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썼던 글인데요, 요즘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다시 올립니다. 당시에 올렸던 원문은 http://blog.daum.net/yiyoyong/8933199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촛불 관련 블로그 글로 인한 퇴사 이후 내게는 질문이 쏟아진다.
‘당신은 어느 편이냐?’
솔직히 이 물음은 썩 달갑지 않다. 이 질문의 의도를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자기 편인지를 묻는 셈이다.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그들의 잣대대로라면 난 어정쩡한 존재다. 난 보수 언론의 대표 격인 중앙일보에 자진해 입사했다.
동시에 그 곳으로부터 험한 꼴로 쫓겨났다. 그렇다고 진보적인 매체라는 곳과의 관계도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 글이나 취재를 터무니없이 폄하하거나 재단하려는 곳과는 어김없이 등을 지고 말았다.
정치적 선동이나 투쟁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법에 더 관심이 많다. 라이프스타일 전문 기자라는 내 본업 때문에, 가끔씩 대중의 충동적 소비를 조장하려는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특정인이나 특정 경향에 대해 공격하고 나설 때도 있다.
자가당착적인 극단주의자나 우리 사회의 미래를 흔들 잘못이 눈에 띌 때면, 난 정치적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바로잡아 주어야 할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편이냐는 말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나, 답하는 나를 모두 곤혹스럽게 한다. 사람들은 대개 묻기 전부터 이미 내 입장에 대해 예단한다. 동지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진작에 지지해줄 태세를 갖고 있다.
반면 적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비난할 궁리로 포문을 연다. 그런 그들에게 난 모두의 동지이자 동시에 적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듣는 그들이나 말해야 하는 나나,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 것을 어쩌랴. 솔직히 나는 어느 한 편에 서있다거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못돼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내심 반박한다. 그들의 속 좁은 적개심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지독한 당파성과 냉소주의의 진원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편을 묻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 질문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거듭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두 가지 보기 가운데 하나를 강요하는 객관식 질문에 대해, 나는 내 견해를 비교적 소상히 밝히는 주관식 답을 할 생각이다.
나는 어느 편인가? 우선 그 질문이 정당 지지 성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답은 쉬워진다. 난 무당파(無黨派)다. 앞으로 지지할 정당이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지지 정당이 없다. 한나라당은 멀리 군부 독재정권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에서부터 정책, 소속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지지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정당이다.
민주당을 지지할 수도 없다. 민주화 시대 정통 야당의 맥을 이은 점과 몇 가지 정책은 공감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정당은 낡고 진부해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이 정당은 지금 개혁 정부 10년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사회와 경제 등 모든 분야의 개혁을 이룰 현대사의 호기(好機)를 맞았으나, 조급증과 서투름, 그리고 오만함으로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이 당이다.
우리 사회의 퇴행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지난 대선에서는 또 어땠나? BBK라는 이슈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더 잘 먹이고, 잘 살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 실패에서 배우고 더 나아졌다면, 지지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의지나 계획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저 여당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에 기대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 가고 있다.
이쯤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노당이나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한다. 지식인일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난 우리 사회의 이른바 진보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상당수 정강?정책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의 이념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진보 정당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편향성을 드러낸다. 적어도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다. 반면 난 양자를 굳게 믿는다. 물론 정부의 역할이 커져야 하고, 성장만큼 복지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틀에서 그럴 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현존 정치인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에 굉장히 서럽고 안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우리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개혁 의지나 방향이 과소평가되거나 왜곡되는 것에 대해 그렇긴 했다.
그러나 생전에 그를 둘러싸고 권력을 공유했거나 사후 그의 죽음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이들과 공감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들은 참여 정부 내내 선의(善意)만 있다면 전횡과 무능력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게다가 조금은 부패하기까지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감정도 비슷하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그의 역정은 존경한다. 하지만 개혁의 기회에 부패하고 무능력한 소수에 둘러싸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일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지지할 만한 정치 지도자가 있을까 해서 지난 대선 기간 내내 후보들을 꼼꼼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정치 철학과 비전, 그리고 구체적 정책에서, 난 그들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특히 어떻게 국가 경제를 번영으로 이끌고, 국민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해줄까에 대해 차별화된 아이디어를 가진 후보는 없었다.
그게 못내 안타까웠다. 차이가 있었다면 이미지나 스타일, 그리고 권력욕 정도였다. 여느 때처럼 최악의 후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투표에 임했다. 내가 맨 처음 가려낸 최악의 후보가 당선된 것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나는 어느 편인가? 현재 우리 정치 지형에서 대북 정책에 대한 입장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다. 그것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가장 강력한 울타리가 됐다. 대북 화해와 협력 정책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대북 강경책을 선호하는 세력을 전쟁광으로 몰아세운다.
반면 대북 강경책을 지지하는 쪽은 화해와 협력 정책을 북한에 대한 퍼주기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해당 정책을 고집하는 이들을 북한의 이념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대북 정책과 관련해 나는 어느 편인가?
