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21.03.16 07:20ㅣ최종 업데이트 21.03.16 07:20
싱가포르 주택보급률은 112.6%에 자가점유율 92.3%입니다. 한국 주택보급률 104.2%, 자가점유율 56.8%와 비교해 보면 자가점유율이 월등히 높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싱가포르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자기 집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비법은 HDB라고 부르는 공공아파트에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민의 약 80%가 HDB에 살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민은 평생 두 번까지 HDB를 분양 받을 수 있는데 분양가는 시세보다 20~30%정도 저렴합니다. 거기에다가 생애 최초로 집을 구입하는 이에게 소득에 따라 할인 혜택이 있고, 부모의 집과 동일한 구역에서 분양을 받을 경우 추가 할인 혜택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집값의 75%까지는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고, 나머지 25%도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격인 CPF로 낼 수 있어서 실제로는 집값의 10% 정도만 있어도 쉽게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입주 후 5년 뒤에는 자유롭게 팔 수 있는데 분양가 대비 시세가 상당히 높습니다.
싱가포르 자가점유율 92% 비결
이처럼 집을 살 때는 적은 돈으로 쉽게 살 수 있고, 팔 때는 비싸게 팔아 시세차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싱가포르 국민들은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하면 제일 먼저 HDB 분양을 받습니다. 서민들 입장에서는 사기도 쉽고 사는 게 곧 이익이지만, 기존에 다른 집을 가지고 있거나, 월수입 1만 4천 달러 (약 12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는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습니다.
▲ 싱가포르 아파트 단지의 모습입니다. 그 앞의 너른 잔디밭은 추후 개발을 위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땅입니다. ⓒ 이봉렬
싱가포르 정부는 어떻게 시세보다 싸게 국민의 80%에게 HDB를 공급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는 토지임대 환매조건부 분양방식이라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HDB를 살 때 땅까지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니라 땅은 99년 동안 정부로부터 빌리는 형식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HDB의 소유권이 정부로 귀속됩니다.
이 대목에서 싱가포르는 어떻게 그 많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첫 번째는 매립입니다. 1965년 독립 당시 전체 국토 면적이 580㎢ 였는데 꾸준히 바다를 매립해서 지금은 722㎢로 24% 이상 확장된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 바다를 매립하고 있고 그로 인해 이웃 나라와 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 바다 매립을 통해 국토의 24%를 더 확장했습니다.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향후 매립이 예정된 부분입니다. ⓒ 싱가포르 국가개발부 (MND)
두 번째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토지소유자의 토지를 정부가 취득할 수 있도록 한 토지취득법(The Land Acquisition Act)입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말레이시아 연방의 자치구 시절에는 싱가포르 인구의 10%만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국민 대부분은 영국 주택위원회로부터 "문명 사회에 대한 수치"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에 현 집권당인 인민행동당(PAP)은 1959년에 정부를 꾸리자마자 주거환경 개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주거단지를 조성하려고 할 때마다 해당 지역 땅 주인들의 반대로 사업이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다음 해인 1966년, 싱가포르 정부는 기존의 토지취득조례를 대신할 토지취득법을 제정했습니다.
국가개발부 산하 살기 좋은 도시 센터(CLC)가 2014년에 펴낸 '도시시스템연구' 보고서는 토지취득법의 네 가지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 광범위한 목적을 위해 사유지를 취득할 수 있다.
2. 토지 소유자가 정부의 토지 취득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가 없다.
3. 토지 소유자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은 시세 이하로 한다.
4. 보상금에 대한 분쟁은 항소위원회를 통해 해결한다.
명백하게 불공정해 보이는 이 법은 소수의 부유한 지주와 기업들이 싱가포르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다수의 서민들이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주거환경도 보장받지 못하는 당시 싱가포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인민행동당의 결단으로 평가받으며 토지 수용에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초기 토지 수용 과정에 땅 주인들의 재산권이 침해되는 경우가 많고, 수많은 분쟁이 있었지만 정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땅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손해였던 보상가를 현실화하기 위한 법 개정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이사를 해야 하거나 금융 상품의 변경에 따른 불이익 등 토지 수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실질적 손해와 불편에 대해서는 사안별로 보상을 하는 제도적 보완도 이루어졌습니다.
▲ 싱가포르 국토부의 토지취득법 관련 홍보자료. "땅은 반드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못박아 두었습니다. ⓒ 싱가포르 국토청 (SLA) 홍보동영상 갈무리
이 같은 토지취득법은 도시계획사업을 위해 정부가 민간의 토지를 강제로 취득할 수 있는 근거가 됨과 동시에 토지 수용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1949년 31%에 불과하던 정부 소유 토지는 1985년 76%까지 늘었습니다. 지금은 지속적인 매립과 추가 토지 수용으로 인해 그 비율이 90%에 육박합니다. 싱가포르 대부분의 땅이 정부 소유이며, 민간이 소유한 땅도 필요한 경우 언제든 수용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한국과의 결정적 차이
토지가 정부 소유가 되면서 그 땅에 짓는 아파트는 국민들이 쉽게 구입 가능한 수준으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른 나라라면 소수의 땅 주인들이 누렸을 토지가치 상승과 개발 이익을 싱가포르에선 아파트가 필요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나눠 누리게 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서도 토지취득법이 주택 및 산업 시설 건설비용을 낮추는데 효과적이었고, 도시 계획을 촉진했으며, 이를 통해 싱가포르 전체 경제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은 지금 LH공사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가 사회 문제화 되고 있습니다. 신도시 개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하여 미리 땅을 구입하고 거기에 보상 가격을 올려 받기 위해 묘목을 심는 등의 투기 행각을 벌인 것입니다.
한국에서 토지 수용 보상액의 산정은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협의' 혹은 '재결'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공익사업으로 인하여 토지 등의 가격이 변동되었을 때에는 이를 고려하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제 67조 보상액의 가격시점 등). 하지만 구체적인 조건이나 기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개발업무와 투기를 동시에 한 LH공사 직원에게 유리한 쪽으로 보상금이 산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에서 신도시가 새로 개발되면 그곳에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단번에 부자가 됩니다. 땅은 없지만 정보가 있는 LH공사 직원들은 계획 발표 전에 땅을 사서 보상금으로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신도시 개발 비용에 포함되어 집을 마련해야 하는 실수요자에게 전가됩니다.
그에 반해 싱가포르에서는 신도시가 새로 개발되면 그곳에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정부가 정해 주는 시세에 따라 보상을 받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야 하는 불편만 겪습니다. 개발 정보가 있다고 해서 투기를 할 공무원은 없습니다. 신도시 개발로 인한 혜택은 그 곳에 들어가서 살 실수요자가 누리게 됩니다.
리콴유 전 수상은 토지취득법 제정 당시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공공개발로 인한 토지 가치 상승이 토지 소유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지역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토지취득법 제정으로 실현되었고, 법 제정 후 5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싱가포르의 공공개발 현장에서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소수의 땅 소유자 대신 다수의 실수요자의 이익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싱가포르의 방식이며, 그로 인해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밀도에도 불구하고 자가점유율 92%로 최소한 집 걱정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LH공사 직원들의 부동산투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분노가 개발이익 환수와 실수요자 우선인 새로운 주택정책의 도화선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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