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매트릭스
세일러 (idca****) 2011.01.26 09:13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했던 영화 ‘매트릭스’가 상영되었던 것이 1999년이니 벌써 12년전 일입니다.
매트릭스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신선한 충격의 감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 전이라니 참 시간의 흐름이 빠르기도 합니다.
12년 전이면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매트릭스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려나요?
아니면 워낙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므로 아는 사람들이 더 많으려나요?
저는 영화 매트릭스를 소재로 해서 ‘매트릭스에 갇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전 글: 매트릭스와 헤게모니
찾아보니 2009년 1월 1일에 썼던 글입니다. 이 글을 쓴 뒤로도 벌써 만 2년이 지났으니 역시 시간의 화살이 글자 그대로 쏜살같이 빠르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오늘날 ‘매트릭스에 갇힌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아래와 같이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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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매트릭스에 갇힌다는 것은 어떤 형태인가 하면, 그 매트릭스의 교묘한 논리에 넘어가서 스스로 포섭당하는 것입니다.
사회 내의 권력 집단은 여러 가지 다양한 전략들을 동원합니다. 대다수 피지배 집단이 자신들의 삶에서 부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매트릭스 체제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성경 말씀 중에, 적그리스도가 올 때는 모두에게 열렬히 환영받는 모습으로 온다, 는 취지의 설명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헤게모니의 개념, 매트릭스의 구조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탁월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매트릭스에 갇힌다고 하는 것은, 그 논리에 포섭당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무지한 상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열연한 주인공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허상이었음을 깨닫는 것, 이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찬 영화입니다. 키아누 리브스가 열연한 주인공은, 토머스 앤더슨에서 네오(Neo)로 이름이 바뀝니다. Neo는 New 입니다. 이는 주인공이 ‘깨달음’을 통하여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육당하던 ‘유기체’에서, 이제 자유의지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려면 ‘자각’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교묘한 전략, 교묘한 논리에 속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피지배 집단이 자신들의 처지를 제대로 ‘자각’하는 것만큼 권력집단에게 위협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각’을 위해서는, 매트릭스가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을 알아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접합’이라고 부르는 수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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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에 대한 이전 글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전 글 전체를 먼저 읽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자각’을 통해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네오의 동료 싸이퍼는 결정적인 순간에 동료들을 배반함으로써 네오를 위기에 처하게 만듭니다.
그 때 네오가 싸이퍼에게 묻습니다.
무엇 때문에 동료들을 배반하는가?
싸이퍼가 대답합니다.
그들이 나를 매트릭스에 다시 넣어주기로 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네오에게 싸이퍼는 계속 말합니다.
‘자각’이라고?
이 현실을 봐라.
‘자각’을 통해 매트릭스를 벗어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현실이 고작 이런 것이냐?
매트릭스를 벗어나 ‘자유’라는 것을 얻은 게 뭐가 좋으냐?
‘진짜’ 음식이라고?
맛대가리 하나 없는 진짜 음식 먹는데 이제는 질렸다.
반면 이 스테이크는 어떤가?
이게 매트릭스 시스템이 만들어내서 우리 뇌 속에 심어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은 알지만 무슨 상관인가? 맛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쾌락을 준다. 난 그거면 충분하다.
이렇게 해서 싸이퍼는 ‘자각’을 통해 겨우 탈출했던 매트릭스에 다시 넣어주는 것 하나를 조건으로 동료들을 배반합니다.
자유를 얻은 뒤 당면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보다 노예상태에서 받아먹을 수 있는 달콤한 음식이 더 낫다고 생각한 싸이퍼는, 진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도로 눈을 질끈 감기로 선택합니다.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자기 자신을 속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영화에서 만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꽤 자주 일어납니다.
요새 아파트 가격이 조금 꿈틀대는 조짐이 보이니 예의 대한민국 아파트 불패론이 다시 나옵니다.
대한민국 아파트 가격이 너무 높다, 이렇게 계속 오르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알지만 계속 오를 것이니 지금이라도 사는 것이 낫다.
투기꾼들 배 좀 불리면 어떤가.
경제가 나빠지는 것보다는 더 낫다. 부동산 버블을 계속 조장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도 더 낫다. 정부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이라도 아파트를 사야겠다.
이런 분들은 싸이퍼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대한민국에서만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항상 나타나곤 했습니다.
금융史에서 항상 언급되는 고전적인 버블 사례인 남대서양 주식회사 버블의 경우를 보면,
어느 보수적인 은행 지점장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미쳤다면 어느 정도는 우리도 그들을 흉내 내야 한다.”
