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5월 10일 국회대로를 지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돌아왔다. 9년 만이다. 2003년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와 우여곡절을 겪고 2008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떠났던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이 돼 돌아왔다.
문 대통령은 임기 첫날인 5월 10일 취임식에 앞서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원내 4개 야당 대표를 방문했다. 이날 오후 3시30분쯤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서 제1호 업무지시를 청와대 관료들에게 전달했다. ‘일자리위원회 설치 및 운영방안’이었다. ‘공공일자리 81만개 창출’ 공약을 지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문 대통령은 11일까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일본 총리 순서로 통화했다. 12일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임기 중에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앞으로 5년 동안 무엇을 할지 보여주는 사흘이었다.
대통령은 출근길 시민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조국 서울대 교수를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발탁했다. 소탈한 모습과 파격적 인사는 ‘참여정부 시즌2’였지만 구체적으로 정책의 내용과 실현방식은 다를 것임을 예고했다. 무엇이 달라질까.
“진보적 성장이 무엇인지에 관해 우리 당에서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일자리가 어떻게 ‘1번’으로 오게 됐느냐는 질문에 김용익 민주연구원장이 답했다. 김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출신으로,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의료보험 통합 추진에 참여했다. 참여정부 후반기 대통령비서실 사회정책수석비서관(2006~2008년)을 지냈다.
비례대표로 당선돼 19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했다. 2015년부터 민주당 정책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원장을 맡아 지난 총선과 이번 대선의 정책 설계를 담당했다. 김 원장은 “참여정부 때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고민했다. 성장과 분배가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상승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성장은 기업과 시장을 주도로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 분위기를 지배했다.
그러나 시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이런 식으로 불평등 구조로 만들어놓고 복지로 불평등 구조를 완화하는 것이 맞는 방식인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박정희식 성장이 아닌 진보적 성장을 찾아야 했고, 생산을 하는 시장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공약으로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론’이 그 결과다.
진보적 성장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참여정부의 성장론은 어땠을까.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시 세계사적 전환점에 직면했습니다. 도약이냐 후퇴냐, 평화냐 긴장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각 분야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해야 합니다. 외환위기를 초래했던 제반 요인들은 아직도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시장과 제도를 세계 기준에 맞게 공정하고 투명하게 개혁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로 만들고자 합니다.” 정부의 적극적 외교정책으로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이뤄 수출시장을 선점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해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약자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개방화에 따른 충격은 김대중 정부 때 틀이 마련된 복지제도를 확대해 보완하고자 했다. 이 모든 개혁의 추진을 위해 참여와 자치, 분권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약속했다.
북한이 핵개발을 본격화하고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우경화 등 동북아 갈등이 더 깊어지면서 ‘동북아 균형자’론은 불가능한 꿈이 된다. 재벌개혁도 실패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참여정부는 계속 ‘투자부진론’에 휘둘렸다. 기업의 투자가 부진해서 고용이 저조하고 경제가 침체된다는 것이다. 재벌은 개혁해야 하지만 외국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은 보호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논리도 대중적으로 먹혔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 재벌개혁이 실패했던 이유다. 양극화, 고령화, 저출산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참여정부는 2006년 8월 고령화와 양극화 등 다양한 ‘복지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다며, 2030년까지 한국을 복지국가로 이끈다는 목표를 최초로 제시한 ‘함께 가는 희망한국 비전2030’을 발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공약에 반영된 ‘생애주기별 사회서비스의 확충’도 이 문건에 이미 담겨 있다. 그러나 이때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자원을 다 잃고 고립돼 있었다.
두 번의 패배로 얻은 ‘민주당식 성장담론’
참여정부 때 공직에 있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은 초반기에 복지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해 복지에 관한 공약 자체가 별로 없었다. 늦게 중요성을 인식해 정책을 펼치려 할 때는 이미 권력을 잃어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관료’와 ‘재벌’만 곁에 있었는데, 관료는 큰 변화를 싫어하고, 재벌은 의료영리화 등 복지정책을 기회 삼아 새로운 돈벌이 영역을 개척하려 했다”고 말했다.
민주당 정부(문재인 정부)는 일자리를 매개로 한 독자적 성장론을 추진하고 있다. 김 원장은 “비전2030 때만 해도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이었는데 현 정부의 기조는 ‘소득주도 성장론’”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성장을, ‘복지’가 분배를 담당한다고 나눠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일자리’를 통해 사회 제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일자리와 복지를 통해 인권을 신장하면서 구매력도 키우고, 구매력이 생산을 자극해 침체에 빠진 경제를 자극하고, 혁신 동력을 제공해 생산이 더 잘 일어나도록 합니다. (조세와 복지뿐 아니라) 시장 자체로도 불평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를 처음부터 줄여 가계들의 격차를 줄이고 더 많은 돈이 돌아가도록 할 것 입니다. 참여정부와 이후의 정부들은 작은 정부 논리에 사로잡혀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늘리지 않았는데, 소방관과 경찰 등의 일자리를 늘리면 치안이나 재난과 관련된 국민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보건의료 일자리를 늘리면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공공일자리 81만개 창출, 중소기업이 정규직 2명을 고용하면 정규직 추가고용 1명분의 임금을 국가에서 보장하는 추가고용 지원제도,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및 중소기업벤처부 신설 등의 공약이 국정 제1과제로 추진되고 있는 까닭이다.
