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9호] 한국의 개혁가 – 노무현 대통령
정치와 싸우기 위해 정치인이 되다
(국민참여당 / 이병완 / 2010-11-15)
Ⅰ. 글머리에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2003.2.25 ~ 2008.2.25)이었다.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퇴임 이후 서거한 2009년 5월 23일까지 짧은 기간 역시 「대통령 노무현」의 삶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경남 김해의 봉화산 자락 묘에는 단지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여섯 자만이 새겨져 있다.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한 특별한 삶에 대해 역사적 평가의 명칭을 한 마디로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렵기 이전에 버거운 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을 역임한 한 인간의 삶을 단면적으로 규정해 버릴 우(愚)를 범할 수도 있다.
노무현 그가 ‘대통령’을 역임하지 않았고, 한 시민으로서 삶의 지향과 실천이 특별한 외길을 걸었었다면 이런 고민은 그렇게 번민스럽지 않을 것이다. 헌법상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고 행정부의 수반이다. 이 같은 헌법적 지위와 권한을 부여받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길든 짧든 정치적 과정과 절차를 밟는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재임 중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먼저 정치적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대통령은 정치인이다. 대통령은 정치인이 정치적 포부를 이룰 수 있는 최종적인 수단이다.
대통령 노무현도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 퇴임 이후 그에게 더 많은 삶이 주어졌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을 떠나 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면 인간 노무현의 특별했던, 그리고 치열했던 삶의 지향을 파악해 보자는 것이 될 것이다.
왜 정치를 시작했고 왜 대통령에 도전했으며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이루고자 했던 것인지 여느 정치가와는 다른 특별하고 뚜렷한 동인(動因)과 일관된 실천의 궤적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개혁가 노무현’은 바로 이 같은 시각에서 바라본 인간 노무현의 삶의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 노무현’의 집권기간 공과를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Ⅱ. 정치를 바꾸자
노무현은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실패한 대통령’으로 규정한 첫 대통령이다. 그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실패로 규정한 것은 그가 평소에 즐겨 사용했던 어법(語法)상의 역설(逆說)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못 박았다. 그의 미완의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그는 ‘왜 실패했을까’에 대해 논리적으로 상세히 적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실패의 요인을 그는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와 싸움을 벌인 것’으로 분석해 놓고 있다.
그랬다. 노무현은 정치와 싸우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정치를 바꾸기 위한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그가 싸움을 걸었고, 도전했던 정치는 ‘분열주의’와 ‘지역주의’ 그리고 ‘기회주의’였다.
1. 분노로 정치를 시작하다.
1987년 6월 항쟁을 함께 치른 민주세력은 그해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극단적인 분열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의 분열은 당시 모든 지역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이어졌고, 부산의 민주화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은 분열과 갈등을 두려워하면서도 바닥 모를 무력감으로 지새웠다. 그러던 중 ’88년 4월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출마영입 제안을 받게 된다. 고민했다. 가족들의 반대도 거셌다. 민주화 동지들과 밤새워 토론했다. 결국 결심한다.
‘대선 패배로 인한 6월 항쟁의 좌절을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룬 것이다. 분열된 민주세력 통합의 길을 정치에서 찾기로 했다. 정치입문의 꿈과 대의가 분명했다. 민주세력의 분열과 민주화의 좌절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당선이 수월한 지역구를 택하라는 김영삼 총재의 호의를 거절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구를 택한다. 노무현이 동구를 지역구로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상대인 민정당 허삼수 후보자가 전두환 정권의 왼팔로 통했던, 5공화국 독재의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허삼수 후보와 대결을 기피했지만 노무현은 반드시 그를 이겨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오기이기도 했다.