양 극단의 주장을 배제하고 나면 대북 정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입장차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입장이건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느냐, 그리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이냐에 대한 논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에 치우친 대북 강경책이 장기적으로 더 많은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화해와 협력 정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난 북한의 정치 이념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 이유로 그들을 도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게다가 북한의 인권 문제를 두고는 북한 체제를 누구보다도 맹렬히 비난하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 편인가? 이 질문이 이념이나 사상에 관한 것이라면 답은 훨씬 복잡해진다. 나는 내가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은 상당한 논란을 낳고 있다. 서구적 개념에 한국적 상황이 더해져,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극우주의자들이나 뉴라이트들조차도 자신들이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판이다. 기존의 진보 세력들의 사회주의 경도나 좌 편향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진보라는 말을 논리 조작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의미한다.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의 반대 개념이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나는 분명히 진보적이다. 우리 사회에는 고쳐야 할 것과 고치고 싶은 것이 무수히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동시에 현재 진보 세력 일부와도 분명히 선을 긋는다.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기거나 사회주의적 해법을 맹신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오늘날 ‘좌빨’이라는 말은, 진보라는 단어만큼이나 남용되고 있다. 우리 국민의 레드 컴플렉스를 악용하려는 보수 세력의 선동 전략에 동원되고 있어서다.
그러나 과거 좌파나 빨갱이처럼 혁명과 무장 봉기 등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의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난 그들을 믿거나 따르지 않는다.
난 진보 세력의 다수를 점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보수 세력의 선동처럼 이념의 불순성에 대해 비판적인 것이 아니다. 난 그들의 선의를 믿는다. 설령 의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그들이 그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체제 비판은 늘 체제를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다. 그런 목소리를 송두리째 부인해서는 안 된다.
내 비판론은 그보다는, 진보 세력이 선의를 담보로 하려는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 세력은 경제적 번영에 별 관심이 없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일에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난 그 점이 불만이다. 미국의 민주당도 대공황 이후 줄곧 집권해왔으나, 70년대부터 자신들의 단골 모토였던 경제를 공화당에 넘겨준 후 몰락했다. 경제적 명분을 독점한 공화당이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라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결과 맞게 된 것이 바로 최근의 글로벌 금융 위기다.
현재의 진보 세력 내에서 경제적 풍요와 번영을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겨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상대적으로 짧았던 집권 기간 동안 개혁을 진행해야 할 분야가 너무 많았다. 경제는 뒷전이었다. 심지어 국민 통합도 뒷전이었다. 상당수 국민이 이 점을 문제 삼았지만 진보 세력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은 솔직히 인정하자. 명분을 독점한 자의 오만과 독선이 당시에는 분명히 존재했다.
보수 세력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대부분을 지배해온 이들은 지난 10년의 개혁 정권을 사실상 부정하려 들었다. 일종의 일탈쯤으로 여기려고 들었다. 보수 언론과 보수층, 그리고 오랜 정치 권력은 서로 담합해 그 기간 내내 기존 정권에 대한 부정과 정권 탈환 전략에만 골몰했다.
사상 공세 같은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칫 이념적 탈선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민주화 과정을 깎아내리고 건국과 산업화 과정을 부각시키려다, 민족을 외면하고 국가만을 중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국가 형성에 도움이 됐다며 일본의 침탈마저 긍정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민족에 집착해 북한에 지나치리만치 관대했다는 오해를 받는 진보 세력보다 더 중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는 보수와 진보 세력 모두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둘이 선의의 경쟁을 통한 집권 경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체제의 건강성에 크게 기여하는 것임도 잘 안다. 장황하지만 이런 얘기를 하고나면,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말에 공감하는 것이다. 내 입장과 비슷하다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편이냐고, 간단한 선택을 강요하던 사람들마저 그런 경우가 있다.
나는 이를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의 존재를 반증하는 것으로 본다. 자신의 입장을 소리 높여 외치고, 떼를 쓰며, 심지어 강요하는 이들은 양 극단의 소수다. 정작 다수는 이들의 볼모가 돼 있다. 그들과 한 편이 되거나 등을 돌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냉철히 생각하면 그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경제적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진보와, 퇴행이 아니라 사회 발전을 기대하는 보수가 다수다.
만일 그런 이들의 소망을 뒷받침 하는 정당이나 정치 지도자, 그리고 이념이 있다면 난 언제고 그들을 편들어 줄 태세가 돼 있다. 무당파이자 어정쩡한 진보라는 내 입장이 단순한 정치적 냉소주의의 산물이 아니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0대 여성의 정치관은 완벽하지 않다. 대부분은 분명히 정리돼 있지도 않다. 그러나 정치관을 확정해가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다. 기성 세대의 그것을 무작정 따르거나, 그것에 늘 끌려 다닐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차라리 자신의 마음 속 깊은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이 낫다. 난 어려서부터 늘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면서 사회 전반의 변화 없이 그 욕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깨닫게 됐다. 모두가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다. 20대 여성은 이렇게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동기를 접목시켜 나감으로써 정치적 견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다수는 개인의 욕망만을 추구한다. 소수는 사회적 동기만을 내면화 한다.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공허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으로도 행복해지기 어렵다. 난 내 주변에서 그런 편식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난 어느 모로 보더라도 좌빨이 아니다. 그러나 늘 좌빨로 분류된다. 꼴보수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보수 골통으로 공격받기도 한다. 나는 누구 편인가? 나처럼 공격받는 사람, 당신들이 이제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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