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우승을 거둔 삼성 선수단이 두산 우승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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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밤.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한 팀은 14년 만에 감격적인 4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또 한 팀은 통합 5연패에는 실패하며 준우승을 달성했다.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패한 삼성 선수들은 승리한 두산 선수들의 우승 세리머니와 시상식을 끝까지 지켜보며 '예'를 다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2015 KBO리그도 막을 내렸다.
두산 베어스는 31일 오후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5 KBO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13-2로 승리했다. 지난 1차전에서 8-9 역전패를 당했던 두산은 이후 4연승을 달리며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1982년과 1995년, 2001년에 이어 두산 구단 역사상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이날 9회말 2아웃. 2사 주자 없는 상황. 두산의 마무리 투수 이현승이 배영섭을 삼진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현승은 양의지를 향해 폴짝 뛰어 올라 안겼다. 이미 더그아웃에 있던 두산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14년 만의 감격적인 우승. 이에 반해 삼성 선수단은 조용했다. 그들은 3루 파울라인 위에 선 뒤 끝까지 응원을 해준 삼성 팬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어느 한국시리즈와 다를 바 없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3루 측 더그아웃 안쪽. KBO 관계자로부터 류중일 감독을 향해 "이제 인터뷰만 하신 뒤 빠지시면 됩니다"라는 메시지가 전달됐다. 하지만 류중일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아닙니다. 우리 선수들 남아서 도열할 것입니다".
도열해 있는 삼성 선수단. /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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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SK에 패한 삼성이 그랬고, 2011년과 2012년 삼성에 패한 SK가 그랬다. 2013년에는 두산이, 2014년에는 넥센이 준우승을 차지한 뒤 쓸쓸하게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이날 류중일 감독은 경기 후 "프로의 세계에서 2위는 비참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최근 몇 년 간 2위 팀들은 비참한 마음을 안고 쓸쓸한 뒷모습과 함께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두산의 우승 시상식이 열린 순간. 더그아웃 안에 있던 삼성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이 일제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일렬로 도열했다. 삼성 선수들은 두산 선수들을 향해 선 뒤 그들을 응시한 채 박수를 보냈다. 삼성 선수들 뒤쪽에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성 팬들도 보였다.
이어 5차전 데일리 MVP 시상식, 선수단의 메달 수여식, 감독상과 한국시리즈 MVP 시상식에 이어 우승 트로피가 선수단에게 전달됐다. 약 15분 동안 진행된 우승 시상식을 류중일 감독과 삼성 선수들은 묵묵히 지켜봤다. 그리고 공식 시상식 행사가 다 끝난 뒤에야 삼성 선수단은 서서히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삼성은 지난 2011년 아시아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소프트뱅크는 우승 시상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도열한 채 지켜보며 삼성의 우승을 축하했다고 한다. 류중일 감독은 당시 소프트뱅크 감독인 아키야마 고지의 행동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고, 이날 행동으로 옮겼다.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류 감독의 이날 행동에 KBO총재도 크게 놀랐으며 KBO측도 매우 고마워했다는 후문이다.
이와 같은 장면은 다른 종목인 축구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잉글랜드의 축구 1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나 스페인 축구 1부 리그인 프리메라리가에서는 시즌 우승 팀이 확정될 경우, 그 다음 경기 상대 팀 선수들이 경기 전 좌우로 도열해 박수로 예우를 다한다. 그들의 '전통'인 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우승 확정 후 다음 경기서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AFPBBNews=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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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과 삼성 선수들은 서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 치열한 승부가 끝나면 다 같은 동료이자 선후배요 동업자다. 1등의 주인공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모든 팀들은 공평하게 1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 두산 선수들의 우승 시상식을 끝까지 지켜본 삼성 선수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난 4년 간 익숙했던 저 자리. 한 번쯤은…'이라며 여유를 가졌을까. 아니면 '절치부심, 내년에 반드시 두고 보자'라며 이를 악물었을까.
과거에는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는 곧 '패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전세계 2등이라는 엄청난 성과지만,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 혹은 팀에 패하기 때문에 '패자'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전 세계에서 2위 또는 3위에 오르는 것도 참 힘들고 대단한 일인데 말이다. 그래서 은메달을 딴 해외 선수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도 참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1만m 스피드 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이승훈(가운데).
이반 스코브레프(러시아,좌)와 동메달리스트 밥 데 용(네덜란드)이 이승훈을 번쩍 들어올린 채 축하해주고 있다. /AFPBBNews=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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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두산 선수들은 삼성 선수단의 축하 인사를 보며 더욱 대접받는 느낌을 갖지 않았을까. 또 몸가짐도 한 번 더 조심하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지 않았을 지. 상대의 승리를 깔끔하게 인정하는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승의 가치와 품격이 더욱 높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또 승리보다 더욱 값진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준우승 팀의 우승 팀을 향한 '도열 예우'를 내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을까.
삼성 류중일 감독(오른쪽)이 감독 부임 첫 시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태형 감독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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