노무현이 시작한 정치와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 싸움에서 승리했다. 노무현이 첫 싸움 상대를 허삼수 후보로 선택한 것은 노무현이 참여했던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6월 항쟁에 뛰어든 직접적 계기를 제공했던 1981년 9월의 부림(釜林)사건의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부림사건은 노무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었다. 당시 공안당국은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이호철, 장상훈, 송병곤, 설동일 등 부산지역 지식인과 교사, 대학생 22명을 구속했다. 그때 이들의 변호사는 부산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이흥록, 김광일 두 명밖에 없었다. 검찰이 김광일 변호사마저 잡아넣겠다고 하자 변호사를 맡을 사람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듣고 변호사 노무현은 특별한 고민 없이 구치소로 피고인 접견을 갔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모두 영장 없이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 달 넘게 불법구금상태였다. 변호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들과 대화하고 변론을 맡으며 인생관도, 세계관도 180도 바뀌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상고 출신으로 언감생심 사법시험을 보았다. 판사생활도 1년여 만에 청산한 뒤, 변호사로 성공하여 조그만 농장이나 별장 정도 가지고 싶었다. 자식도 유학 보내 부부가 고졸로 마친 공부의 한을 풀고 싶었다. 그렇게 30대 중반까지 마음먹은 대로 달려왔던 인생의 꿈을 접었다. 인권변호사로, 노동변호사로, 그리고 6월 항쟁의 거리에서 ‘악의 권력’과 맞서는 민주투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13대 국회 초선의원 노무현은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인’이 아니었다. 국회의원 회관과 의사당은 몸에 맞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절규가 맺힌 곳이 그의 현장이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원진레이온’사건과 온도계 제조공장에서 일하다 두 달 만에 수은중독에 걸려 석 달 만에 사망한 문송면 군 사건은 국회의원 노무현의 절망을 깊어지게 했다. 노동자들의 절규를 모른 체하는 정치권의 이해타산이 그를 좌절케 했다.
노무현은 1988년 가을 국회 5공 비리특위(제5공화국 비리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스타가 되었다. 그를 ‘청문회 스타’로 만든 것은 어쩌면 노동 현실과 정치적 이유로 이를 외면하는 ‘정치’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텔레비전 생중계로 진행된 5공 청문회에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당 지도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정 회장의 일해재단(전두환재단)에 대한 거금의 출연이 어쩔 수 없는 ‘강제모금’이 아니라 결국은 ‘정경유착’이었음을 집중 심문했고, 정 회장의 사과를 받아냈다. 상식적인 분노가 그를 정치스타로 만들었다.
2. ‘통합의 정치’에 도전하다.
국회의원 노무현을 ‘현장’에서 ‘정치’로 발을 옮기게 한 것은 1989년 4월 강원도 동해와 8월 서울 영등포을(乙)의 국회의원 재선거 과정과 결과였다.
동해 재선거는 후보 매수사건으로 그가 몸담고 있던 통일민주당의 서석재 사무총장이 구속되었다. 영등포을(乙) 재선거는 야권의 분열로 민정당에게 패배했다. 이 두 사건은 정치입문의 동기였던 민주세력 통합이 절실한 시대적 과제임을 새삼 일깨웠다.
노무현과 이해찬, 이상수, 김정길, 이철 의원 등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과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비밀모임인 ‘정치발전연구회’를 만들었다. 각자 소속 정당 안에서 야권통합운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1990년 1월 3당(민정당, 민주당, 자민련) 합당이라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이의 있습니다” 그의 외침은 헛웃음 속에 묻혀 버렸다.
노무현은 한국정치의 절망을 넘어 용암이 터지는 듯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순간 정치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분명한 결심을 다지고 의기를 곧추세웠다.
‘싸워야 한다. 정치와 싸워야 한다.’ 3당 합당은 호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보수 기득권 세력에 장악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지역 구도를 고착시킨다고 보았다. 여기에 한국정치가 회복할 수 없는 기회주의의 탁류에 휩쓸려 갔음을 목도한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쉼 없이 계속된 ‘노무현 정치’가 시작되었다. 지역분열주의와 기회주의 정치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싸움의 1차 목표는 야권통합이었다. 통일민주당에 있다가 3당 통합을 거부한 8명의 의원 등이 이른바 ‘꼬마민주당’이라 불리운 ‘작은 민주당’을 만들고 1991년 9월에는 마침내 김대중 총재의 신민당과 통합(민주당)을 이루었다.
3. 지역주의 정치와 싸우다.
노무현은 1992년 4월 14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민주당 대변인으로 부산 동구에 다시 도전했다. 동구는 첫 승리를 거두었던 정치적 고향이지만, 이미 정치적 적진이 되어 있었다.
상대는 13대 선거에서 맞붙었던 5공 출신 허삼수 후보였다. 4년 전 총선에서 허 후보를 ‘반란군 총잡이’라며 “국회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외쳤던 김영삼 총재가 이번에는 “허삼수 씨는 충직한 군인이다. 뽑아주면 중히 쓰겠다.” 말했다. 한때 노무현의 영웅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일그러진 영웅’이 되고 말았다.
1995년 6월, 민주당 부총재로 부산시장 선거에 도전했다. 다시 떨어졌다. 강고한 지역주의 벽을 실감했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야권의 분열과 1990년 1월 3당 합당이 야기한 지역분열 구도가 고착화되고 말았다. 노무현은 어떤 정치를 왜 해야 하는지 점점 명료해짐을 알게 되었다.
