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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차이나', 이건 인정할 수 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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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7. 1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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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중국을 여행한 폴 서로우의 '중국기행'은 중국 기차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항상 침을 뱉었다… 그들은 양볼로 바람을 빨아들인 후 캭! 하고 뱉는다. 그리고 히죽 웃고 입을 다물고는 몸을 뒤로 기댄다… 그들은 절대로 멀리 뱉지 않는다. 기껏해야 선 자리에서 몇 센티 정도인 바로 발 아래 뱉는다."

 



중국인들의 습관 중에서는 중국 말대로 '시관(習慣)'이 되기에 황망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필자도 10년간 중국에서 생활했지만 그런 일들을 많이 겪었다. 분명히 우리가 보기에 중국인들에게 비위생적이고, 무질서한 것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꼭 그럴까. 필자는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에게 폴 서로우가 중국인들을 보는 창구였던 기차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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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장철도의 기착지 라싸역 폴 서로우의 예측과 달리 기차는 이곳까지 닿았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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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보면 중국이 다르게 느껴진다

 


사실 폴 서로우의 시선은 오리엔탈리즘에 바탕을 둔 서구적 시각의 하나로, 그의 말들은 이미 상당 부분 틀린 이야기가 됐다. 그는 "쿤룬산맥으로 인해 기차는 영원히 라싸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썼지만, 칭장 열차가 생기면서 기차는 해발 4767m의 쿤룬산 입구는 물론이고 5072m의 탕구라산 입구를 넘어 달리게 됐다. 머지않아 세계 최고의 고봉인 에베레스트의 옆길을 통과해 인도로 향한다는 복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우가 중국 기차에 가진 느낌을 나라고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첫 기차 여행길인 1998년 10월에 만난 중국 기차는 정말 혼잡하고 어지러웠다. 필자는 그 길에서 중국 최고의 문화여행 작가인 위치우위가 탔다는 창사(長沙)행 기차를 생각했다.

 



위치우위는 문화대혁명의 중간에 쫓기듯 기차에 오른다. 아무런 통제가 이뤄지지 않는 당시에 기차는 요금이 없었다. 대신에 기차는 언제 출발할지, 도착할지 예측할 수 없는 떠도는 말과 같았다. 그 때 위치우위는 운명처럼 창사에 내렸고 뭔가에 끌리듯 악록서원을 방문했다.

 



악록서원은 주자는 물론이고 왕양명, 왕부지, 증국번, 좌종당 같은 명사가 강학하고 배웠던 곳이다. 마오쩌둥 역시 이곳과 인연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세상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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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오티에의 초기 단계였던 허시에 호 정치적 모토인 허시에를 따라 이름 붙인 고속철도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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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중국 기차가 참 더럽다고 느낀 1998년의 취재 여행을 마치고, 1년 후 중국에 살게 됐다. 기차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던 중 2000년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기차는 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쓰레기 투기나 흡연을 방관하던 열차 승무원들이 기차를 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손님이 버린 쓰레기를 끝없이 치우기 시작했고, 담배를 피우는 손님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1년쯤이 지나자 고급 침대칸 사람들은 쓰레기 투기를 멈추기 시작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 해가 지나자 일반 침대칸 사람들도 쓰레기 투기를 멈췄다. 그리고 다시 일 년여가 지나자 일반 칸에서도 쓰레기 투기가 없어졌다. 2006년 즈음에는 기차에서 쓰레기 투기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일이 년이 지나자 중국인이 기차에서 가장 즐기는,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 습관조차 줄어든 것 같았다. 해바라기씨는 시간을 보내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쓰레기 처치가 곤란하자 수십 년 동안 해오던 습관도 버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중국에서 어떤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좋은 방식은 벌금을 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차는 이런 징벌을 활용하지 않고도 승무원들의 솔선수범으로 좋은 시민문화를 만들었다.

 



비행기 속도 능가할 날 멀지 않아... 중국은 이미 철도 '맹주'

 



기차 속도도 중국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다. 1999년 톈진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그 해 10월 말, 시드니 올림픽 축구 예선 취재를 위해 상하이를 찾았다. 8만 명을 수용하는 이 구장에서 한국팀은 중국인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이동국의 동점골로 무승부를 기록해 올림픽 진출이 거의 확정됐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톈진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오후 3시경 어렵사리 암표를 구해서 탄 톈진행 기차는 이틀 후 새벽에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완행열차였다. 표를 구한 후 바로 기차를 탔기에 톈진에 있는 아내에게 연락도 하지 못했다. 당시는 이동전화가 없어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지루한 여행을 마치고 톈진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그 때는 신혼 2개월째였기에, 상하이발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마다 역에 나와 내가 오나 안 오나를 확인했고, 중국어가 서툰 내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도 급행열차가 있었지만 빨라야 20시간 전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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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구축되는 중국 고속철도망 붉은 색은 시속 300km 이상, 연두색은 200m 이상이다. 전체 거리는 16000km에 달한다
ⓒ 중국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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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중국 기차는 괄목상대라는 말이 어울리게 급변했다. 베이징, 상하이 사이에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리던 기차는 얼마 되지 않아 없어졌고, 이동 속도는 급속히 빨라졌다. 완전히 새로운 철로를 건설해 운영하는 고속열차인 까오티에(高鐵)는 2012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해 베이징남역에서 상하이홍교역까지 1318km를 최고 4시간 48분에 달린다. 실제 운행 가능속도는 시속 400km 이상이지만, 안전 문제로 현재는 300km를 넘기지 않는다.

