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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이너스인가?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11. 1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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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이너스인가?

구조론연구소  김동렬슨생  2011.11.15

 

 

마이너스와 플러스는 같이 다닌다. 풍선효과와 같다. 이쪽에서 마이너스를 행하면 저쪽에서 플러스가 일어난다. 문제는 플러스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거다. 그곳에는 스위치가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미아리에서 집창촌을 단속하니 주택가에서 성매매가 일어나는 것이 풍선효과다. 정부가 이쪽에서 아파트 재건축을 규제하자 저쪽에서 일반아파트 가격이 오른다. 역시 통제가 안 된다.

 

이쪽 집창촌의 마이너스는 통제가 되는데, 저쪽 주택가의 플러스는 통제가 안 된다. 이쪽 재건축의 마이너스는 통제가 되는데, 저쪽 일반아파트 집값의 플러스는 통제가 안 된다. 어차피 플러스는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보가 아니라면 어떻게든 상부구조의 마이너스에서 해결봐야 한다.

 

상부구조가 마이너스, 하부구조가 플러스다. 상부구조를 통제해야 한다. 윗물이 맑아지게 해야 한다. 치려거든 꼬리는 내버려두고 머리를 쳐야 한다. 화장실에서 싸는 것을 참지 말고 식탁에서 먹는 것을 줄여야 한다. 하부구조에 속하는 거리의 양아치를 탓하기보다 상부구조의 국가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

 

위로 한 단계 올라가서 마이너스를 행하라. 그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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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한 방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마이너스다. 플러스를 행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부구조의 사전구축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므로 문제가 복잡해진다. -

 


진정한 창의는 마이너스로 가능하다.

 

‘1박 2일’ 100회 특집에서 유홍준은 경주남산의 불상을 설명하면서 ‘석공이 돌을 조각한게 아니라 바윗속에 숨어있는 부처님을 발견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없는 것을 갑자기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 마이너스다. 어디에 있는가? 상부구조에 숨어 있다. 그것을 마이너스하여 하부구조로 끌어낸다.

 

그림이라면 어떨까? 옛 사람이 바위 속에서 숨은 부처님을 찾아냈다면 우리는 그림 속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할까? 그것은 내부의 숨은 질서다. 대칭원리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예술이다. 화가는 자연에서 그것을 찾아내야 하고, 관객은 다시 그림에서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르네상스인이 원근법을 찾아낸 것과 같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칭원리가 찾아내야 할 자연의 숨은 질서다. 그림에는 명암과 원근과 색채와 구도와 주제의 형태로 대칭원리가 숨어 있다. 그것이 그림 속의 숨은 질서이며 거기에 과학성이 있고, 그 과학성이 인류의 삶에 기여하므로 가치가 있다. 그게 없다면 그냥 소비되는 상품일 뿐이다.

 

보기에 좋은 것, 예쁜 것,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 공교로운 것, 절묘한 것, 관객들이 감탄할만한 재미나고 희한한 것을 그림 안에 집어넣겠다는 플러스로 서커스는 몰라도 예술은 될 수 없다. 거리에서 팔아먹을 상품은 될지언정 인류의 집단지능과 소통하는 예술은 될 수 없다. 인류문명이라는 큰 건물의 벽돌 하나, 서까래 하나, 대들보 하나로 올라서는 영광된 지위는 누릴 수 없다.

 

김태원은 위탄에서 “나는 멘토지만 너희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겠다. 대신 너희들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겠다. 음악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고 거듭 말했다. 그렇다. 김태원이 백청강, 손진영, 이태권을 경주 남산의 숨은 바위에서 부처님 찾아내듯 발견했을 때 이미 사건은 완결된 것이다.

 

새로 뭔가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둘이 마주쳐서 충돌했을 때 이미 화학반응은 시작된 것이다. 이미 공이는 뇌관을 때렸고 뇌관은 장약에 점화했다. 이후 기승전결의 구조론적 전개는 일사천리로 일어난다.