정치적 지역주의 극복과 민주세력의 통합이라는 정치적 명제를 이젠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였다.
19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종로구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다. 세 번째 낙선이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의 갈등으로 민주당 주류가 김대중 총재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로 집당 탈당한 뒤 남아있던 민주당 후보였다. 1997년 결국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정권교체만이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임을 인식했다.
1998년 7월엔 선거법 위반으로 이명박 한나라당의원이 사퇴한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노무현은 그러나 1999년 종로지구당 포기를 선언하고, 2000년 6월 부산시장 출마를 선언한다. 종로구 국회의원으로서 안주하기에는 한나라당이 지방선거를 겨냥해 다시 일으키고 있는 지역주의 광풍을 좌시할 수 없었다. 결과는 네 번째 낙선이었다.
철옹성 같은 지역주의의 벽에 부딪혀 또다시 튕겨져 나왔을 때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이었다.
1981년 부림사건의 충격으로 30대 중반에서 인생의 방향을 바꾼 지 19년, 그동안 그를 지탱하던 분노의 열정마저 소진될 즈음 ‘노사모’는 그에게 마지막 불꽃을 안겨주었다. 항상 현장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주목해 보지 않았던 민초(民草)의 힘, 시민의 열정이 새까맣게 타버린 가슴에 불을 당겼다.
바로 시민주권(市民主權), 지도자가 아니라 시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각성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항상 밤하늘을 뒤덮고 있지만 해와 달빛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셀 수 없는 별들을 새삼 알게 되었다.
Ⅲ. 시민주권시대를 꿈꾸다
2000년 6월 6일 대전대학교 앞 조그만 PC방에 60여 명의 학생, 주부, 직장인들이 모였다. 노사모의 창립총회였다. 정치꾼들이 아닌 정치 문외한, 정치 왕초보들의 모임에서 노무현은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을 되새겼다. ‘사람 사는 세상’은 1988년 13대 총선 때 그가 선거구호로 내세웠던 민중가요 ‘어머니’의 첫 구절이다.
「사람 사는 세상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운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
……………………………
아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 나가리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을 위해」
노무현은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한다. 대선은 그가 정치에 입문한 이후 줄곧 도전해 온 정치와 마지막 싸움임을 그는 알았다. 말 그대로 단기필마(單騎匹馬)였다. 그가 뛰어든 대선판은 조중동의 지원과 지역주의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대세론으로 민주당 당심을 장악하고 있는 이인제 후보 등 그가 기웃거리거나 낄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해와 달에 가려져 있지만 숨어서 빛을 내고 있는 수많은 별들을 기억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주인들인 시민을 믿었다. 2002년 대선을 준비하며 그는 지역주의도 야권통합도 아닌 ‘원칙과 상식’을 일관되게 외쳤다. ‘원칙과 상식’은 노무현이 만든 원칙이나 상식이 아니다. 깨어있는 시민의 눈에 비치는 원칙과 상식이다. 시대가 절망하고 있는 반칙과 특권, 몰상식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그가 몸담고 있던 집권여당 새천년민주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민주적인 반칙과 몰상식에 먼저 분노했다. 그는 대선 출마의 동기를 정말 담백하게 술회했다.
“2002년의 위기는 다름 아닌 이인제 씨의 존재였습니다. 이회창 씨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001년, 2002년 노사모가 폭발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느낀 위기감은 이회창 씨의 존재보다는 이인제 씨가 민주당 후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인제 씨는 3당 합당에 따라가 도지사도 하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불복도 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민주당에 와서 선거대책위원장이 되고,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하니까, 전통적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 즉 소신을 이익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해 오던 젊은 사람들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많은 위험을 감수했던 사람들이 보면서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겠습니까. 그 위기감 위에서 제가 그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결국 대통령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노무현 회고록 「성공과 좌절」 중에서)
2002년 대통령선거는 우리 정치사상 극적인 질적 변화를 가져 온 선거였다. 한 마디로 과거 역대 대선이 힘의 결합을 통한 물리적 변화의 결과였다면 2002년 대선은 형질변화를 통한 화학적 변화의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 돈, 계보, 동원이라는 전통적인 공학적 물리적 요소를 가치와 소통, 자발성, 시대정신이라는 새 시대의 화학적 요소가 눌러 이긴 것이다. 원칙과 상식으로 무장한 시민정신이 정권창출의 주역이 되었다. 노무현은 정치인이 지켜야 할 가치를 알기 전에 시민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정치와 싸워왔던 정치인이다.
