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지배해 온
국제금융질서에 중대한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미국의 가장 긴밀한 동맹국인 영국을 비롯해 유럽의
경제대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가입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가입 결정은 미국 금융 패권의 약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강화, 그리고
유럽의 독자 노선 본격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베트남전쟁의 여파로 1971년 닉슨 정부가 금태환 정지를 결정하면서(1971년) 세계경제에서의
절대적 우위를 상실한 미국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와 이번 AIIB 사태를 거치면서 상대적 우위마저 중국에 빼앗길 처지에 놓였습니다. 바야흐로
국제 정치경제질서의 지각 변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AIIB 사태의 배경과 의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AIIB는 지난해 10월 베이징에서 중국 주도로 창립됐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 건설을 위한 자금을 대출해준다는 게 목표입니다. 초기 자본금 5백억 달러의 대부분을 중국이 댔고 총자본금 1천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출범 당시 중국, 인도, 사우디, 베트남 등 아시아 21개국이 참여를 결정했으며 오는 31일 파키스탄에서 첫 업무회의를 열어 의결권
배분 등 실무 논의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즉 이달 말까지 가입해야 창립 회원국 자격을 준다는 얘깁니다. 아시아 국가 중 현재까지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 일본, 호주 등 미국의 동맹국들입니다. 미국이 가입을 반대했기 때문이죠. 미국은 중국이 AIIB를 발판으로 소프트 파워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습니다. AIIB가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은행, 그리고 긴밀한 동맹국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경쟁 상대가 되는 것을 극력 꺼리는 것이죠.
미국의 금융패권 무너지다
그런데 지난달 12일 영국이 돌연 AIIB 가입을 선언했습니다. 현 보수당 정부
내에서 AIIB 가입을 적극 밀어붙였던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AIIB 가입은 "영국과 아시아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라며 가입
이유를 밝혔습니다. 영국의 가입 결정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에게도 의외였던 모양입니다. 영국의 권위 있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3일자 기사에서 "영국이 자신의 가장 가깝고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미국의 대외정책에 맞서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라면서 특히 "국제금융체제의
가버넌스와 관련해 영국이중국 편을 든 것은 아마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결정으로
중국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반면, 대부분의 관측통들은 경악했다"고 전했습니다.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난 17일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인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경제대국들이 줄줄이 AIIB 가입을 선언한 것입니다. <뉴욕타임스> 17일자 기사는 영, 독,
불, 이 등 서유럽의 동맹국들이 중국 주도의 AIIB 가입을 결정한 데 대한 미국의 당혹감과 배신감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습니다.
신문은 유럽의 경제대국들이 "오바마 정부의 직접적인 요청을 무시하고 미국이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은행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중국 주도의 AIIB의 창립멤버가 되기로 결정했다"면서 이는 "긴밀한 우방국인 미국에
대한 '뼈아픈 거부(stinging rebuke)'"라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존 케리 국무장관이 지난 11일 프랑크 발터-스타인마이어 독일
재무장관을 직접 만나 가입을 만류한 지 불과 엿새 후에 이런 결정이 나온 데 대해 짙은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당혹감뿐만이 아닙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금융을 주도해온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 미국이 주도해온 금융기구의 영향력이 축소되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는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그동안 (미국과 중국 간에) 권력투쟁이 있었고, 이제 우리는 1945년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고 있다"는
유럽의 한 고위관리의 말을 전했습니다. 나아가 신문은 "유럽의 AIIB 가입 결정은 세계의 권력 균형을 바꾸려는 시진핑의 노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전의 중국 지도자들이 세계무역기구(WTO) 등 기존 국제기구의 틀 안에서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기존 기구의 규칙을
바꾸려는 정도의 시도를 해 온 반면, 시진핑은 독자적인 국제기구를 통해 중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브뤼셀에 있는 <유럽아시아연구소>의 중국 전문가인 테레사 팔론은
"중국은 대안의 세계(an alternative universe)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이 이를 돕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팔론은 이어 "중국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가 삐걱거리고 있는 가운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경제의 전체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중국이 AIIB를 출범시킨 것, 여기에 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물론 영, 독, 불,
이 등 서유럽의 경제대국 대부분이 참여한 것은 향후 국제 정치경제 질서의 중대한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얘깁니다.
▲ 지난 2014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양해각서(MOU)
체결식. ⓒA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