 

보통은 만남≫사랑≫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귀납이다. 구조로 보면 결혼≫사랑≫만남의 연역이다. 인과관계를 바로 알아야 한다. 에너지의 결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1회로 끝나는 것이 원인이고 매번 반복되는 것이 결과다. 화약의 기폭은 단 1회로 끝난다. 가마솥에 황소를 삶더라도 장작에 불을 붙이는 성냥개비의 역할은 한 개비로 제 몸을 태웠을 때 완전히 끝난다.

 

결혼은 일생에 한 번 뿐이다. 반면 만남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구조로 보면 결혼이 먼저고, 사랑이 다음이며, 만남이 마지막이다. 실제로 그들은 아직도 만나고 있다. 김태원과 백청강의 만남은 당분간 끝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구조를 설명하기 위하여 단어를 차용할 뿐이다. 결혼은 한 번이지만 만남은 계속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언제나 맨 먼저 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회에서 결혼이 나중에 오는 이유는 혹시나 중간에 일이 틀어질까봐 맨 나중에 본질을 확인하는 것 뿐이다. 본질로 말하면 가장 늦게 확인되는 것이 가장 먼저 온다. 우승자는 골인지점에서 가장 늦게 정해지지만 사실은 가장 먼저 준비된다. 우승자가 없다면 시합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출발점에서 총성이 울렸을 때 우승자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다. 단지 그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사인 볼트를 불러다놓고 경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승자 없는 경기는 애초에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챔피언은 시합이 끝나고 난 다음에 발표되지만, 만약 챔피언이 없다면 프로모터가 나서지 않으므로 시합은 주최되지 않는다. 가장 늦게 공표되는 것이 본질에서는 가장 먼저 준비된다. 그랑프리 수상작을 섭외해놓고 영화제는 준비된다.

 

우승팀은 결승전 후에 확인되지만, 관객들은 예선부터 그 팀을 찾기 시작한다. 토너먼트가 진행될수록 참가하는 팀의 수는 줄어든다. 최후에 한 팀이 남아서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그 팀은 처음부터 거기에 와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관객들은 뭐하러 눈이 빠지게 경기를 보고 있었겠는가? 우승팀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없는 팀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팀을 찾아낸다. 이것이 이미 결혼되어 있다는 말의 의미다.

  

김태원은 발견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말했다. 유홍준은 부처님을 발견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원과 유홍준이 현실공간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이미 예술의 동지다. 그들은 전생에서부터 이미 결혼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친연성이라 부른다. 김태원과 유홍준 둘 사이에 친연이 있다는 것이 비유하여 말하자면 ‘이미 결혼되어 있다’는 거다.

 

결혼 다음에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 다음에 만남이다. 김태원이 백청강을 발견했듯이, 백청강은 자기 안에서 무언가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김태원이 백청강을 세상에 끌어냈듯이, 백청강은 자기 안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대칭원리가 작동하여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신라인이 바위 속에 숨은 부처님을 찾아냈듯이, 르네상스인이 자연에 숨은 원근을 찾아냈듯이, 과학자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내듯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감추어진 무언가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사랑이다.

 

화가는 자연에서 숨은 질서를 찾아낸 다음 그것을 화폭으로 끌어냈다. 숨은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그림에서 숨은 질서를 찾아내야 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배경을 생략하고 그림을 간결하게 그려서 그것을 찾아내기 쉽게 해놓았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에서 에밀 졸라는 ‘살아있는 색채들의 대립과 신선한 금빛의 조화’라는 숨은 질서를 찾아냈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은 단지 눈을 똑바로 뜨고 관객을 노려보는 매춘부를 발견했을 뿐이다. 거들은 거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보는 것이 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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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음과 어둠의 대비, 그리고 모델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의 대비, 그 사이의 아슬한 긴장을 찾아내기, 그 긴장이 관객의 가슴 속에 숨겨진 종을 울릴 때 세상은 시끄러워진다. 그 시끄러움 속에서 일제히 깨어난다. 그 깨어남 속에서 세상은 진보한다. 계속 간다. - 