이 은행 지점장은 애써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 매트릭스에 들어가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 은행 지점장이나 싸이퍼나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본인들은 자기가 똑똑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곧 버려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러 ‘막차’를 탔다고 말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싸이퍼는 막차를 탄 것입니다.
싸이퍼는 매트릭스 시스템에 다시 들어감으로써 가상의 것이긴 하지만 다시 쾌락의 느낌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라는 것을 얻어보니 좋은 것 하나 없더라, 동료들을 배신하고 지금이라도 다시 매트릭스 시스템에 들어가는 것이 더 똑똑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싸이퍼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매트릭스는 인간 ‘유기체’를 원료로 삼아 기계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가동하는 시스템입니다. 인간 유기체들에게서 에너지를 짜내는 동안 그들을 ‘사육’합니다. ‘사육’이란 고기를 얻기 위해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매트릭스가 인간 유기체들에게 주는 먹이는 ‘환상’과 ‘쾌락’입니다. 인간들이 노예상태로 얌전히 있도록 하기 위해 가짜 ‘환상’과 ‘쾌락’을 만들어내서 뇌 속에 심어줍니다.
그런데 이처럼 개개 인간 유기체들에게 환상과 쾌락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도 합니다. 즉 에너지를 짜내기 위한 시스템이지만, 그 시스템을 계속 돌리는 것 자체에 상당한 에너지가 소요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스템을 돌려 짜낼 수 있는 에너지와 시스템을 돌리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를 서로 비교해야 합니다. 얻을 수 있는 수익과 들어가는 비용을 비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익보다 비용이 더 커지면, 그때는 당연하게도 매트릭스 시스템을 폐기하는 것입니다. 매트릭스 시스템이 사육하던 인간 유기체들은, 다 방전되어 이제는 쓸모 없어진 건전지를 버리듯이 모두 버려지는 것입니다.
은행지점장이나 싸이퍼는 버려지기 직전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막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곧 버려질 상태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고 묻는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이 상태에서 아파트 매트릭스 시스템이 계속 돌아가면 누구에게 이익인가, 를 따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전체 가계의 자산 구성 중 76.8%가 부동산입니다. 이 상태에서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르면 대한민국에서는 가계들이 부자가 되고 기업들은 가난해지는 결과가 나옵니다.
저는 아래 글을 통해서 이와 관련된 설명을 드렸고, 책에서도 관련된 경제지표를 보강해서 충분히 설명드렸습니다.
이전 글: 비정상이 정상을 조롱할 때
덧붙여 얼마 전에,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 건설사인 S물산은 용산의 주상복합 아파트 개발사업권을 포기해버렸습니다.
현 정부 들어 큰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L그룹은 분당에 있는 백화점을 매각해 버렸습니다. 판교신도시가 추가로 입주했고, 용인이 경전철로 이어졌습니다. 광교신도시가 더 들어설 예정입니다. 분당신도시의 미래를 밝게 볼 법도 한데,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르고, 분당신도시가 계속 번영한다면 위 두 대기업은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어떻게 진행될까요?
‘자본주의’가 아파트 가격을 계속 오르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분들을 상당히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매트릭스 시스템을 돌려서 짜낼 수 있는 에너지보다 돌리는 데에 들어가는 소요 에너지가 더 큰데도 계속 시스템을 돌려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 ‘비용’이 더 큰데도 자본주의가 이 시스템을 계속 돌려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는 자본주의 논리에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아주 쉬운 얘기지요.
그런데도 인간 유기체들의 귀에 이 쉬운 얘기가 잘 안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파트 매트릭스 시스템이 아주 영악하기 때문입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겠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논리입니다. 아파트 매트릭스 시스템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할 때도 인간 유기체들의 탐욕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 때문에 그동안 아파트 매트릭스가 해온 거짓말들은 인간 유기체들의 뇌 속에 철저하게 뿌리박혀 버렸습니다. 그 결과 아파트 매트릭스 시스템의 전원스위치가 이미 내려졌는데도 인간 유기체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면서 가짜 ‘환상’과 ‘쾌락’을 최대한 유지시켜 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싸이퍼 같이 막차를 타는 유기체들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시스템을 계속 돌리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더 커지면,
이제는 시스템 자체를 폐기처분하는 것이 자본주의에 맞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폐기처분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요새 대한민국 아파트 불패론이 다시 들리길래 몇 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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