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또 다른 사랑 ‘겨울 철새’ 이야기
화포천과 들판의 주인공, 겨울 봉하의 명물을 만나다
봉하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저마다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이면 산과 들에 찔레꽃, 죽단화, 복사꽃, 영산홍, 조팝나무꽃, 이팝나무꽃, 진달래 등 온갖 들꽃들이 총천연색의 꽃망울을 피워 생기를 퍼뜨리고, 여름 한낮 생태연못에 부는 바람이 수백 수천의 커다란 연잎을 흔들어 깨우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가을 풍경의 백미는 황금색으로 물든 봉하 들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는 자색 벼로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글자를 새겨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겨울 풍경의 주인공은 들녘과 화포습지를 유영하듯 날아오르는 새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습지 ‘화포천’에 가보셨나요?
봉하마을 제방 너머 끝없이 펼쳐져 있는 화포습지에 가보셨습니까? 흔히들 ‘화포천’이라 부르는 이곳은 습지 본연의 자연미를 온전히 지니고 있는 습지생태의 보고입니다. 2009년에는 국토해양부가 주최한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에 노 대통령님이 계신 곳이기도 하고요.
봉하마을에서 보면 화포천은 구불구불한 물길이 몇 개의 지류를 이루고 있는 작은 습지에 불과해 보이지만 김해시 진례면과 진영읍, 한림면에 걸쳐 면적이 총 500여 만㎡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습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습지식물과 곤충, 동물들이 살고 있어 갖가지 겨울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화포천은 1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버리고 가거나 여름에 하천이 범람해 떠내려 온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람사르 총회나 생태관광 등 습지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고는 있었지만 학술적인 연구나 환경단체의 문제제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봉하에 내려와서 가장 먼저 한 일, ‘청소?!’
화포천 정비와 생태보존에 대한 본격적인 행동은 노 대통령이 퇴임 뒤 고향 봉하로 내려오면서 시작됩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참모진,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생태전문가들과 함께 화포천 주변을 청소하고 주변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노 대통령이 봉하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화포천 청소’입니다.
“마침 창원에서 ‘람사르 세계습지총회’가 열렸다. 내가 대통령 하면서 유치했고 퇴임하면 자원봉사도 하겠다고 했는데, 여러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대신 고향 마을에서 습지보존을 직접 실천하기로 했다. 논 습지의 생물 종 다양성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 <운명이다> 314쪽
대통령님은 고무보트를 타거나 장화를 신고 직접 하천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갈고리로 덤불 속에 숨은 쓰레기까지 꼼꼼하게 치우고 살폈습니다. 함께 팔을 걷어붙인 참모들에게 “우리끼리만이라도 이렇게 하면 다른 곳에서도 따라 하지 않겠냐”며 화포천을 비롯한 봉하와 김해 인근, 나아가서는 농촌이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화포천의 습지생태를 보전하고 더불어 친환경농사로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농촌이야말로 노 대통령의 꿈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화포천변의 동식물과 겨울 철새들이야말로 노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수혜를 받은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화포천 덕분에 습지 공부를 제법 많이 했다. 습지 생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담수 기간을 늘리고 갈수기에도 어느 정도 수위를 유지해야 한다. 갈수기에 물이 없으면 습지가 마른 땅으로 변해 중간중간 섬이 생긴다. 그러면 새들이 여기저기서 잠을 자지 못한다. 살쾡이, 너구리, 들고양이가 와서 잡아먹기 때문에 새들이 다들 주남저수지에서 자면서 화포천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화포천에 임시 물막이 공사를 해 물을 담고 살펴보았다. 겨울 철새들이 귀신처럼 알고 두 주 만에 1만 마리 정도가 왔다. 새들이 낮에는 논에서 먹이 활동을 하고 밤에는 물이 많은 안전지대에서 잤다. 봉하 들판 낮은 곳의 논바닥에 물을 담아 무논을 만들었더니, 철새들이 논에서 그냥 자기도 했다. 볼만한 풍경이었다.” - <운명이다> 313쪽
봉하, 겨울 철새들의 ‘친환경’ 보금자리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의 겨울 봉하마을은 낮에 만나는 정적이나 한가로움과는 다른 신비감을 줍니다. 새벽을 휘감았던 어둠이 햇살에 밀려 서서히 사라질 때, 그 풍경 사이로 도움닫기 하며 물결을 치고 날아오르는 노랑부리저어새의 하얀 날갯짓을 본 사람이라면, 그동안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모습의 봉하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매년 겨울이면 봉하에도 멀리 중국과 시베리아 등지에서 기러기와 청둥오리 등 다양한 종 의 겨울 철새 수천 마리가 찾아옵니다. 특히 낙동강 하구나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던 철새들이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는 시기인 2~3월경 화포천변은 철새들의 휴게소가 되어 1년 중 가장 많은 겨울 철새를 볼 수 있습니다.
<봉하재단>과 영농법인 봉하마을은 1~2월이 되면 벼를 수확한 뒤 겨우내 비어 있던 논에 무논을 조성해 오리나 철새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먹을 것이 부족할 것을 염려해 가을에 따로 남겨둔 나락을 새들에게 나눠줍니다. 노 대통령이 귀향하고 친환경농업을 시작하면서 봉하들판은 이제 4계절이 ‘친환경 들판’입니다.
