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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어서 더 뜨겁고 원숙한 사랑

문화·패선·취미·노후

by 21세기 나의조국 2017. 8. 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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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어서 더 뜨겁고 원숙한 사랑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 입력 2017.07.29. 18:00 


 

[배정원의 섹슈얼리티] 졸혼·황혼이혼으로 가족 울타리 벗어나는 독신중년들의 불타는 로맨스

최근 중년들의 로맨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년의 로맨스 하면 쉽게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떠올린다.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평범하고 한적한, 그러나 무료한 주부의 삶을 살고 있던 프란체스카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로 매력 있는 독신남인 킨케이드를 만나면서 펼쳐지는 늦게 찾아온 사랑 이야기다. 이 책은 출판된 후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50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영화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많은 중년들의 아쉬운 마음에 불을 질렀다.

 

졸혼에 따른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기대감


《메디슨카운티의 다리》가 그렇게 전 세계의 중년들에게 어필했던 이유는, 아직 늙지는 않았으나 이미 젊지는 않은 나이의 중년들이 살아온 삶의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마지막 로맨스’에 대한 기대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룰 수 없는 장애가 있는 사랑이 더 열렬하듯, 이미 결혼해 배우자와 자식들을 가진 그들로서는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가 겪는 설렘·갈등·결단에 이르기까지의 공감이 누구보다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도 중년 이후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는 죄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결혼을 하지 않고 중년에 이르렀거나, 혹은 결혼했었더라도 다시 독신의 자리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아직 너무나 젊고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활발하기 때문에 다시 언제든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요즘 TV에서도 《불타는 청춘》을 비롯해 중년들의 사랑을 그리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랑이 더 이상 20~30대 청춘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중년의 로맨스를 담은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또 그동안 가졌던 나이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있다. 실제로 55세 하면 예전에는 노년의 시작이라 보았지만, 지금은 60대도 너무 젊어서 청년 같은 이들이 너무 많다. 이런 추세를 따라 최근 유엔에서도 ‘19세까지 청소년, 20세부터 65세까지는 청년, 79세까지는 중년, 99세까지는 노년, 100세부터는 많이 산 사람’으로 연령 기준을 바꾸었다. 이 기준으로 보면 각종 노인 복지 혜택이 시작되는 65세는 이제 노인이 아니고, 중년의 시작인 셈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젊음’의 나이가 연장되다 보니 사람들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들이 훨씬 다이내믹해졌다. 황혼이혼·황혼재혼도 많아지는 추세며, 또 사람들이 만나고, 추구하는 삶의 양식도 아주 다양해졌다. 최근 한 연예인의 고백 이후 마치 유행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졸혼’이 대표적이다.


졸혼은 일본의 소설가 스기야마 유키코가 처음 사용한 말로 ‘법적인 결혼 상태는 유지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의무와 역할에서 벗어나 여생을 자유롭게 사는 형태’를 의미한다. 남자보다 여자들이 ‘졸혼’을 더 먼저 많이 요구하는 이유는 결혼생활에서 여전히 여자들에게 더 많은 의무가 요구되는 까닭이겠다. 그래서 자녀가 교육 과정을 다 마치거나, 독립하고 난 후 그 뒤의 여생은 의무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독립선언이기도 하다.


졸혼의 목적은 크게 결혼 안에서 강요받았던 지나친 봉사와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사생활의 자유다. 이 사생활의 자유라는 부분은 바로 ‘로맨스에 대한 기대’를 전제하고 있다. 즉 다시 찾아올 사랑에의 기대를 감추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졸혼은 별거와 다르다. 그것은 어쩌면 개방결혼, 혹은 다자간의 사랑을 결혼 안에서 인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졸혼은 어찌 보면 이혼에 대한 안전망처럼 보이지만 필경 이혼으로 가게 되어 있다.


성에 대해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관계를 오픈하고, 사랑과 섹스를 나누는 ‘폴리 아모리(Poly Amory)’가  가능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결혼 안의 구속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찾는다. 그래서 쿨하게 졸혼을 선언했지만, 상대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또 누군가를 좋아하면 뭔가 사 주고 돌보고 싶은 것이 당연한 사람의 심리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분리 문제가 따라온다. 결국 졸혼은 법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임의의 형식이고, 법적 울타리만을 둔 채 정서적·육체적 구속이 모두 해제된 느슨한 동거이기 때문에 배우자 간에 심각하고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졸혼 말고도 앞으로는 인생의 경험이 짧아 윤리의 경계가 보다 선명한 젊은이들과 달리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경험이 많은 중년들이 더욱 다양한 삶의 양식을 취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직 우리 사회는 아니지만, 서구사회에서는 결혼 안의 구속을 원하지 않는 이들이 이미 동거라는 양식을 합법적인 체제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동거인에게 보호자로서의 권리나 상속 등 배우자를 통해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을 보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혼이라고 해서 함께 생활을 하고 있는 남녀의 경우, 상속의 권리를 일부 허용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실제로 동거인이 배우자와 같은 복지 혜택을 받도록 정책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평일엔 각자 생활, 주말엔 동거하는 ‘주혼’도


세계적으로도 요즘은 ‘따로 또 같이’ 동거하는 방식이 선호되는 추세다. 독신남녀가 결혼은 하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살면서, 서로를 방문하고,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나누는 스웨덴의 사보(Sarbo)나 미국의 LAT(Living apart together) 같은 방식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는 ‘주혼’이라고 해서, 독신남녀가 평일에는 각자 자기 집에서 생활하고, 주말이 되면 만나 같이 사는 동거 방식이 퍼져 가고 있다. 공통적으로 이들 방식은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정서적으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어쨌든 졸혼·황혼이혼 등은 가족으로 묶였던 이들을 풀어주고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또 다양하게 ‘헤쳐 모여’를 할 것이다. 즉 우리 사회에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독신중년들이 넘쳐날 것이란 뜻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새로운 동거와 결혼을 시작할 것이다. ​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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