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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가 등장한 1996년부터 대략 2004년까지 활동한 아이돌 가수들을 통상 1세대 아이돌이라고 부른다. H.O.T.와 젝스키스, S.E.S., 핑클, 신화 등 케이팝(K-Pop) 아이돌의 원형을 잡아가며 국내를 중심으로 활약한 이들이다. 2세대 아이돌은 2004~2011년 활동한 동방신기, SS501,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카라, 2NE1 등이다. 2세대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팬덤을 확장해 한류 영토를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국내 중심의 1세대, 아시아로 확장한 2세대라는 열쇳말로 정리할 때 고민스러운 대상이 있다. 미국 진출을 꾀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한 비, 보아, 원더걸스 등이다. 이들을 따로 떼어 1.5세대라 부르기도 한다. 거듭된 실패에도 꼭 미국 진출을 해야 했을까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케이팝의 발전 단계로 볼 때 외면할 수 없는 시장이었다. 미국 공연은 월드투어와 맞먹는 수익을 가져다주고 음원 판매와 광고 등의 매출도 크다. 성공하면 ‘월드스타’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2008년 SM엔터테인먼트는 보아가 일본에서 거둔 성공 방식 그대로 미국 진출을 준비했다. SM USA를 설립하고, 유명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을 제작한 맥스 구스를 미국 내 매니저로 선택했다. 북미 최대 에이전시인 CAA와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공연·광고 대행을 맡겼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준비가 부족했다. 우리와 친숙한 일본과 달리 미국에선 시장 포지셔닝 기준부터 달랐다. 미국 대중음악 시장의 여성 솔로 뮤지션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뉘었다. 첫째는 섹스 어필을 앞세운 댄스힙합 뮤지션이다. 다음은 에이미 와인하우스나 더피처럼 재즈, 솔(Soul), 리듬앤드블루스(R&B)를 부르는 폭풍 가창력의 뮤지션이다. 마지막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처럼 소녀들의 우상인 틴 팝 아이돌이 있었다.
보아의 콘셉트는 ‘역동적인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작은 소녀’였다. 첫 범주와 거리가 있고 두 번째 범주로 가기엔 성량이 모자랐다. 20대 중반 ‘동양 여성’이 미국 10대 소녀들의 동경심을 자아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보아는 어느 범주에서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미국 여성 가수의 인기 비결 분석이 철저하지 못했다. 물론 일본에서처럼 기획사 프로모션으로 새 범주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매니저는 인디 레이블의 최고경영자였다. 안타깝게도 보아는 그런 포지셔닝에서 폭발력을 보여줄 수 없었다.
SM은 이후 아시아에 더 집중했다. 이수만 프로듀서는 “중국이 미국 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한·중·일의 아시아 네트워크가 활성화하면 미국과 유럽에 견줄 최대 규모의 시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시장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미국 진출을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SM은 일본을 겨냥한 동방신기, 중화권을 겨냥한 슈퍼주니어를 기획해 성공을 거뒀다. 아시아에 특화된 멤버들로 구성한 2세대 아이돌은 아시아에서 팬덤을 확고하게 형성했다.
박진영 대표가 이끄는 JYP엔터테인먼트는 한국 프로듀싱 시스템으로 미국에 진출하는 길을 택했다. 스타마케팅에 의존한 진출은 일회성에 그치겠지만, 한국 시스템이 미국에서 자리잡으면 아티스트 진출이 쉬워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2004년 미국으로 떠난 박진영은 현지 아티스트들의 앨범 프로듀싱에 참여해 인맥을 넓히는 방식으로 미국 시장을 파고들려 했다. 프로듀서가 미국 주류 음악계에 자리잡는 게 관건이라고 본 것이다. 노력 끝에 2006년 2월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비의 단독 공연을 성사시키는 등 일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프로듀싱 시스템의 성공적 안착에 미치지 못했다.
JYP는 2009년 걸그룹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방식을 바꾸었다. 2007년 데뷔한 원더걸스는 <텔 미> <노바디>를 연이어 성공시키며 당시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원더걸스는 철저하게 바닥부터 올라가는 전략을 택했다. 미국 가수들이 지역 클럽 등 작은 무대에서 활동하다 서서히 큰 무대로 나아가는 ‘미국식’을 따랐다. CAA와 제휴해 미국 인기 아이돌 그룹 조나스 브라더스의 전미 투어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오프닝 무대를 펼쳤다. 8~14살 정도의 로틴(Low teen) 팬을 공략하기 위해 미국 아동복 브랜드와 계약을 맺고 의류매장에서 CD를 판매했다.
