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규 입력 2017.03.28. 14:14
러시아가 실효지배하는 쿠릴 4개섬(일본명 북방영토)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최근 본격적인 대화에 나섰다가 서로 입장차만 확인하고 돌아섰다.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을 일본의 투자를 받아 개발하려는 생각임을 드러냈다. 막대한 경제 협력을 대가로 이 섬들을 돌려받는 계기를 만들어 보려던 일본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 됐다.
◆‘특별한 제도’는 러시아 마음대로?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러·일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특별한 제도’를 만들고 쿠릴 4개섬에서 ‘공동경제활동’을 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러시아에 의료, 에너지, 도시정비 등 8개 분야에 걸쳐 3조원대의 경제협력을 약속했지만 4개섬의 일본 귀속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러시아에 돈만 퍼주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비판이 거셌고, 아베내각 지지율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당시 아베 총리는 영토 반환에 필요한 평화조약 체결을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자평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6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악수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
이번 차관급 협의에 대해 교도통신은 “러시아의 생각은 ‘공동경제활동이 평화조약 체결의 중요한 한 걸음’이라는 일본의 인식과 다르다”며 “개발이 늦어진 지역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투자를 받아내려는 것이 속내”라고 지적했다.
◆미군 경계해 양보 못하는 러시아
일본의 ‘돈보따리 공세’에도 러시아가 쿠릴 4개섬의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바로 이틀 뒤 명확하게 드러났다. 지난 20일 도쿄에서 양국은 외교·국방 장관 회의(2+2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2013년 11월 도쿄에서 처음 열렸으나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중단됐다가 3년4개월 만에 재개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양국은 북한 핵·미사일 문제 대응에 공조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북한의 위협과 미국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의 일본 배치 및 군비 확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미국이 아태지역에서 진행 중인 MD 전개는 이 지역에 심각한 위험이 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미군의 진출을 경계하고 있음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러시아는 쿠릴 4개섬을 일본에 넘겨줄 경우 이 지역에 주일미군이 기지를 세울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일 안보조약 5조는 “일본의 행정력이 미치는 영역에 대한 무력공격을 받을 때 일본과 미국은 공통의 위험에 대처하도록 행동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미군이 이곳에 기지를 건설할 경우 러시아로서는 태평양 지역으로 진출하는 길목에서 미군 감시를 받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오히려 쿠릴 4개섬에 사단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신형 지대함 미사일도 신규 배치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이번 2+2 회담에서 러시아 측에 항의했지만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사단 배치는 국토 안전을 위한 것이고, 지대함 미사일 도입은 해양에서도 국경선을 100% 지키려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쿠릴 4개섬 아베정권 추가 악재 될 수도
러시아의 ‘먹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수록 아베 정권의 부담은 커질 전망이다. ‘1강’ 체제를 구축하며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아베 정권은 최근 ‘아키에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유지 헐값 매각 과정에 아베 총리와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아베 정권을 뒤흔들고 있다. 아베 총리는 관련성을 전면 부인하지만 일본 국민 다수가 이를 믿지 않고 있다. 교도통신의 25∼26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총리의 해명을 납득하지 못한다’는 응답이 62.6%에 달했다. 아베 내각 지지율은 52.4%로 한 달 반 전보다 9.3%포인트나 하락했다.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여전히 절반을 웃돌고는 있지만 아키에 스캔들이 장기화할 경우 추가 하락이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러·일 간 공동경제활동 협의가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야당에 추가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다음달 하순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계획이다. 이 자리에서 쿠릴 4개섬과 관련해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아베 총리의 외교 성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막대한 돈을 러시아에 투입키로 한 것에 대한 책임 추궁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다음달 러·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가 4개섬 문제와 관련해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악재가 장기간 해소되지 않을 경우 내년 9월 집권 자민당의 총재 선거에서 아베 총리가 3연임에 실패할 수도 있다.
◆ G7의 ‘러시아 경제 제재’ 공조 사실상 와해
일본이 쿠릴 4개섬(일본명 북방영토)에서의 ‘공동경제활동’을 앞세워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경제협력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G7(주요 7개국)의 ‘러시아 경제제재’ 공조가 와해됐음을 의미한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의 병합을 선언하자 G7은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주도했고, G7 회원국인 일본도 러시아와의 비자 발급 절차 완화 협상을 중단하는 등 제재에 동참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해 6월 러시아 소치로 달려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났으며, ‘새로운 접근’을 통해 쿠릴 4개섬 반환 협상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지만 아베 총리는 러시아 방문을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2월엔 푸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쿠릴 4개섬에서의 공동경제활동에 합의했다. 그 대가로 일본은 러시아에 3조원 규모의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지난 20일 도쿄에서 열린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국방장관 회의(2+2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손을 잡고 웃고 있다. 왼쪽부터 러시아의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 이나다 도모미 방위상. |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대러 관계 회복에 전향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구체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정부 주요 인사의 친러 성향 문제가 잇달아 논란이 되고 있는 ‘러시아 스캔들’ 탓에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G7 회원국인 일본을 공조에서 이탈케 한 것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큰 성과로 볼 수 있다.
한편 우크라이나 사례를 옆에서 지켜본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고 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최대 4000명 규모의 다국적 부대를 배치했다.
도쿄=우상규 특파원 skw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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