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풍경
(WWW.SURPRISE.OR.KR / 탁류 / 2022-04-25)
과거에도 나는 고향에 대한 내 생각을 틈틈이 정리했다. 이 글은 고향 3.0 정도쯤 된다. 20대에 그랬고 40대에도 그랬다. 이제 50을 훌쩍 넘긴 지금 고향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 고향은 나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1. 초라한 앞산
미끌미끌한 돌에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때로는 아재 등에 업혀 조심조심 건너던 거랑엔 어느새 다리가 놓여 있었다. 나는 다리가 싫다. 작은 다리를 건너고 아랫동사태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흙길을 걸었다. 연어가 제 고향을 찾아올 때도 나처럼 흐릿하면서도 듬성듬성 또렷한 냄새 같은 감각에 의존하겠지. 내가 장에 간 엄마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동구 밖 풍경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때 나는 놀랐다. 이게 뭐지? 동구나무가 왜. 저렇게 키가 작은 거야? 하늘만큼 크게 솟아오른 나무의 드리워진 가지 위로 무서워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던 그 동구나무가 왜 저렇게 초라하지? 아직도 내 기억 속엔 가는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아부지가 엄마와 동구 밖 옆 작은 밭에서 감자를 캐고, 엄마가 내 입속에 넣어준 생감자의 달풋하면서도 떫은 그 맛이 느껴진다. 그날 동구밖의 느티나무는 아주 컸다. 내 기억 속의 느티나무는 키가 10미터는 넘는데 다시 찾은 고향의 느티나무는 나지막했다.
놀라서 주위 산들을 둘러보았다. 맞은편 산에 담뱃잎을 따러 가신 엄마를 따라가던 앞산과 천둥이 치던 날 놀라 울음을 터뜨리던 뒷산이 나막나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앞산과 뒷산은 우뚝 솟아있었는데, 이젠 난쟁이들처럼 내 눈앞에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내가 그동안 키가 커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걸어보기도 하고, 내 눈이 커져서 그런가 싶어 눈을 단춧구멍만 하게 만들어 실눈으로 고향의 산과 들을 응시해 보기도 했다.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조그마하고 소박해 보였다. 나의 뇌를 낳아 준 자궁과도 같은 그 집, 내 고향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나는 그 초라함에 놀란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얼마나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던가. 고향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너무 커서 내 기억이 고향에 대한 비현실적인 인상을 그동안 구축한 탓이려니....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 이유를 더 들여다보게 된 것은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고향을 찾던 날이었다.
나는 20대 중반에 이른 눈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우리 집에서 앞산을 응시했다. “왜 이리 앞산은 내 기억 속의 앞산과 달리 이토록 초라한 것인가?” 그때 대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넌 지금 니 기억 속의 앞산을 보고 있는 게 아니야. 그 앞산은 어렸던 너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지금의 앞산은 여전히 그때의 앞산이지만, 너는 지금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동안 살아오면서 니 머릿속에 쌓아놓은 다른 거대한 산들의 모습과 지금 니 눈에 비치는 앞산을 비교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지금 히말라야보다, 록키산보다, 안데스, 알프스보다, 더 작은 초라한 어떤 산을 보고 있는 것이지 어린 시절의 앞산을 보고 있는 건 아니지. 니가 비교할 줄 몰랐다면 지금의 이 앞산은 니 기억 속의 앞산과 다르지 않았을 거야. 어린 시절의 앞산은 니가 처음 본 산이었고 그 산은 어떤 다른 산과도 비교되지 않는 산이었던 거야. 너의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어린 시절의 거대한 앞산을 지워버린 거야. 어때? 초라한 앞산을 보는 기분이? 눈 덮인 높은 산들을 보면서 니가 탄성을 내지를 때 그때부터 너의 앞산은 이미 그 거대함을 잃어가고 있었던 거야.”
2. 처음
<처음>은 모든 <태도가 형성되기 이전>의 때다. 그러나 <처음>은 사실 <무지에 대한 앎이 남기는 놀람>이다. 모르는 무언가를 처음 접하고 아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은 놀라움이다. 그 흔적은 렌즈를 수직으로 관통하여 촬상면에 뚜렷한 인상을 새기는 빛과 같다.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다. 놀라움과 흥분으로 뒤범벅된 이 뚜렷한 흔적이 나를 고향으로 이끄는 힘의 본질이다. 연어도 나처럼 그러지 않을까? 그리고 이 폭발은 앎이 반복될수록 점점 약해지다가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폭발은 터지는 순간 가장 강력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약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의 삶은 이런 폭발의 연속적 과정이다.
<처음>이 있다. 비록 나에겐 뻔한 나무와 길과 지붕일지라도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에게 그것들은 <처음>으로 놀랍도록 낯설게, 신비롭게 다가온다. 즉, 두 살배기 아이와 내가 보는 나무는 분명 같으나 현저하게 다르다. 아이에게 나무는 <처음>으로 다가오고, 나에겐 나무는 그동안 내가 본 모든 나무들과 나란히 병치된 어떤 나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무(대상)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관찰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앞산은 앞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앞산이다. 그 앞산을 관찰하는 내가 문제다. 무엇이 문제인가?