일자리 공약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분야가 복지분야다. 국가치매책임제, 15세 이하 어린이 병원비 부담률 완화, 병원비 본인부담금 100만원 상한제,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의 급여항목 전환 등이 대표적이다. 김 원장은 “정책을 정책답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보건의료정책’이라는 이유로 의료영리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현 정부는 보건의료정책은 국민 건강에, 노동정책은 노동문제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 차원에서 새로운 성장담론과 정책비전이 공유돼 있다는 것이 참여정부와의 결정적 차이다. 민주당은 대선에 두 번(2008년, 2012년) 패했다. ‘민주당식 성장담론’을 가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더 절실해졌다. 비록 제1당이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19대 국회에서 은수미·홍종학 전 의원 등 진보성향의 학자와 시민사회 활동가가 비례대표 명단에 포함돼 국회에 입성했다. ‘사회적 경제’ 등 유행하던 경제담론에 대한 학습과 토론이 의원들 사이에서 이뤄졌다. 민주당이 집권한 지방정부에서의 성공적 공약이 당에 보고되고 대선공약으로 만들어졌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서울시, 광주 광산구, 서울 노원구 등에서 먼저 시도됐다.
재벌개혁 정책도 차이가 있다. 입법을 통한 개혁 외에도 행정수단을 통한 개혁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점도 차이다. 민주당의 대선공약 마련에 참여한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재벌개혁 실패의 책임에 흔히 대통령의 의지를 들곤 한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됐던 것이지 의지 탓만은 아니다. 1987년 고도성장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재벌개혁안은 ‘경제는 성장하고 기업은 돈을 번다’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지금은 성장이 멈췄고 재벌은 부실해졌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법 개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법 개정에만 매달리면 사전규제 내용만 담은 법안을 마련하다 (이해관계자의 반대와 야당과의 협상으로) 지지부진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 현행법을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국 부활, 박근혜 정부 시절 금융위원회가 추진했지만 지지부진했던 금융산업 통합감독 시스템 강화 등이 그 예이다.
김 소장은 “벤처에 투자해야 하는 자본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문제다. 한국의 자본시장은 거의 대기업이나 은행 자회사, 계열사로 보수적이다. 이들의 시장 진입 비용을 높이는 것이 규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방식의 규제에 ‘재벌개혁의 후퇴’라는 논란도 있으나, 실용적으로 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복지공약 재원 확보 어떻게 할 것인가
2013년 12월 26일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로텐더홀 계단에서 철야농성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특검의 시기와 범위를 논의한다는 여야 지도부 4자 회담 합의사항 이행을 비롯해 ‘남양유업방지법’ 등 10대 민생법안의 연내 처리 등을 요구했다. / 박민규 기자
청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세저항’과 ‘이해관계자의 반대’를 돌파하는 능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비전2030은 한 세대 뒤를 바라보고 국가의 발전전략을 짠 최초의 사례로,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밝힌 멋진 기획이지만 나오자마자 사장됐다. ‘1100조원에 달하는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란 질문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 위원장은 “민주당은 정의당만큼은 못해도 강한 복지공약을 내세웠다. 35조원 재원 확충방안이 나와 있지만 3분의 2가 지출개혁을 통해 마련하겠다는 내용이다. 얼마가 마련될지 알 수가 없다. 이미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짤 만큼 짜서 지출개혁으로 더 이상 돈을 많이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전망한다”고 말했다. 공약 설계에 참여한 한 연구자는 “현재 민주당에는 참여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 트라우마로 증세에 알러지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며 “문대통령이 그 여론을 뚫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정의당은 법인세 인상과 사회복지목적세(오직 사회복지정책의 확충에만 사용되는 세금) 신설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바른정당도 법인세 인상을 주장했다. 오 위원장은 “참여정부 때와 달리 국민들이 무상급식 등 복지의 수혜를 많이 경험했다. 민주당 정부가 증세에 대한 적극적인 캠페인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 당장 증세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찬반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동의 여론이 더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방 교수는 “과거와 달리 재벌에 대한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재벌개혁에 유리한 상황”이라면서도 “반면 노동과 관련해서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과 대기업 중소기업 격차 문제의 심각성은 많이 인식하고 있지만, 개선 방법으로 노동조합의 강화, 단결권 강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 지지자 일부가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정권의 성공을 위해 민주노총이 상반기 파업을 일으킬 경우 적극 저지하겠다”는 내용을 올리고 널리 공유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 원장은 “지금은 참여정부 때와 달리 더 이상 신자유주의에 얽매일 상황이 아니다. 촛불도 있었다. 조건은 더 없이 좋다”고 말했다. 참여정부가 처했던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이 묻어나는 말이다. 3기 민주정부는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