 

찾아내야 한다.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림에서 찾으려 하면 이미 실패다. 자기 안에서 그 예술과 반응하는 뭉클한 것에서 찾아야 한다. 화가가 자연에서 찾아 그림 안으로 옮겨놓은 질서를, 관객은 다시 자기 안에서 찾아내어 공명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냥 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읊조리는 것은 3류 연속극의 매가리없는 대사에 불과하다. 진짜라면 매일 상대의 심장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두근하고 뭉클하고 쿵쾅거리고 뜨겁고 매섭고 여린 것을 찾아내고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대칭은 시소처럼, 혹은 천칭처럼 나비 한 마리만 옮겨앉아도 완전히 기울어지는 것이다. 그대 마음 안에서 나비 한 마리가 자리를 옮겨앉았을 뿐인데도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 그대를 혼절하게 하는 것, 숨이 가쁘게 하는 것, 몸이 뜨거워지게 하는 것, 오분마다 한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다. 마음 안에서 그것을 찾아내고 다시 그것을 작동시켜야 사랑이다. 스위치가 켜져야 한다. 전구에 불이 들어와야 한다. 에너지의 결이 나타나야 한다. 생채기를 남기고 자국을 남겨야 한다. 종이 제 소리를 토해내야 한다.

 

각자 자기 안에서 재능을 끌어내고, 순수를 끌어내고, 열정을 끌어내는 것이 예술이다. 작가는 단지 열쇠를 건내줄 뿐이다. 본래 내 안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왈칵 쏟아내내는 것이 예술이다. 반면 곡 안에 뭔가 잔뜩 채워넣는 것은 지랄이다. 아이돌 키운다며 후크송 돌리는 거 지랄이다. 밖에서 조립하여 억지로 집어넣는 가짜다. 조미료 넣고 MSG 넣는 그것은 가짜다.

 

쇠고기에 열을 가하여 세포조직을 파괴함으로써 마이너스를 자행하여 그 안에 숨은 아미노산을 밖으로 끌어냄으로써, 넘쳐 흘러내리는 신선한 육즙이 그 음식을 먹는 고객의 혀 속의 미뢰와 충돌하게 함으로써, 고객의 평화를 교란하고, 그 마음을 달뜨게 하고, 마침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 예술이다. 교교한 달빛이 동네 개들을 일제히 짖게 하듯이 일대소동을 일으켜야 진짜다.

 

광부가 모래를 걸러 사금을 찾아내듯이, 요리사가 식재료에서 맛을 찾아낼 때, 고객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할지 알게 된다. 자기 안에서 무엇을 흔들어 깨워야 할지 알게 된다. 영감을 얻는다. 반면 밖에서 조합된 MSG를 집어넣는 플러스는 가짜다. 그건 거래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애초에 안 쳐주는 거다.

 

한 단계 위로 올라가서 아래로 한 바탕 쏟아부을 때 존재는 무지개처럼 결따라 갈라지며 각자 제 색깔을 드러낸다. 각자 제 위치를 얻고 자기다움을 얻어 더 빛나게 되고 더 멋있게 된다. 그 방법으로 창의할 수 있다. 창의는 어떤 둘을 충돌시킬 때 일어나는 마이너스로 가능하며 그리하여 바닥에 흩어진 것을 주워모으는 플러스로는 불가능하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면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진다. 낙엽은 떨어지면서 허공 중에 그림을 그린다. 비중대로 무거운 것은 곧장 떨어지고 가벼운 것은 저만치 날아가서 떨어진다. 예술은 이미 그 안에 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모아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으나 거기에 그 나무를 흔들고 간 신선한 바람은 없다. 그 무대에 초대해야 할 손님은 이미 떠나고 없다.


그렇다면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서 마이너스를 해야 한다. 땅바닥에서 허둥대는 플러스면 실패다. 세상은 왼쪽과 오른쪽의 수평적 투쟁이 아니라 에너지가 있는 위와 에너지 없는 아래의 수직적 전개다. 이를 입체적 모형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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