3. 태도
<태도>가 있다. 모든 것에 대한 태도(attitude)라고 하자. 따라서 앞산에 대한 내 태도가 있다. 앞산에 대한 내 태도는 <초라하다>에서 드러난다. <초라하다>는 앞산에 대한 내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초라한 앞산>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앞산은 그냥 앞산이지 초라한 앞산은 없다. 물론 거대한 앞산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악천후>가 있다. 눈과 비와 바람이 매우 낮은 온도에서 몰아친다. 날씨가 나쁘다는 말이다. 맑게 갠 20도 전후의 날씨는 좋은 날씨로 불린다. 그러나 바람불고 추운 날씨 또는 화창한 날씨는 있어도 나쁜 날씨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좋은 날씨도 없다. <좋다 또는 나쁘다>는 날씨와 무관한 날씨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반영한다. 날씨가 나 괴롭히려고 바람불고 비 오는 거 아니고 나 좋으라고 해 뜨고 맑은 거 아니듯, 앞산이 내가 보라고 거기 서 있는 게 아니다. 미제가 산하를 도륙할 때도, 일제가 강산을 수탈할 때도, 내가 태어나기 수천 년 전에도 아마 앞산은 거기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보다 나이가 비교할 수 없이 어린 한 놈이 몇 년 살았다고 “이야... 앞산이 내가 어릴 땐 안 이랬는데 뭐 이래 초라하노?”라며 당혹스럽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그 사건의 알맹이다. 따라서 관찰 대상(앞산)에 대한 내 <태도>를 배제하면 대상 그 자체만이 남는다. 그때가 되어서야 앞산은 앞산이 된다. 그럴 수 있다면, 앞산에 대한 내 <태도>를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신비로움 그득한 앞산을 바라볼 수 있다. 총각 때로 돌아가 그때의 마음으로 집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 늦은 밤 어떤 학교 교정에서 부둥켜안았던 그때의 들뜬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만물에 대해 형성한 태도를 스위치를 끄듯이 배제하거나 없앨 수 있을까? 인상적인 도약 같은 건 없다. 불가능하다. 그것은 내가 총각으로, 집사람이 처녀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고 늙어버린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이 안 되면 마음도 안된다.
4. 영향
산은 다른 산에 대한 인식에도, 관찰자에게도, 모두 영향을 미친다. 내가 관찰하고 있는 산은 이 산이지만 내가 과거에 본 저 산이 영향을 받는다. 큰 산들은 원래 크지 않았다. 그 산들도 처음엔 그냥 산이었다. 그러나 내가 고향의 앞산을 <안> 이후 히말라야는 큰 산이 되어버렸고 내 기억 속의 앞산은 작은 앞산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히말라야를 관찰하는 것은 나에게 앞산을 <초라한> 앞산으로 바라보게 만듦과 동시에 산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게 만드는 연쇄적 영향을 미친다. 나는 단지 두 개의 산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일단 산에 대한 태도가 형성되면 다시 그 태도는 연쇄적으로 산에 대한 나의 <판단>을 형성시킨다. 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 만약 내가 히말라야보다 더 큰 산을 보게 된다면 산에 대한 나의 태도와 판단은 다시 수정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복수의 대상에 대한 관찰 행위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절대적 태도와 판단을 허용치 않는다.
5. 있고 없음
산은 뭔가? 산은 나의 비교하고 분별하는 세계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다. 모든 존재가 본래 그러하다. 내가 관찰하고 분별하지 않을 때, 즉 산이 산일 때, 그 산은 그 자체로 완전한 절대값을 가진다. 그러나 일단 내가 산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산은 그 절대값을 버리고 영원히 고정되지 않는 상대값만을 가지는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린다. 큰 산이 작아지고 작은 산이 커질 수도 있다. 지금도 내가 삶에 지쳐 흐느적거릴 때면 반경 0.5키로도 채 안 되는 조그만 땅덩이가 내 영혼을 저 밑에서 울린다. 그게 내 고향이 가진 힘이다. 나는 영원히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무엇을 관찰할 때 나는 내가 아는 무엇과의 비교에 의해서 그것을 관찰하게 된다. 절대적인 그것은 없다. 이것과 비교되는 저것이 있을 뿐이다. 붉은색은 그 자체로 붉은색이 아니다. 붉은색은 희지도 검지도 푸르지도 않아서 그저 붉은 것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흰색이 없으면, 검은색이 없으면, 푸른색이 없으면 우리는 붉은 것을 인식할 방법이 없다. 붉은색은 그 자체로 붉은 것이 아니다. 푸르거나 희거나 검거나 노랗지 않아서 붉은색이다. 따라서 온 세상이 모두 붉다면 붉은색은 없는 게 아니라 색에 대한 개념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붉다는 것을 인식할 상대값이 없기 때문이다. 붉은색을 그 자체로 붉은색으로 볼 수 있고 늙은 마누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붉은색은 붉은색이요 늙은 처는 젊은 시절의 처와 같고 산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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