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거듭거듭 치욕을 안겨주고 있다. 16일 도쿄 한·일정상회담 뒤의 공동기자회견에서는 구상권 포기까지 명확히 천명했다.
이제까지 윤 정부는 대위변제니 제3자 변제니 하는 표현을 수없이 사용했다. 제3자인 한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전범기업의 책임을 떠안는 방안을 합리화하고자 그런 법리를 계속 주지시켰다.
제3자가 책임을 인수하면 제3자가 채무자에게 구상권을 갖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법적 의무 없이 책임을 떠안았으니, 채무자에게 변상을 청구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 질의응답 때 "만약 구상권이 행사된다고 하면 다시 모든 문제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구상권 행사는 판결 해법을 발표한 취지와 관련해 상정하고 있지 않다"라고 못을 박았다. 차기 정부가 혹시라도 구상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내놓은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윤 정부는 제3자 변제 방식을 선언한 데 이어 구상권 포기까지 추가로 선언했다. 이런 두 단계 조치를 통해 형상화된 것은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이미지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모든 게 해결됐다는 일본의 거짓 주장을 2단계 법적 조치로 합리화해준 셈이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 판결에서도 판시됐듯이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양국 정부의 합의 여하와 관계없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임의로 소멸시킬 수는 없다. 윤 대통령의 선언은 양금덕 할머니나 이춘식 할아버지 같은 피해자들에게는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구상권 포기 선언에 더해, 윤 대통령의 이유 설명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제3자 변제 방식에 따라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면, 그 이유를 일본에서 찾아야 한다. 가령, '일본은 처음부터 죄가 없었다'거나 '우리가 일본을 오해했다' 같은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북한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기자회견 발표문에서 "오늘 아침 북한은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여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였습니다"라고 한 뒤 "날로 고도화되고 있는 북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 한·일 공조가 매우 중요"하다고 발언했다.
그는 굴욕적인 이번 조치의 이유를 북핵과 미사일에서 찾으려 했다. 북한 위협론을 내세우며 국민 인권을 탄압해온 냉전 시대의 유산을 양금덕·이춘식 같은 피해자들의 입을 봉쇄하는 일에까지 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 문제에 북한 탓
3월 16일의 윤 대통령처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도 협정 발효일인 1965년 12월 18일 이 문제에 최종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협정 체결일인 그해 6월 22일로부터 6개월 만에 조약이 발효된 이날, 박정희는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 속의 박정희도 일본이 아닌 북한에서 이유를 찾았다. "호전적인 중공의 사주를 받아 언제 재침해 올지도 모르는 북괴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 한 나라라도 더 많이 우리 우방으로 만들어 상호협조관계를 맺고 그러한 국제협력의 기조 위에서 조국의 근대화와 자립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우리의 힘으로 국토를 통일할 수 있는 자주적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당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라고 역설했다.
북한의 위협에 맞서고자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하고 일본과 상호협조관계를 맺으면 그런 기조 위에서 우리 힘으로 통일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힘을 끌어들여 우리 힘으로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른다는 이상한 논리가 깔린 발언이었다.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미래를 위한 결단도 강조했다. "우리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를 계기로 양국이 미래지향적 발전 방향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에 미래를 얻었다는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날 박정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의 입에서도 미래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과거 36년간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구적(仇敵)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입니다. 그것은 우리 현재가 아니며, 또 미래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해에 양금덕은 36세였고, 이춘식은 41세였다. 이들에게는 일제 피해가 1965년에도 '현재'였고 2023년 지금도 '현재'다. 박정희는 식민지배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라며 미래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틀린 말이었다. 윤 대통령도 새로운 미래가 열리게 됐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양금덕·이춘식에게는 그날의 아픔이 '현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박 정권도 윤 정권도 일본 뜻대로
▲ 1박2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의장대 사열에 앞서 양국 국기에 예를 갖추고 있다. ⓒ 연합뉴스
16일 정상회담에서는 미래 세대를 위한 협력 기금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윤 대통령은 "오늘 양국 경제계는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며 "이번 기금의 설립이 양국의 미래 지향적 협력을 위한 의미 있는 교류와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이 기금을 거론하면서 "정부로서도 미래를 짊어진 젊은이들의 교류를 계속해서 지원해 나가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한·일 양국이 미래 세대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다. 그러나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글픈 것은 한·일협정 비준 당시의 양국 정부도 이런 방법을 구사했다는 사실이다. 협정 비준 다음날의 상황을 전하는 1965년 12월 20일 자 <경향신문> 3면 우상단 기사는 다카스기 신이치 한·일회담 일본 수석대표에 관해 이렇게 보도했다.
한·일 국교의 새 길이 트인 다음날인 19일 상오 조선호텔 335호실에서 기자와 마주앉은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식 일본전권대표단 고삼진일(高杉晋一,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 씨는 일본군국주의 정책으로 동원령이란 이름 아래 중국대륙과 남양 등지에 끌려가 죽은 수많은 한국의 학병과 강징된 한국 사람 또는 그들의 2세에게라도 사죄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1)유해 찾기, (2)졸업장 추서 (3)육영재단 설립 등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학병 및 징용 피해자들과 그 2세를 위하는 마음으로 영재 육성을 위한 육영(育英)재단을 세우겠다고 공약했다. 이 시절에는 장학재단이란 의미로 육영재단이란 표현이 곧잘 사용됐다. 다카스기 대표가 말한 육영재단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공약은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실제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났다. 학병 및 징용 피해자와 2세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는 한, 이들의 한과 상처는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렇게 했기 때문에 2023년 지금까지도 이 문제가 한·일관계를 강타하게 된 것이다.
대권 도전을 선언한 2021년 6월 29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역사와 경제를 한데 버무리는 한·일관계 정상화 방식으로 그랜드 바겐을 언급했다. 1950년대부터 일본이 주장한 이 방식을 받아들인 것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였다. 박 정권은 이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대권 도전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일괄타결 방식을 언급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윤 정권은 출발점에서부터 박 정권과 비슷했다. 윤 정권 하에서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은 1961~1965년의 압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적 저항과 반대 속에서 박 정권이 북한 위협과 한·미·일 군사동맹을 내세우면서 그랜드바겐 원칙 하에 사과·배상 없이 국교를 정상화했던 상황은 지금과 꽤 흡사하다.
최종 상황이 임박한 1965년 초반에 일본 정부가 박 정권을 독려하고자 일본 방문 및 한·일정상회담 카드를 꺼내든 것조차 비슷하다. 막판에 북한 위협과 미래 세대 및 장학재단을 운운하는 것마저 거의 유사하다.
이는 지금까지 윤 정부가 '일본의 승리 공식'대로 움직여왔음을 의미한다. 그 공식에 따라 박 정권도 움직였고 윤 정권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의 승리 공식일 뿐, 한국 정부의 승리 공식은 아니다. 박 정권이 그 뒤 민심 이반을 겪고 이를 끝내 회복하지 못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16일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의 국익은 일본 국익과 제로섬이 아니라 윈윈할 수 있는 국익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식민지배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의 이익이 한국 정부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시다 내각에 플러스 되는 만큼 윤석열 정부에는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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