 



물론 이에 앞서 2002년부터 상하이 푸동 공항에서 롱양로역을 최고 시속 430km로 달리는 자기부상 열차가 상용화됐기 때문에 기차 속도에 관해서 중국은 이미 맹주의 입장이었다. 독일 기술로 만들었지만 지금도 상용 열차로는 최고 속도를 내는 열차이니 만큼 중국 기차의 도전을 볼 수 있다.

 



고속철도의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4년 1월에는 중국 양대 철도회사 중 하나인 난처(南車)가 시속 605킬로미터의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또 시난대학(西南大學)은 시속 3000km의 자기부상열차를 연구하고 있어, 철도가 비행기의 속도를 능가하는 날도 멀지 않음을 예고했다.

 



중국 고속철도 운행 거리 한국의 25배

 



속도에 못지 않게 운행 거리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중국 중심의 대부분 도시 사이에는 이미 고속열차가 개통됐다. 기존 중국 철도의 진화와 고속철도 까오티에가 다른 것은 이 구간은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철로로 운행된다는 것이다.

 



올해 7월에는 타이위앤(太原)과 시안(西安)간 고속철도가 운행을 시작하면서 767km를 3시간 만에 주파하는 시대를 열었다. 현재 중국 내 고속열차의 운행 거리는 지난해 1만km가 넘었고, 2020년에는 1만6000km까지 늘릴 계획이다. 서울 부산 간 고속철도 거리가 408km인 점을 고려하면 중국은 한국의 25배에 달하는 고속철도를 가진 셈이다.

 



과거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어지는 고속 열차 운행 계획이 발표되고 나서 일본은 신칸센의 짝퉁이라고 비난하는 등 복잡한 심사를 드러냈다. 일본뿐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 등 고속열차 기술을 보유한 많은 나라가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는 격으로 입맛만 다시고 물러났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여전히 중국의 기술이나 실력을 의심하고 있는 눈치다. "그래도 아직은 기술이 안돼" "그래도 우리보다 뒤떨어져 있는 것이 있을 거야" 등등. 하지만 이제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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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톈진역 천징에 있는 정위전해 벽화 우공이산의 신화에 비견되는 인간의 개척 의지를 담은 중국 신화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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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부터 2004년까지 톈진에서 살 때도 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가는 일이 많았으니 역에 갈 때마다 감회가 남달랐다. 우선 새로 고친 톈진역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금의 톈진역은 과거 있던 톈진역을 새롭게 고친 것이다. 하지만 역 입구의 모습은 거의 변화가 없다. 사실 역의 규모를 엄청나게 키웠으면 역 입구도 리모델링하면 좋으련만, 왜 거기는 그대로 두고 역사 안만 고쳤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 답은 역사 안으로 들어가 조금만 가보면 나온다. 바로 1층으로 들어가 2층 대합실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천장을 보면 중국에서 가장 큰 벽화가 그려져 있다. 1988년 중국의 저명한 유화가인 친정(秦征 1924~) 등 6명이 함께 그린 정위전해(精衛塡海)다. 높이 21m의 천장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지름만 40m로 중국 최대 천장벽화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떠오르게 하는 '정위전해'는 중국의 신화에서 소재를 빌려왔다. 이 이야기는 동양신화의 백미인 '산해경'에 나오는데, 중국 신화에서 양대 인물 중 하나인 염제(炎帝) 신농에게는 왜(娃)라는 딸이 있었다. 이 딸은 동해에 가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너무 멀리 헤엄쳐 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죽은 딸은 새로 환생했는데 이 새는 서산으로 가서 돌을 주어다가 바다에 떨어뜨렸다. 자신이 빠져 죽은 동해를 메우기 위함이었다. 물론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주인공과 같은 무모한 행동이다.

 



하지만 새는 하루도 이 일을 쉬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의 울음이 '정위 정위'로 들린다며 이 새를 정위새(精衛鳥)로 불렀고, 정위새가 바다를 매운다(塡海)라는 뜻에서 이 고사를 '정위전해(精衛塡海)라 부른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행동을 지칭했지만, 지금은 우공이산 고사와 마찬가지로 한 일에 몰두해서 이루려는 이들을 가리켜 부르는 고사성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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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들판과 고산을 지나는 칭장철도 칭장철도는 5000m가 넘은 동토 구간도 있고, 소금으로 절어 있는 땅 위에도 만든 고난의 열차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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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愚公移山) 정신이 만든 철도신화

 


사실 중국 고속철도의 건설도, 이 그림이 그려진 1988년 수준으로 보면 '정위전해'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불과 20년 만에 중국 고속철도망 구축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외국에서는 기술의 도용이니, 자원의 낭비니 등 많은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주목할 점은 1988년 이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 마음처럼 끊임없는 현실변화의 욕구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의지가 지금의 고속철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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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베이징역 베이징 치엔먼 바로 앞에 있는 옛 베이징역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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