올겨울에는 평년과 다른 맹추위가 계속되어 들판 수로는 물론 주위가 꽁꽁 얼어붙어 물을 담지 못하다가 다행히 설이 지나면서 추위가 녹아들어 늦게나마 물 담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새가 날아든다, ‘왠갖 철새’가 날아든다”
이른 아침, 부지런한 농가 굴뚝에 밥 짓는 냄새가 피어오를 무렵, 철새들도 끼니를 찾아 본격적인 아침 채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무리를 이루는 것은 ‘큰기러기’ 떼입니다. 암수가 한 번 짝을 이루면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의리와 절개가 있는 ‘속정이 깊은’ 새입니다. 덕분에 전통혼례 때 절개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신기하게도 부리가 결혼반지를 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큰기러기는 약 2000여 마리가 군집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름 앞에 ‘쇠’자가 붙는 새는 같은 종(種) 가운데 ‘덩치가 가장 작은 것’을 뜻합니다. ‘쇠기러기’는 어른이 되어도 66~86cm까지만 자랍니다. 갈색 몸뚱이에 분홍색 부리를 가지고 있고, 회갈색 배에는 불규칙하게 검은 줄무늬가 나 있습니다. 다리는 오렌지색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새입니다. 화포천에는 약 1,000여 마리가 무리지어 있습니다.
대통령님과 함께 만든 생태연못에서도 철새들이 날아듭니다. 화포천변에 비하면 개체 수가 적지만 쇠오리,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같은 오리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얼마 전에는 천연기념물이자 국제희귀종인 노랑부리저어새가 생태연못에 날아들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지난달에는 독수리들도 여럿 날아들어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멸종위기의 귀빈 ‘노랑부리저어새’ 봉하에 나타나다
큰기러기나 쇠기러기 등이 ‘다수파’라면, 화포천 소수파 철새의 대표는 ‘노랑부리저어새’에게 맡겨도 될 듯합니다. 노란색의 부리가 마치 주걱처럼 생겼는데, 먹이를 사냥할 때 물속에 부리를 이리저리 젓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난해는 4월 30일에 2마리가 찾아와 잠시 머물다 갔는데, 올겨울에는 세 배나 되는 여섯 마리가 화포천을 찾았습니다. “여섯 마리가 대수냐?”는 분이 있을 것 같은데, 노랑부리저어새는 천연기념물 제250호로 지정된, 환경부지정 멸종위기 야생조류 1급 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지역에 소수 개체만 발견되는데,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아주 귀하신 몸’입니다.
발에 물갈퀴가 없어서 헤엄은 잘 치지 못하지만 그 대신 다리가 길어서 키만큼 깊은 물에 들어가 부리의 촉각으로 먹잇감을 사냥하지요. 주로 민물조개나 어류, 물속곤충들을 먹고 산답니다. 올해는 강추위가 길이서 물이 얼어 있을 때가 많다보니 배불리 먹지 못해 힘이 좀 없어 보입니다. 봉하 체류 기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이라도 ‘친환경 들판’에서 맛있고 영양 많은 먹이를 많이 먹고 건강하게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봉하에 오셔서 겨울 철새들을 보려는 분들은 몇 가지만 주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철새는 휴식을 방해받으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병약해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놀라서 갑작스레 날아오를 때는 장거리 이동에 쓰려고 비축해둔 에너지가 소비되어 새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되도록 소음이나 갑작스러운 행동은 피하고, 화려한 색의 옷이나 향이 진한 화장은 피해야 합니다.
새를 보고 싶을 때는 쌍안경과 필드스코프(굴절망원경)을 준비해 멀리서 조용히 관찰하고 조류도감 같은 책을 준비하는 것도 좋습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세심하게 보는 인내심과 관찰력도 필요합니다.
화포천과 봉하 들판에 뿌린 노 대통령의 꿈
언제 가나 싶었던 겨울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옛말에 “우수(雨水)·경칩(驚蟄)이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우수’는 눈이 비로 바뀌면서 얼었던 땅이 녹고, 따뜻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때를 일컫습니다. 화포천과 들판 수로에도 슬슬 봄기운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겨울 철새들도 얼마 있으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화포천과 봉하 들판에 각종 겨울 철새들이 날아든다는 것은, 그저 겨울 봉하에 근사한 볼거리가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화포천과 봉하 들판은 노 대통령이 평생 연구 프로젝트로 생각할 정도로 수많은 가능성과 꿈을 설계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노 대통령과 봉하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서 ‘실현 가능한 내일의 꿈’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봉하의 모든 자연 풍경들, 자연생태계, 그리고 올겨울에도 변함없이 잊지 않고 봉하를 찾은 겨울 철새들의 꿈이 인간의 편의와 이기심으로 파괴되는 일이 없도록 ‘사람사는 세상’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이 이어지기를, <운명이다>에 기록된 대통령님의 바람을 담아 전합니다.
“자연 생태계가 복원된 농촌에 아이들이 찾아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내다 가는 날을 꿈꾸었다. 람사르 환경재단 지원을 받아서 논습지 체험캠프를 스무 차례 넘게 열었다. 처음에는 시험 삼아 했는데, 나중에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왔고, 가족 단위 참가자가 늘어났다. 반응이 매우 좋았다. 아이들이 수생곤충을 채집해서 기록하고 그림을 그렸다.
마지막 방문객 인사를 한 후로는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서 내다보면 겨울 철새가 많이 보였다. 내가 외출을 하지 않으니까, 집에서라도 보라고 김정호 비서관이 열심히 무논을 만들어 기를 쓰고 철새를 불러 모으는 것 같았다. ‘우리 잘하고 있습니다. 한번 나와 보세요.’ 새를 불러 모아 시위를 한 것이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새벽에 사람이 없을 때 잠깐씩만 가끔 나가보았다.
물이 있으면 풀이 자란다. 먹을 것을 찾아 새들이 부지런히 자맥질한다. 새들이 똥을 싸면 천연비료가 된다. 자연의 순환이 힘을 쓰면 화학비료를 쓰지 않아도 된다. 논습지는 평생을 두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2011년 02월 17일
노무현재단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3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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