그는 참모들에게 항상 강조해 왔다.
“실리와 대의가 충돌할 때는 대의를 택하라.”
“정치인들이 때로는 이해관계에 민감한 국민들이 아니라 가치에 민감한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정치노선을 갖고 꿋꿋하게 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성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가치에 민감한 역사, 또 그런 역사에 민감한 사람들과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력을 떨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은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 주어진 임기 5년을 마쳤다. 그는 5년 내내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힘의 원천은 ‘깨어있는 시민’에 대한 굳은 믿음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 자신이 냉혹하고 치열한 권력시장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알았다. 한정된 시간의 헌법적 위탁권력자로서 영속적인 거대 권력시장의 정글에 갇혀 있음을 절감했다. 정당, 언론, 시민세력, 이념세력, 자본세력, 그리고 국제역학 속에서 발버둥친 5년이었다.
그가 끝내 ‘사람 사는 세상’의 주역이라고 굳게 믿어온 깨어 있는 시민들의 원칙과 상식이라는 가치의 눈높이를 붙들고 있었기에 그는 발버둥쳤다.
Ⅳ. 글을 마치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봉화산 자락 그의 묘에는 그의 지향과 가치를 한 줄에 담은 24자(字)가 새겨져 있다. 대통령 노무현이 아닌 인간 노무현이 시대와 역사에 남겨놓은 유제는 가치와 정신이다. 그는 자신의 좌절과 실패를 이야기한 첫 대통령이다. 좌절과 실패의 진솔한 술회를 통해 미래를 열고자 한 첫 국가지도자였다.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의 가난한 농사꾼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2009년 5월 23일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평생을 도전으로 살아왔다. 그는 도전으로 일관한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때를 물으면 어김없이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라고 말한다. 그 후 5년여 그는 행복했다. 시류를 따라 모나지 않게, 정직하게 살았다.
그의 행복했던 꿈을 깨뜨린 것은 1981년의 부림사건과의 운명적인 조우였다. 그 이후 그는 시대마다 펼쳐지는 정치적 트라우마를 도전으로 극복해왔다. 반칙, 변절, 기회주의, 지역주의, 파벌, 특권 그리고 고독이 그가 싸운 대상들이었다. 그가 도전했고, 마지막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대상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적들로 상존하고 있다. 아니 더욱 발호하고 있다.
그의 죽음 앞에 펼쳐지고 있는 정치판의 현실은 왜 그가 그토록 정치와 싸웠고, 그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회고록 「성공과 좌절」의 마지막 페이지는 오늘의 정치권이 안고 있는, 진정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벌었어도 그것만 가지고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우리 국민들의 도덕적 자각과 성숙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권력 내부의 원칙 없는 투쟁, 시장과 정치권력 사이의 타협 없는 투쟁, 이런 모순만 반복될 것입니다. 그 위에 존재하는 국민의 인간다운 삶과 가치, 주권자로서의 지위, 이런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주의와 불신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본질적 과제입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 그가 이상으로 그려왔던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시대적 과제와 정책적 방안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실천했다. 대한민국 60여 년의 미결로 남아 있던 일제식민지 치하의 굴곡진 역사를 반성과 해원을 통해 국가 차원의 문제로 제기하고 풀어나갔다.
불법적 국가 공권력에 의한 희생자들을 향해 국가원수로서 진솔한 사과를 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국민 통합의 길을 열고자 했다. 지역으로 분열된 국민통합의 길을 국가균형발전정책에서 해답을 찾고, 세종시 건설과 혁신도시 착수라는 구체적 전략과 정책을 구체화시켰다.
그가 임기 중반을 넘기며 심혈을 기울여 체계를 세웠던 동반성장 전략은 한 세대(30년)를 내다본 대한민국 그랜드디자인이었다. 동반성장전략은 수도권과 지방, 동과 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서민계층과 중상위층이 대한민국이라는 미래의 공동체를 어떻게 함께 발전시키고 존속시켜 나갈 것인가를 제시한 원대한 비전이었다. 동반성장전략은 궁극적으로는 남과 북의 평화와 공존을 통한 통일의 대계(大系)이기도 했다. 10.4 남북정상선언의 구체적 청사진도 동반성장전략의 그림 속에 깃들어 있었다.
노무현, 그는 갔다. 그가 가자마자 모든 것이 뒤틀어지고 허물어져 내렸다. 그러나 다시 그의 부활을 본다. 부정할 수 없는 시대적, 역사적 과제들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병완
광주광역시 서구의회의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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