성과가 없지 않았다. 한국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노바디> 영어 싱글앨범이 ‘빌보드 핫100’ 76위에 올랐다. 미국 지상파방송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미국 내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고, 수익도 신통치 않았다. 배우 일도 겸한 비와 달리, 원더걸스의 미국 활동은 손익분기점에 이르지 못했다.
2012년 12월31일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열린 새해맞이 공연 무대에 오른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부르며 말춤을 추고 있다. REUTERS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은 실패로 마무리됐다.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바닥을 훑었지만 아시아 가수에게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져 미국 음반사들이 투자 약속을 거둔 것도 악재였다. 결국 한국 가수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바꿀 계기, 혹은 대중적 인지도를 높일 결정적 ‘한 방’이 없는 한 두꺼운 미국 시장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새겨야 했다.
YG엔터테인먼트는 상대적으로 외국 진출에 소극적이었다. 2008년 가수 세븐이 미국에서 고전한 탓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음원 수익 감소 위기를 YG도 피해갈 수 없었다. YG는 뉴미디어로 눈을 돌렸다. 텔레비전 출연이 시간과 장비의 한계로 아티스트들의 실력과 잠재력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판단해 인터넷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환경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외국 팬들도 인터넷으로 케이팝 스타를 찾는 일이 늘었다. 팬과의 소통과 함께 팬덤이 빠르게 늘어났다.
특히 유튜브는 케이팝 글로벌 확산의 중심 매체로 떠올랐다. 세계 팬들이 유튜브에 오른 동영상을 소셜미디어로 공유하면서 유튜브가 음악산업에 끼치는 영향력도 커졌다. 유튜브에선 노래하고 춤추는 동영상의 인기가 높았고, 케이팝이 적합한 콘텐츠였다.
한국 기획사 대부분이 유튜브 공식 채널을 마련하고 뮤직비디오를 올렸다. 굳이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동영상이 순식간에 외국 팬들에게 퍼졌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가 10여 년에 걸친 외국 진출 노력의 몇 배에 이르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환경에 힘입어 YG의 빅뱅, 2NE1 등이 북미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원더걸스가 미국 아동복 매장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2012년 7월15일 YG의 유튜브 채널에 소속 가수 싸이의 신곡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올랐다. 싸이는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가사 등으로 국내에서 명성이 높았지만 일반적인 케이팝 아이돌과는 거리가 있다. 연습생을 거친 준수한 외모의 아이돌이 아니고 외국 팬덤도 없었다.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또한 국내 팬을 겨냥해 만든 코믹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술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강남스타일>이 공개되자 YG 소속 2NE1의 멤버 산다라 박이 뮤직비디오를 트위터에 올렸다. 보름 정도 뒤 스쿠터 브라운이라는 유명 인플루언서가 이를 트위터에 공유하면서 “어떻게 내가 이 친구와 계약하지 않았지?”라고 썼다. 이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날을 기점으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순식간에 1천만 건을 넘어섰다.
이후 폭발적 증가세를 보였다. 두 달 뒤 <강남스타일>은 아이튠스 음원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9월22일 한국어 가요로는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핫100’ 64위에 오른 뒤 9월 말 2위까지 올랐다. 유튜브에서 단일 동영상으로는 처음 조회수 10억 건을 돌파했다. 영국·독일·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 등 30개국 이상의 음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그해 말 뉴욕 타임스스퀘어 새해맞이 무대의 주인공은 싸이였다. 싸이는 세계인들과 함께 <강남스타일>을 부르며 흥겹게 말춤을 췄다. 그야말로 세계적 열풍이었다.
유튜브를 통한 <강남스타일>의 성공은 가요계 안팎에 충격을 줬다. 이 곡은 전형적인 케이팝 스타일이 아니고, 싸이도 케이팝 시스템으로 훈련된 아이돌이 아니다.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B급 정서로 충만했고, 우스꽝스러운 아시아인의 모습이 불쾌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솔직하고 유쾌한 스타일은 세계인의 호응을 끌어냈고, 케이팝을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강남스타일> 이후 세계에서 케이팝의 인지도가 크게 올랐다. 국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펼쳤던 날갯짓은 소셜미디어로 빨라지고 폭도 넓어졌다.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yzkim@koreaexi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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