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수년째 이어진 경기 침체로 가계 빚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정부의 내수활성화 대책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도 가계의 소비지출 여력이 바닥난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은행이 지난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가계대출 현황’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말 현재 국내 가계대출 차주(대출자)는 모두 1977만 명에 이른다. 전체 대출 잔액은 1845조3000억원이다.
현재 약 300만 명의 가계대출자가 원금과 이자를 갚느라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든 상태다. 이 가운데 175만 명은 소득보다 원리금(원금과 이자) 상환액이 더 많아 소비 여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 3년을 지나면서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투자와 생활고 등으로 가계대출이 크게 불어난 데다 2021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 치솟은 금리가 가계에 큰 부담을 안긴 것으로 보인다.
서민 주머니 사정이 나빠졌다는 사실은 신용카드 사용에서도 알 수 있다. 카드 리볼빙(분할 납부) 금액과 현금서비스 연체율이 급증한 것이다.
지난달 21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최승재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신한·삼성·KB국민·현대·롯데·하나·우리 7개 카드사 리볼빙 서비스 연체액은 1500억원이다. 연체율은 평균 2.38%로 조사됐다.
지는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이 늘어난 금액이다. 2021년 1분기 기준 5조5400억원이던 리볼빙 이월 잔액은 올해 1분기 기준 7조3400억원으로 2년 만에 32.5% 증가했다.
연체액도 급등했다. 2021년 1분기 기준 리볼빙 서비스 연체액 총합은 1000억원(연체율 1.76%) 수준이었다. 올해 1분기 연체액은 1500억원으로 50%가 증가했다. 연체율 또한 평균 2.38%로 급등했다.
카드론의 연체액과 연체율도 마찬가지다. 카드론 연체액은 2021년 1분기 6200억원이었으나 지난해 말부터 급격히 증가해 올해 1분기 7600억원으로 늘었다. 연체율도 1.79%에서 2.13%로 증가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내수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신용카드 리볼빙과 카드론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가계에서 저축이나 소비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이 바닥난 것이다. 이는 고금리 시대 가계부채 위험을 키우는 것은 물론 정부 경기 부양에도 상당한 걸림돌이다.
경기 부양은 시장에 돈이 돌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가 경기 부양을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금리를 낮춰 시중에 많은 자금이 순환하도록 하는 금융정책이다. 다음으로 정부가 직접 재정사업을 추진해 시장에 자금을 투입하는 재정정책이다. 세금 인하도 재정정책 가운데 하나다.
이번 정부는 건전재정을 정책 기조로 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물론 대다수 공공기관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랏돈을 아끼고 있다. 이 때문에 재정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남은 방법은 금융정책을 통한 내수활성화다. 정부는 올해 들어 관광과 지역 골목상권, 소상공인 등 코로나19 이후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내수활성화 대책을 펼쳐왔다. 기재부는 지난 4일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이런 대책을 이어갈 것을 예고했다.
해외 관광 수요를 국내로 돌리기 위해 여행 비수기인 11월에 3만원 상당 숙박쿠폰 30만 장을 뿌린다. 외국인의 한국 재방문 유도를 위해 항공권 700장도 증정한다. 9월 동행축제, 11월 코리아 세일페스타 등 대규모 소비행사는 규모를 확대한다.
이러한 정부 내수 대책은 결국 국민이 돈을 써야 빛을 발할 수 있는데 현실은 그럴 여력이 없다. 오히려 가처분소득이 줄면서 대출 상환 부담을 키우고, 결국 연체율 상승으로 금융 불안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가처분소득 감소는 수출마저 부진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 민간 소비 회복까지 막아 결국 실물 경기 발목을 잡게 된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비 회복이 더딘 것은 고금리, 고물가 부담 때문인데, 특히 고금리의 부담은 올해 상반기에 충분히 나타나지도 않았다”며 “고금리가 소비·투자·주택가격에 본격적으로 영향 미치는 데 반년∼1년의 시차가 있기 때문으로, 하반기부터 고금리 여파가 뚜렷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장기적인 경기 침체를 막으려면 정부가 기업보다 가정의 가처분소득을 관리해 줘야 하는 시기”라며 “기업의 제품가격 인상을 자제토록 권고하고 정부가 부채를 더 지더라도 가계 대출이자를 더 늘리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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