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얽힌 인물들도 늘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BBK 기획입국 사건’과 ‘다스 140억원 송금 이면합의 의혹’을 들 수 있다. ‘BBK 기획입국 사건’은 7월25일 임명된 문무일 신임 검찰총장이 담당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당사자인 김경준 전 BBK투자자문 대표는 지난 3월28일 출소하자마자 온라인상에서 BBK 사건에 대해 연일 폭로를 이어가고 있다.
시사저널은 2011년 하반기부터 2012년 상반기까지 김 전 대표가 유원일 전 국회의원에게 보낸 편지 12통을 단독 입수해 분석했다. 편지에는 개인적인 고충을 비롯해 검찰수사 과정의 부당함, 복역기간 산입 문제 등에 대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검찰수사 과정과 기획입국 사건의 내용을 소상히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검찰이 2008년 수사 당시 “목표는 노무현”이라고 했다는 대목도 있다. 또 본인이 1심 선고 이후 이명박 전 대통령과 BBK 사건에 대해 입장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적혀 있다.
김 전 대표는 2008년 1심에서 주가조작 및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김 전 대표의 부인인 이아무개씨도 미국에서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문무일 부장검사)는 김 전 대표의 기획입국설에 대해 수사하고 있었다.
“윗선 약속으로 이해했다…바보같이 믿었다”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김 전 대표는 이후부터 입장을 바꿨다. 당시 검찰 측은 자신이 BBK 지분 100%를 갖고 있고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라며 제출했던 이른바 이면계약서를 자신이 위조했다고 진술하는 등 혐의 내용을 대부분 시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귀국한 이후 ‘BBK 특검’이 끝난 2008년 2월까지 줄곧 이명박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지만 같은 해 4월 1심 선고 이후 자세를 바꾼 것이다. 검찰은 그해 6월 “김경준이 대선을 이용해 형사책임과 재산 박탈을 모면하려는 의도로 정치권과 일부 언론을 이용했다”는 결론을 냈다. 즉 기획입국 사건에서 의혹이 불거진 ‘가짜편지 의혹’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이 제기했던 기획입국설의 근거가 된 편지가 ‘가짜’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2007년 대선판을 뒤흔든 사건 중 하나가 기획입국 사건이었기 때문에, 편지의 진위 여부는 필수적으로 따져야 할 대목이었다. 김 전 대표는 당시 태도를 바꾼 이유에 대해 2012년 2월23일 작성한 편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 BBK 1심 선고 후, MB와 BBK 관련에 대하여 말을 바꾼 이유들 :
① 죄 없는 누나(에리카 김 변호사)와 처마저 국제범죄인인도청구로 끌어온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협박, 처마저 이렇게 되면... 걱정.
② 1심 재판에서 아무런 방어권 행사를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증인 신청, 의견서 제출도 제대로 못하였고, 너무 엄청난 형기를 선고받아, 대한민국의 ‘정의’에 대하여 포기, 또 검찰이 항소하여 더 많은 형기 요구와 추가 기소로 협박
③ MB와 BBK 관련 말 바꾸고, ‘한글 이면 계약서’를 위조했다고 하면 검찰이(윗선 약속으로 이해했음)
a. 누나와 처 기소유예 처리 약속
b. 저의 형기 감소 + 미국으로 이송(필요한 형집행순서 변경해 준다 함)
c. 한국에서 이송 전 서울에 있는 교도소에서 구금생활 가능 등
약속하였음. 바보같이 믿었음.
그는 또 같은 날 작성한 편지를 통해 기획입국설 조사 당시 회유와 압박이 있었다고도 적었다.
2008년 기획입국설 조사 당시 민주통합당에 대하여 ‘거래’가 있었다고 거짓 진술하라는 압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고 싶었지만, 전혀 사실도 아니고,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기에 그러지 않았습니다. 민주통합당이 무슨 오해를 하는 것 같아 좀 답답해서 한명숙 대표에게 연락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검찰 ‘회유·협박’이 없었다고 한 적 없음.
- 김기동 당시 검사, 최재경 당시 대검 중수부 기획관에게 사과 편지 쓰라고 압박
- 할 수 없어, 영어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더라고” 애매하게 편지 써서 보냄.
- 다음날, 김기동 검사 서울구치소로 전화하여 “편지가 너무 좋아”… 완전히 왜곡된·잘못된 한글로 편지를 번역, 그리고 각종 언론에 배포. 언론들은 검찰 회유·협박은 거짓이었다고 제가 인정했다는 거짓 내용 기사함.
