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프랑스 총선 1차 투표 결과 50여년간 지속된 제5공화국 사상 초유의 정계 개편이 확실시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0석'의 중도신당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와 민주운동당 연합이 18일 결선투표를 치르기도 전에 하원 577석 중 최대 455석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21세기에 또다시 프랑스가 '공화국 독재' 시대를 맞게 됐다는 경고가 무성하다.
우선 1차투표 개표 결과는 충격적이다. 13일 <프랑스24> 방송은 "여당 연합은 최대 79%의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통의 양당 체제를 이룬 공화당은 21.56% 득표율로 기존 215석에서 최악의 경우 85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까지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은 불과 9.5% 득표율로 기존 의석 277석에서 10분의 1를 건지는 궤멸 수준으로 몰락했다.
다만 대선 결선 투표에 진출했던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은 13.2% 득표율에 최대 10석 확보에 그친 반면, 극좌 후보로 대선 막판 돌풍을 일으킨 장뤼크 멜랑숑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11% 득표율이지만 결선투표에서 극우 경계심리가 강한 표심이 작용해 최대 21석을 거둬 상대적으로 선전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처럼 프랑스 사상 초유의 정계 지각변동이 확실시되지만, 마크롱이 '민주적 독재' 권력을 갖게 된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해 숱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영국의 <로이터> 통신은 "사상 최저 투표율이 의회를 장악할 마크롱의 앞날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총선 1차 투표 집계 결과 마크롱의 중도신당은 32.32%를 득표했다. 하지만 <프랑스24>는 "유권자의 51.29%가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다"면서 "사상 최악의 투표율은 경쟁자들을 궤멸시킬 정도의 압승에 중대한 제약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도신당 앙마르슈의 득표율을 총 유권자 대비로 따져보면 불과 15%다. 국민 15%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거의 80%에 달하는 의석을 싹쓸이하는 극단적인 '과대 대표' 현상으로, 결국 프랑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개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프랑스 일간지 <우에스트 프랑스>의 칼럼니스트 미셸 우르부아는 "통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지와 함께 길거리 투쟁보다는 야당의 견제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총선 결과는 이도 저도 아니다"고 우려했다.
독일의 일간지 <쥐트도이체자이퉁>은 "강력한 야당이 없어진 정계 개편으로 프랑스는 독재체제가 될 수 있다"면서 "이번 프랑스 총선으로 프랑스가 공화국 독재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러니하다"고 꼬집었다.
마크롱의 이번 총선 승리는 1968년 샤를 드골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당이 70%가 넘는 의석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된다. 당시에도 드골 덕에 당선된 의원들은 '고무도장'이라는 이름의 예스맨들로 불렸다. 마크롱의 중도신당 후보들은 절반이 의회 경험이 전무한 시민단체 등 출신이다. 이들은 "당선된 이후 '거수기'로 기능할 것"이라는 조롱을 야권으로부터 받고 있다.
지난달 대선에서 결선투표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젊은층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장 뤼크 멜량숑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충성하는 신생정당에게 의석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멜랑숑은 "마크롱은 대선 1차 투표에서 4명 중 1명도 안되는 득표를 했을 뿐"이라면서 마크롱이 민주적 정통성을 가진 대통령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마크롱은 1차투표에서 24%의 득표율로 2위인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후보를 불과 3% 차이로 따돌리며 결선투표에 올랐었다. 결선투표에서 66%가 넘는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긴 했지만 25%가 넘는 기권표가 나와 "프랑스 대선 사상 최악의 정치 혐오성 표심이 분출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문에 멜량숑은 "엄청난 투표 기권율은 프랑스에서 노동자보호법을 파괴하거나 자유를 억압하거나, 부자에 영합하는 정책을 위한 다수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이런 정책들이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들이다"고 경고했다.
< 로이터> 통신은 "여당연합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이 된다면, 은행가 출신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에 맞설 걸림돌은 강력한 노조연맹뿐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펼친 '악수대결'의 승자로 유럽에서도 인기가 치솟고 있다. 하지만 마크롱의 앞날에 대한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AP=연합
'강한 프랑스' 복원 염원 실린 '마크롱 돌풍'에도 우려의 목소리
마크롱 정부에서 겪을 위기는 외교 분야에서도 경고되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마크롱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맞짱'을 뜨는 쇼맨십으로 단기적으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 타임>은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5월말 트럼프의 첫 해외순방인 나토 정상회의와 G7정상회의에서 트럼프와의 '악수 대결'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두 차례 정상회의에서 마크롱은 지나치게 상대방의 손을 꽉 잡으며 기를 죽이는 방식으로 악수를 하는 트럼프와 첫 대면하는 입장에서, 더욱 힘있게 악수하는 역공을 펼쳤다. 심지어 두번째 '악수 사건'이 벌어진 G7 정상회의에서는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 트럼프의 자존심을 일부러 건드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트럼프 근처에 서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먼저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뒤늦게 트럼프에 악수를 건넸고, 트럼프가 손을 빼려고 해도 계속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 타임>은 "트럼프와의 악수에서 보여준 태도는 마크롱 스스로 인정했듯 계획된 것이었으며, 마크롱의 악수는 트럼프에게 조금도 지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했다.
< 타임>에 따르면, 트럼프는 유럽에서 인기가 형편없는 정치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때문에 프랑스 국민을 포함한 유럽인들이 마크롱의 첫 국제무대 데뷔전에서 자기보다 나이도 두 배나 많은 최강대국 미국 대통령에게 보인 당당한 태도를 자기 일처럼 속시원하게 느꼈다고 한다.
총선 1차투표에서 마크롱에 압승을 안겨준 유권자의 표심에는 마크롱의 이런 행동에 대한 보답 심리도 있었다는 분석이다. 단순 보답 심리뿐 아니라 마크롱에 힘을 실어준 유권자들의 표심 속에는, 유럽의 중심으로서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강한 프랑스'를 복원시켜달라는 염원도 담겨있다고 분석했다.
관련해 <타임>은 "마크롱이 세계화와 환경, 인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제 현안들에 대해 트럼프의 대척점에 있는 세계의 지도자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려고 한다"면서 "이런 행보가 단기적으로는 그의 인기에 도움이 되겠지만, 장기적인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 유럽 담당 보좌관 출신으로 현재 범유럽 싱크탱크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 런던지부장를 맡고 있는 제러미 셔피로는 "마크롱같은 EU 지도자들은 트럼프에 대해 드러내놓고 대립을 하는 방식이 위기의 순간에 어떤 문제를 초래할지 잘 모르고 있다"면서 "트럼프는 미국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대통령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은 틀렸고,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현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부 정치논객들은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정 탈퇴 결정을 내린 배경에 유럽 지도자의 트럼프 홀대 요인이 작용했을지 모른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마크롱의 악수는 트럼프를 짜증나고 당황하게 만들었다"면서 "파리협정 탈퇴를 결정한 상당한 요인이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셔피로는 "쉽게 자존심이 상하는 변덕스러운 인물이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점을 고려해 대응을 해야 하는데, 유럽 지도자들이 그런 준비가 덜 되어 있다"면서 "테러 사태, 전쟁 등으로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쩔 것이냐"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