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참여 의사에 "끝난 뒤 보자" 싸늘한 답변만..중국 치중하다 실기
한경비즈니스입력2015.10.30. 08:57
세계 최대 경제 블록이 탄생했다. 지난 5일 타결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일본 등 12개국이 참가한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상품·서비스·투자·지식재산권·환경·노동 등 거의 모든 무역 이슈도 망라했다. 세계경제 질서를 다시 쓸 협정이란 평가다.
이런 TPP에 한국이 빠졌다. 정부는 관심만 표명해 오다가 이제야 뒤늦게 TPP에 참여하겠다고 말한다. 정부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가입하겠다는 것일까. 협상 초기 미국 정부의 참여 제안을 걷어찼던 정부다. 이를 두고 현 정부는 전 정부의 탓으로 돌리고 전 정부는 TPP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거나 미국이 한국의 참여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여 기회를 날린 것은 현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아니었다. 뒤늦게 워싱턴으로 날아가 참여를 타진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끝난 뒤 보자”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었던 것인가.
한일 FTA, 발등의 불로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 11.4%, 세계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36.8%, 세계 교역 비율 25.3%. 메가 FTA로 불리는 TPP의 경제적 위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TPP의 의미를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TPP에 주목해야 할 다른 이유도 많다. 뒤늦게 가입하겠다고 나선 한국으로선 특히 그렇다.
무엇보다 TPP는 미국이 국제 통상 규범의 확실한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TPP 타결 직후 “중국 같은 나라가 세계경제 질서를 쓰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주도적으로 세계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선언이다.
둘째, TPP는 ‘최고 수준의 자유화’를 내세운 ‘21세기형 무역협정’이라는 점이다. 관세에 초점이 맞춰진 기존 무역협정을 넘어 투자 규제·지식재산권·노동·환경·국유 기업 등 포괄적 이슈를 모두 다뤘다. 그만큼 TPP는 향후 세계 무역 협상의 레퍼런스가 될 전망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TPP에서 빠지면 기존 FTA 효과의 희석이 불가피하다.
셋째, 협상에 참여하지 않은 한국이 앞으로 TPP에 가입하려면 그만큼 피해 갈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회원국이 역내에서 생산된 중간재를 사용해 최종 제품을 만들 경우 중간재를 자국산으로 인정해 주는 원산지 누적 기준, 국영기업 우대 금지, 부당 규제 철회 요청권, 수산 보조금에 대한 포괄적 금지, 의약품 데이터 보호 기간 등이 그렇다. 이는 곧 공공 등 각 부문의 강도 높은 구조 개혁을 요구한다.
넷째, 한국 정부가 부담스럽게 여기는 농산물 시장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쌀시장 개방이 그렇다. 정부는 TPP에 참여해도 쌀은 양허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조차 농산물 시장을 개방한 마당이다. 일본은 미국산 쌀을 앞으로 13년에 걸쳐 연간 7만 톤까지 무관세로 수입해야 한다. 한국이 과연 이를 피해 갈 수 있을까. 쌀시장 개방이 아니면 다른 공산품이나 서비스업에서의 대폭 양보가 불가피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TPP에 가입하려면 일본이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 한국에 비해 FTA에서 열세이던 일본은 이번 TPP로 일거에 만회하는 기회를 잡았다. 나아가 글로벌 가치 사슬에서 미국과 함께 일본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게 분명하다. 당장 일본 자동차 산업과 부품이 더 큰 날개를 달 전망이다.
해외에서 일본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으로선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결국 한국이 이에 대응하려면 TPP 가입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일본이 뒤늦게 TPP에 가입하려는 한국과의 협상에서 공세적 시장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사실상 한일 FTA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통상 조직 이관 때부터 예고된 참사
그러면 한국 정부는 왜 때를 놓친 것일까. 현 정부 관계자와 전 정부 관계자 말로 미뤄 보면 몇 가지 잡히는 게 있다. 우선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이다. “2008년 미국이 TPP 참여를 선언할 당시 이미 미국과는 FTA를 타결한 데다 중국과 FTA 협상을 진행하던 상황이어서 여기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이명박 정부가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비공식 참여 제안을 사양했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면 현 정부는 잘못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이 미적대는 사이 2013년 3월 일본이 TPP 참여를 전격 선언하면서 국제적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당시 FTA에서 한국에 밀리던 일본으로선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일본이 참여를 선언하자 현 정부도 그해 11월 TPP에 관심을 표명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이게 전부였다.
현 정부는 일본을 마지막으로 TPP 참여의 문이 닫혔다고 말한다. 과연 그랬을까. 현 정부 초기까지만 해도 미국은 여전히 한국의 참여에 관심이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오히려 한국 쪽에 있었다는 지적이다. 한중 FTA 타결, 한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등 친중 노선이 한국의 참여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멀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TPP 참여에 소극이었던 정부의 속내가 정작 따로 있었다는 분석들도 있다. 정부가 한미 FTA 타결과 비준 과정에서 거센 반미 감정을 떠올리며 또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TPP 참여를 꺼렸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각도에선 일본의 참여로 한국의 TTP 참여가 곧 한일 FTA가 되는 데 대한 부담이 컸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어쩌면 한국 정부는 내심 TPP가 끝내 타결되지 않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TPP가 타결되면서 정부의 오판과 실기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됐다. 정부가 그동안 성과로 내세우던 한미 FTA 등의 선점 효과까지 희석돼 버렸다. 외교부에 있던 통상 조직을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한 박근혜 정부의 통상 외교 수준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안현실 한국경제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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