“2007년 저를 입국시키려 했던 건 박근혜 쪽”
김 전 대표는 편지에서 검찰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 목표로 정하고 있었다고도 폭로했다. 이는 2007년 12월31일 한나라당이 기획입국설의 증거로 내민 편지 때문이었다. 당시 편지에는 “자네가 큰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큰집’은 청와대로 해석됐고, 김씨가 당시 민주통합당 측에서 대가를 받고 입국한 것 아니냐는 ‘기획입국설’의 근거가 됐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2007년도에 저를 국내로 입국시키려고 노력했던 쪽은 민주당이 아니라 박근혜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기획입국설’ 조사 당시 검찰에 그렇게 진술하였지만, 검찰은 한나라당 쪽 입국 개입엔 전혀 관심 없다고 화까지 내면서, 민주당 쪽 인사들을 대라고 압박했습니다. (2012년 3월4일 편지)
무조건 ‘거짓’이라니 어이가 없네요. 김기동 검사가 저에게 ‘기획입국설’ 수사 목표가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했어요. 이혜훈·유영하도 조사했지만, 민주당 의원 조사와 강도 차이가 현저히 있었는데, 마치 검찰이 똑같은 강도로 수사한 것같이 주장하다니... 민주당 의원실과 국정원을 압수수색했지만, 한나라당 의원실을 압수수색했다고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2012년 3월18일 편지)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 한나라당 쪽의 민주당 쪽 상대로 제기한 고발/고소 사건들이 많았는데(‘기획입국설’에 대하여) 다 거짓으로 밝혀지니 민주당 쪽이 한나라당 쪽 상대로 제기한 ‘무고’ 소송들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민주당 접근 근거를 강요하였습니다. 또 신경화·신명 형제도 고소하지 말라고 부탁하여서 그때 고소하지 않은 것입니다. (2012년 6월5일 편지)
결국 BBK 기획입국설의 근거가 된 편지 작성 경위에 대해 2011년 3월 중요한 폭로가 나왔다. 편지 작성자로 지목된 신경화씨의 동생 신명씨가 “대선 당시 언론에 실린 형 명의의 편지는 이명박 대통령 가족과 측근의 부탁으로 내가 날조해서 쓴 것”이라고 했다.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형에게 도움을 주려고 편지를 꾸며 썼다는 것이다. 이 가짜편지는 이명박 대선캠프 상임특보이던 김병진씨를 거쳐 은진수 BBK법률지원팀장을 경유해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에게 전달됐다. 신씨는 편지 작성의 배후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이 전 대통령의 손위 동서인 신기옥씨를 지목했다.
이를 토대로 검찰은 2012년 가짜편지 작성 경위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에 응한 신명씨는 “2008년 5월28일 검찰 조사를 받을 때 ‘(편지를) 혼자 작성했다’고 자백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2012년 7월 가짜편지 사건 관련자를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가짜편지 작성의 ‘주범’으로 양승덕 경희대 행정실장을 지목하고, 배후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찰은 양 실장이 김 전 대표의 감옥 동료인 신경화씨의 동생 신명씨에게 들은 내용을 이용해 한나라당 쪽에 공을 세우기 위해 편지의 초안을 작성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2008년 김 전 대표에 대한 수사 당시 외압과 협박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또 가짜편지 작성 경위를 2008년에 알았음에도 은폐한 것 아니냐는 질문엔 “당시 가짜편지 작성 여부는 수사의 핵심 사안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당사자인 김기동 사법연수원 부원장은 기자와 7월28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통해 ‘목표는 노무현’이라고 했다는 김 전 대표의 주장에 대해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어 김 전 대표가 사과편지를 쓰도록 압박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실무근이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수사”
김 전 대표는 또 편지에서 검찰이 한나라당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수사를 한 것 같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2007년 대선 당시 BBK 실소유주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이후, 모든 초점은 ‘기획입국설’로 옮겨갔었다. 한나라당은 당시 국정원의 개입 의혹까지 제기하며 이 사건에 불을 지폈다. 당연히 이 때문에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 사이에 고소·고발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는 편지에서 당시 검찰의 수사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을 조사한 이유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서로 고소·고발·무고 등을 했는데, ‘기획입국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니, 한나라당에게 ‘무고’ 면죄부 주기용 조사 분위기였습니다.
국정원 개입 조사근거도 하도 엉터리라서 좀 기가 막혔습니다. 신경화의 거짓말과 다음이 근거였습니다. LA 부총영사가 국정원 요원이래요(저야 금시초문) 그런데, 부총영사가 하○○과 통화를 한 적이 있대요.… 그러니 부총영사→하○○→누나(세 명이 통화) “누나가 국정원과 협상했다”식 주장이에요. 이런 식이면 누구나 국정원과 협상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사건 등장인물 중 현재까지 사법처리를 받은 인사는 없다. ‘가짜편지’ 사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던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은 현 자유한국당 대표가 됐다. 또 김 전 대표를 만나러 미국에 찾아간 것으로 알려진 이혜훈 의원은 현 바른정당 대표다. 한편 이혜훈 대표는 “내가 김 전 대표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 갔다는 것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며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김 전 대표를 직접 만나 입국 조건을 제시했다는 의혹을 받은 유영하 변호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부터 현재 재판까지 담당 변호사를 맡고 있다. 반면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정봉주 전 민주통합당 의원은 선거법 위반 및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살았다.
2012년 말까지 김 전 대표를 도왔던 유원일 전 의원은 이 사건을 두고 “너무 뻔한 사실을 두고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던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 정도 자료들이었으면, 진실에 대한 접근은 거의 다 이뤄진 것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검찰은 당시 아무런 결론도 내지 않았다. 있는 사실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BBK 사건에 대해 궁금해하는 일부의 시각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은 참 희한한 사건”이라며 “다시 되짚어보고 싶은 사건 중 하나”라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아마 공소시효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전혀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재조사는 힘들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 요구가 나왔다. 정진우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은 6월22일 논평을 통해 “검찰은 이제 자유인의 몸이 된 김경준씨의 진술을 경청하고 그것을 토대로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재수사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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